앞에서 이원론을 살펴봤으니 여기서는 구원 욕망과 자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왜곡하고 뒤틀리게 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삽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 욕망에, 어떤 사람은 권력 욕망에, 어떤 사람은 재물 욕망에, 어떤 사람은 애정 욕구에, 어떤 사람은 인정 욕구에 이끌려 정신없이 삽니다. 그런데 이런 욕망보다 더 근원적이고 강력한 욕망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 욕망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것, 학생들이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것, 공무원이 출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 구도자들이 진리를 체득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다 무엇 때문일까요? 예, 구원에 대한 뜨거운 갈망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고통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는 것, 절망의 나락에서 두려워 떠는 것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구원을 향한 부르짖음에 다름 아닙니다. 훌륭한 정치가가 나와서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소시민의 구원 갈망이라고 할 수 있고, 문학을 비롯한 갖가지 예술에 영혼을 쏟아 붓는 것도 구원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싯다르타 ‧ 노자 ‧ 공자도 구원 갈망에 이끌려 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소크라테스 ‧ 간디 ‧ 정약용 ‧ 세종 ‧ 알렉산더 ‧ 나폴레옹 ‧ 베토벤 ‧ 모차르트도 하나 같이 구원 갈망에 이끌려 진리의 길 ‧ 정치의 길 ‧ 정복의 길 ‧ 음악의 길을 걸었습니다. 종교 · 정치 · 교육 · 예술 · 전쟁 · 의술 · 스포츠 · 섹스 · 놀이 · 마약 · 과학 · 기술 · 경제 등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 또한 그 근원을 파헤쳐보면 구원 갈망과 잇닿아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구원 욕망은 삶의 모든 것, 인간의 모든 갈망과 잇닿아 있습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고민하며 찾은 것도 결국은 구원이었고, 기독교를 포함해서 유교 · 불교 · 도교 · 유대교 · 이슬람교 · 원불교 · 무속 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와 신앙 행위가 추구한 것 또한 구원이었습니다. 종교마다 구원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찾아가는 길도 다르고, 표현하는 언어도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구원이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복음에는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4:3-26). 이름 없는 여자가 한 낮에 물 길러 우물가에 나갔다가 우연히 유대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갈릴리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우물가에 앉아 쉬고 있던 예수님과 마주쳐 벌어진 사건입니다. 때마침 한 낮의 열기에 목이 말랐던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다가가 물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예수님이 유대인인 것을 알고 유대인 남정네가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며 멈칫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상야릇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당신은 나에게 생수를 구했을 것이고, 나는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순간 여자는 의아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 같기는 한데 선뜻 알아듣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여, 재차 물었습니다. 여기는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는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여자는 그 말을 듣자말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4:15)라고 간구했습니다.

참으로 뜬금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낯선 유대인 남자의 말을 듣고 즉각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이 여자의 뜬금없는 행동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구원론적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대한 목마름, 즉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구원론적 존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래, 삶과 생명의 근원에서 단절된 이래 모든 인간 속에는 에덴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뜨거운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갈망이요 집단무의식입니다.

집단무의식은 심층심리학자 융이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한계와 약점을 보완한 개념입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훨씬 풍부하고 깊다는 것, 무의식의 세계가 의식의 세계보다 인간의 행동과 삶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융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의 세계가 단편적일뿐 아니라 부정적인 측면에 치우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의식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했습니다. 또 개인무의식 뿐 아니라 집단무의식까지도 생각했습니다. 인간 속에는 개인의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은 인류 공통의 심적 기능, 즉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집단무의식은 유전에 의해 계승되며, 집단무의식에는 본래적이고 훼손되지 않은 인류의 기억과 정신의 총량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이 인간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 또한 ‘집단무의식’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아는 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깊이 소통하며 온전한 생명을 향유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둘이 한 몸처럼 행복했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온 생명과 아름다운 소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들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에서 경험했던 삶의 기억까지 지워버렸을까요?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몸은 비록 에덴동산을 떠났지만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았던 갖가지 삶의 경험들은 고스란히 아담과 하와의 뇌리(영혼) 속에 남았을 겁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득한 기억으로, 에덴에서 살았던 삶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으로 남았을 것이고, 다시금 에덴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뜨거운 갈망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자녀에게까지 전해졌겠지요.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에덴에서의 이야기도 들려주었을 겁니다. 아, 정녕 그랬을 겁니다. 한 세대 한 세대가 흘러가면서 에덴에서의 삶의 기억은 무의식과 이야기를 통해 자자손손 전해졌을 겁니다. 그리고 누천년이 지나면서 집단무의식으로 가라앉았을 겁니다. 그 집단무의식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그리움과 동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원 욕망으로 작용하는 것일 테고요.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의 경험 한 토막이 생각납니다. 전형적인 농촌 동네에 살던 저는 하루 종일 친구들과 뛰놀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 적이 많았습니다. 저녁밥을 지어놓고 ‘와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외침을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간 적이 많았는데, 그 때 저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을 보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아련함 같은 것,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 같은 것이 가슴 가득 확 밀려왔습니다.

그러다가 나이 사십이 넘은 어느 날 해질녘에 산책을 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내가 느꼈던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에덴동산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과 동경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융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제 안에 잠자고 있던 집단무의식이 노을과 겹치면서 튀어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싯다르타나 노자나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도, 어린 아이의 영혼 속에도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구조적으로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융이 말한 집단무의식이고, 이 집단무의식이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이 구원 갈망을 자극하여 다들 열심히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면에서 구원 갈망은 결코 나쁜 것일 수 없습니다. 아니, 구원 갈망은 인간의 근원 갈망이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삶의 필수 요소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구원 갈망이 구원 갈망으로만 있지 않고 ‘구원 욕망’으로 둔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구원 갈망’과 ‘구원 욕망’이 그게 그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갈망’과 ‘욕망’은 전혀 다른 양상을 만들어 내고, 전혀 다른 사태를 초래합니다. 우선 욕망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욕망은 기본적으로 탐하고 쟁취하려 합니다. 권력 욕망은 권력을 탐하고, 애정 욕망은 애정을 탐하고, 지적 욕망은 지식을 탐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 욕망은 하나님의 구원을 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손에 쥐려고 안간 힘을 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손에 쥐려고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하나님의 구원을 훼손하고 찌그러뜨립니다.

구원은 본래 공기와 같고 바람과 같습니다. 공기를 손에 쥐려 해도 쥐어지지 않고, 바람을 방 안에 저장하려 해도 저장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도 손에 쥐거나 창고에 쌓을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저 매순간 감사한 마음으로 편안히 공기를 호흡하고 바람을 맞이하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도 그저 매순간 감사한 마음으로 호흡하고 맞이하면 되는 무엇입니다.

그런데 구원 욕망은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욕망이라는 건 뭐든지 손에 쥐어야만 안심이 되고, 가득 쌓아놓아야만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구원 욕망 또한 손에 쥐어지지 않는 구원을 어떻게든 쥐어보겠다고 안간 힘을 쓰고, 쌓아놓을 수 없는 구원을 어떻게든 쌓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칩니다. 구원 욕망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원을 손에 넣기 위해서 할퀴고 물어뜯고 쥐고 흔들어댑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에다가 자꾸 욕망의 덧칠을 합니다. 손에 쥘 수 없는 구원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으로 변질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영생(구원)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는 것, 또 영생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폐부를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40).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람들이 영생에 관심이 있지만 정작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원치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을 갈망하지만 구원의 실체이신 예수님은 외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에 대해서도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온통 세상의 영광, 즉 사람들이 알아주는 영광을 차지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손에 쥐어지지 않으니까 손에 쥘 수 있는 세상의 영광에만 눈이 팔려 있으며, 누가 더 크고 빛나는 면류관을 쓰느냐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는 말입니다.

예, 이것이 바로 욕망의 실체입니다. 생명을 향한 욕망이 오히려 진짜 생명을 외면하게 하고, 진짜 생명을 짓밟게 합니다. 구원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짜 구원은 손에 쥐어지지 않으니까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손으로 쥘 수 있는 가짜 구원, 즉 만사형통이라는 구원, 무병장수라는 구원, 돈이라는 구원, 성공이라는 구원, 힘이라는 구원에만 군침을 흘립니다. 목회자들도 성도들의 구원 욕망에 편승하여 손으로 쥘 수 있는 구원을 열심히 퍼줍니다. 손으로 쥘 수 있는 구원을 퍼주지 않으면 성도들이 귀를 막아버리니까 성도들이 받고 싶어 하는 구원, 즉 만사형통이라는 구원, 무병장수라는 구원, 돈이라는 구원, 성공이라는 구원, 힘이라는 구원을 열심히 퍼줍니다. 예수를 잘 믿고 뜨겁게 기도하면 죽음 이후에 들어가는 천국행 티켓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욕망하는 건 뭐든지 얻는다고 뜨겁게 외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에다가 자꾸 욕망의 덧칠을 하는 겁니다. 쌓고 저장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을 쌓고 저장할 수 있는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겁니다.

 

혹자는 ‘구원 갈망’과 ‘구원 욕망’이 뭐가 다르냐고, 그게 그거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옳습니다. 구원 갈망과 구원 욕망은 백짓장 한 장 차이입니다. 구원 갈망과 구원 욕망의 거리는 한 뼘도 채 안 됩니다. 하지만 둘의 근원은 완전히 다릅니다. 구원 갈망은 생명과 진리를 향한 목마름에서 솟구치고, 구원 욕망은 자신의 처지와 운명을 바꾸겠다는 욕구에서 솟구칩니다. 구원 갈망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고, 구원 욕망은 자신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고후7:10). 구원 갈망은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고, 구원 욕망은 하나님의 구원을 만사형통의 구원, 무병장수의 구원, 부와 성공의 구원, 사후 천국행 구원으로 변형시킵니다. 이처럼 구원 갈망과 구원 욕망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릅니다.

때문에 구원 갈망과 구원 욕망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구원 욕망을 구원 갈망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구원 욕망을 구원 갈망이라고 착각한 채 구원 욕망이 충동질하는 대로 마구 좇아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을 인간의 구원 욕망에 맞게 뜯어고치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 욕망에 굴복했고 적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 욕망을 역이용했듯이 한국교회도 똑같은 오류를 범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 욕망에 굴복했고, 적극적으로는 인간의 구원 욕망을 역이용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한 마디로 구원론 타락의 역사였습니다. 모든 인간 속에 용솟음치고 있는 구원 욕망에 의해 하나님의 구원이 짓밟히고 왜곡되는 구원론 타락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을 소유하려다가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지고 소외되는 구원론 왜곡의 역사였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은 교회 안에서 인간의 구원 욕망에 의해 항상 변질되고 왜곡돼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손에 쥐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놓치고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인간의 구원 갈망은 왜 끝없이 구원 욕망으로 굴절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아 때문입니다. 자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의 여러 작용을 주관하며 통일하는 주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욕망하는 주체, 종교적 · 도덕적 · 사회적 행위의 주체라고 이해합니다. 자아와 관련해서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송인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A는 3일 후에 갚기로 하고 B로부터 백만 원을 차용했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 A가 B에게 빚 갚을 생각을 하지 않자, B는 A를 찾아가 책임을 추궁했다. 그러자 A는 B에게 “3일 전에 빚을 낼 때와 지금의 내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느냐?”고 실로 희한하게 책임을 피하는 것이었다.

다음 순간 B는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의도적으로 A의 얼굴을 내리쳤고, 그로 인해 A의 안경이 깨어지고 앞니 두 개가 부러지게 되었다. A는 노발대발하고 길길이 뛰면서 “네 놈을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때 B는 A에게 “네 얼굴을 때렸을 때와 현재의 내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고 대꾸했다는 것이다(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25쪽).

 

참 재미있는 이야기이지요? 저자가 꾸며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약속을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할 겁니다. 사람의 자아의식이 없거나, 혹 있다 해도 날마다 변한다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될 것이고,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으니 어떤 약속도 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가족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하게 될 겁니다. 말씀샘교회 또한 지금처럼 주일마다 함께 예배하며 밥 먹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회를 이루며 살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동일한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나’ 일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동일한 자아가 있기 때문이고, 또 내 안에 나만의 자아가 있고 너 안에 너만의 자아가 있기 때문에 나와 너는 서로 다른 사람일 수 있는 것이고, 서로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고, 책임을 다하고 물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는 이처럼 나를 나 되게 하는 중심이고,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준거이며,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고리입니다.

그런데 나를 나 되게 하는 중심이고,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준거이며,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고리인 자아가 구원 갈망을 구원 욕망으로 굴절시키는 주요인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왜곡하고 짓밟는 주요인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자아란 과연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이해하듯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욕망하는 주체, 종교적 · 도덕적 · 사회적 행위의 주체이기만 할까요? 이것은 일차적인 자아 이해, 현상적인 자아 이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인 자아 이해라고 하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아의 실체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내 정신의 어디까지가 자아의 정신이고 자아 밖의 정신인지, 내 감정의 어디까지가 자아의 감정이고 자아 밖의 감정인지, 내 영혼의 어디까지가 자아의 영혼이고 자아 밖의 영혼인지조차도 분별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자아’와 ‘자기’의 경계 또한 명확치 않습니다.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고, 또 고유한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도덕적 주체일 수 있고,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아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규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자아’라는 걸 직접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은 그저 인간을 말할 뿐입니다. 인간이 죄에 갇혀 있고 어둠에 갇혀 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으며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말할 뿐입니다(렘17:9, 롬3:12). 바울은 이런 인간을 가리켜 ‘옛사람’이라고 했고(롬6:6, 엡4:17,22, 골3:9), 요한은 아래에서 났다(요8:23)고 했습니다. 그리고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했고, 아래서 난 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간이 부패했다는 이야기는 뭘 의미하는 걸까요? 몸이 부패했다는 이야기일까요? 뇌나 마음이 부패했다는 이야기일까요? 영혼이 부패했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게 딱 잘라서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저 전인이 부패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면밀히 따져보면 전인이 부패했다는 것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언급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인이 부패했다기보다는 자아가 부패했다는 것이 좀 더 명확한 이해 아닐까요? 자아의 부패가 전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더 명확한 이해 아닐까요?

 

프랑스에서 정치사회학과 정치인류학을 공부한 후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키는 공부를 하고 있는 이종용은 “자아는 신으로부터의 독립성이라는 관념과 그에 따른 죄의식과 두려움”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아는 아마도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성을 향유하려는 어떤 관념적 힘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습니다(영혼의 슬픔. 138,44쪽). 자아와 자아의 삶의 성격에 대해서도 “자아는 덧없이 사라질 것에 거짓된 영원성을 부여한다. …… 덧없이 사라질 것에 거짓된 영원성을 부여하고 집착하다가 결국은 좌절하고 마는 것이 자아의 삶이다.”라고 설득력 있게 말했습니다(18쪽). 연이어 그는 자아의 논리를 7가지로 정리했습니다(143쪽).

 

1)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이려 한다.

2) 몸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3)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4)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한다.

5) 온제나 비교(比較) 속에서 존재한다.

6) 비교에 따른 결여로 인해 욕망한다.

7) 특별한 사랑 속에서 구원을 찾는다.

 

매우 타당한 분석이요 이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도 부합한다고 생각됩니다. 바울이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골3:5)라고 했을 때 ‘땅에 속한 지체’가 의미하는 게 뭐였을까요? 육체였을까요? 자기 존재였을까요? 그건 말이 안 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땅에 속한 지체’는 ‘자아’라고 봐야 합니다. 온갖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의 뿌리 또한 육체가 아닌 자아라고 봐야 하고요. 바울이 옛 사람을 벗으라(엡4:22,골3:9)고 했을 때에 의미하는 것도 육체가 아닌 자아이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고 했을 때에 의미하는 것도 전인으로서의 ‘자기’가 아닌 ‘자아’라고 봐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른다(갈5:17)고 했을 때에 육체의 소욕이 의미하는 것도 육체가 아닌 자아라고 봐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 이해에 근거하여 볼 때 자아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고 자기를 바라보는 욕망의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자기 욕망의 체계를 정당화하고 포장하기 위해 동원하는 이해의 체계까지를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세계와 자기를 바라보는 이해의 체계란 매우 부패하고 왜곡된 체계인데 그 부패하고 왜곡된 이해의 체계가 곧 자아이고, 자아가 욕망하는 모든 욕망의 체계가 곧 자아의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아란 부패한 인간의 중심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성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실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아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고(롬1:28),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이고요(요5:44).

 

그런 면에서 ‘자아’와 ‘자기’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만일 ‘자아’가 곧 ‘자기’라면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던 말은 도무지 성립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인데 하나인 내가 어떻게 날마다 죽는단 말입니까? 날마다 죽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나의 자아여야만 바울의 말이 성립됩니다. 또 바울이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으며, 원하는바 선은 행치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바 악은 행한다(롬7:19)고 한 것도 잘 살펴보십시오. 여기서도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아’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린 것이 ‘자기’가 아닌 ‘자아’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기’와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자아’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자기’는 결코 ‘자아’가 아닙니다. ‘자기’는 ‘자아’보다 훨씬 크고 광대하며 숭고합니다. 그런데 자아에게는 자기를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자아가 자기를 형성하고 자기를 이끌고 자기를 가둔다고 할 만큼, 물론 자기가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란 무척 어렵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만큼 자아의 힘은 강력하고 강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아’를 ‘자기’라고 이해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자아가 자기의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거의 언제나 자아에 이끌려 살고, 자아에 사로잡혀 살고, 자아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살기 때문에 자아를 자기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자아’가 ‘자기’는 아닙니다. ‘자아’가 자기 안에 있고, 자기의 일부분이며, 자기를 사로잡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아닙니다. 자아는 ‘거짓 자기’입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아’를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의 여러 작용을 주관하며 통일하는 주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욕망하는 주체, 종교적 · 도덕적 · 사회적 행위의 주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나 되게 하는 중심,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준거,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고리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아에는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고, 현상적으로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아의 본질은 아닙니다. 자아는 자기정체성의 근거가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중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성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실체요 체계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가운데 자아를 이렇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교도들은 대부분 자아를 ‘거짓 자기’로 이해하는데 비해 기독교인들은 ‘자아’를 ‘거짓 자기’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자아’를 곧바로 ‘자기’라고 이해합니다. 나를 나 되게 하는 중심, 즉 자기정체성의 근거라고 이해합니다. 자아에 대한 사전적 정의와 보편적 이해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자아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성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실체요 체계인데도 불구하고 자아를 자기로 이해한 나머지 믿음으로 자아의 삶을 열심히 추구한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짓 자기인 ‘자아’를 ‘자기’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충분히 납득되지만 어둠과 욕망의 체계에 갇힌 자아의 실체를 깨닫고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아를 자기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롬6:6)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옛 사람은 영혼을 포함한 전인으로서의 ‘자기’가 아닙니다. 거짓 자기인 ‘자아’, 즉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성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실체요 체계인 ‘자아’입니다. 그리고 이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구원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자기’의 죽음이 아니라 ‘자아’의 죽음이 곧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진짜로 부패한 것도 자아이고, 진짜로 구원받아야 하는 것도 자아입니다. 자아는 인간 안에서도 구원받아야 할 일차적 대상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직 자아만이 구원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이나 뇌나 영혼이 아니라 자아가 구원받아야 하는 진정한 대상이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종영이 말한 대로 ‘덧없이 사라질 것에 거짓된 영원성을 부여하고 집착하다가 결국은 좌절하고 마는 것이 자아의 삶’이기 때문에 욕망의 체계인 자아가 구원받아야 자아의 삶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가 구원받아야 육체도 구원받을 수 있고, 자아가 구원받아야 인격과 습관과 상처도 구원받을 수 있고, 자아가 구원받아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아가 구원받아야 존재와 삶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가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자백했고(고전15:31), 성도들을 향해서도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3:5),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롬8:13)고 권면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아가 죽는 것만이 진정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자아가 죽지 않으면 구원이란 말짱 꽝이기 때문에 날마다 죽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또 자아가 죽는 것이 참된 구원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간청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아는 완강하게 죽기를 거부합니다. 자아는 ‘자아가 곧 자기’라고, ‘자아의 죽음은 곧 자기의 죽음’이라고 속삭이면서 완강하게 죽기를 거부합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지배하며 호령했던 호시절을 생각하면서 ‘자아’의 권력을 결코 내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현실 또한 자아 중심적 욕망 체계가 쉬지 않고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아의 기만책에 속고 있으며, 자아 중심적 욕망 체계인 세상의 현실 앞에 무릎 꿇고 있습니다. 머리와 입술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가 죽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아의 욕망에 편승해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아의 욕망 성취를 구원이라고 확신하고 열심히 성실하게 자아의 욕망을 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아니,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교회의 현실입니다.

자크 엘룰은 이런 교회의 현실을 향해 물었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거꾸로 만들어버렸을까? 이 왜곡을 끌어들인 힘은 무엇이며, 메커니즘은 무엇이며, 전략은 무엇이고, 구조들은 무엇인가?” 그는 이 물음에 대해 “그것은 인간이 자기 힘을 확대시키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뒤틀려진 기독교. 28쪽)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옳습니다. 인간의 끝없는 자아 확대 욕망이야말로 기독교를 거꾸로 만든 힘이고 메커니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성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실체이자 체계인 ‘자아’야말로 구원 갈망을 구원 욕망으로 굴절시킨 주요인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왜곡하고 짓이겨 누더기로 만든 주역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하나님의 구원은 본래 욕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광야의 만나와도 같습니다. 만나를 다음 날까지 저장해놓으면 이내 곧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도 저장해놓으려 하는 순간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납니다. 구원은 구원이 아닌 것이 돼버리고,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져버립니다. 또 하나님의 구원은 공기와도 같습니다. 공기를 손에 쥐려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도 손에 쥐려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공기가 사라질까봐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도 사라질까봐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매 순간 하나님의 구원을 향유하면 됩니다. 이미 여기에 있는 구원을 믿음으로 향유하면 됩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진실을 망각한 채 하나님의 구원을 손에 쥐고 쌓으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감히 욕망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을 왜곡하고 짓이겨 누더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자아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욕망의 실체이자 체계인 ‘자아’가 구원 갈망을 구원 욕망으로 굴절시킨 주역, 하나님의 구원을 이기심에 가두고 파편화시켜 누더기로 만든 두 번째 주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