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5일(화)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했다는 눅 17:16절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13일 묵상에서 그것이 절대 순종을 의미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렇게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실제로 그런 영성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기에
오늘 한번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겠다.
보통 순종이라고 하면
말을 잘 듣는 거라고 여긴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직장 상사의 말을 잘 듣고
심지어 목사의 말을 잘 듣고,
국가와 정부의 말을 잘 듣고,
남편의 말을 잘 듣고 ... 등등,
주로 수직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태도이다.
이것으로 순종의 참된 의미가 다 드러나는 건 아니다.
본회퍼가 감옥에 있으면서 가족과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나중에 그의 친구 베트게가 묶어낸 책인 <옥중 서간>의 원제는
<순종과 항거>다.
본회퍼에게 순종은 항거의 이면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만
적그리스도에게는 항거한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에게 강력하게 항거하다가
결국 순교자가 되고 말았다.
절대 순종은 경우에 따라서
자신이 파괴되는 걸 감수할 때만 가능한 게 아닐는지.
발아래 엎드리는 절대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자기’가 너무 강하게 작동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모든 것의 잣대가 된다.
저 친구는 왜 저래, 하는 식으로 판단한다.
나도 그럴 때마다 깜짝하고 놀랜다.
여전히 절대적인 하나님 경험이 부족한 탓이리라.
하나님이 내 영혼에 가득하다면
결코 자기 중심에 갇혀서 살지는 못한다.
나도 갈 길이 멀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사람은 대신 죽음을 생각하면 된다.
조금 후, 또는 내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면
발아래 엎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늘’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게 아니어서 문제다.
결국 죽을 때까지 우리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안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분의 자비를 간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