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6일(토)
성서를 관통하는 큰 흐름의 하나는 의(義),
즉 ‘옳음’에 대한 것이다.
구약은 율법을 통해서 의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선지자들도 개인과 사회의 정의를 외쳤다.
의, 율법, 옳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웬만해서 의로워지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가 그걸 증명하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더 옳다는 보장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는다고 표현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하지만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옳게 살아야 한다는 건 아는데
옳게 살 능력은 없다.
이게 인간의 딜레마다
거기서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이 일어난다.
내일 설교의 성경 본문은 눅 18:9-14절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판단이다.
율법에 충실했던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율법과 거리가 멀었던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두 가지 기질이 동시에 우리 안에 있다.
바리새인과 세리는 우리 자신이며
더 나가서 인류 자체다.
누가 옳은 사람인가?
바리새인인가, 세리인가?
행동으로만 보면 바리새인이 옳지만
존재론적으로 보면 세리가 옳다.
각자 자기의 분량대로 살아갈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옳음의 문제는 우리에게 속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옳다고 인정해야 옳은 거지
사람이 옳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이게 과연 말이 될까?
억지 아닐까?
은근히 부담이 되는군요.
설교를 조금이라도 허투로 하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요.
웨하스 님이 지난 <어린 왕자> 연재글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지요?
그 책을 내 수준에서 해석한 글이었어요.
문학이나 철학 등과 마찬가지로
신학도 그 기본은 텍스트 해석이랍니다.
성경이 뻔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창조와 종말, 생명의 원천을 담고 있기에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등장하기만 하면
훨씬 깊은 세계를 드러내는 이야기에요.
<어린 왕자>도 읽는 사람의 수준만큼 읽혀지듯이
<성경>도 읽는 사람의 영적 경지만큼 읽힌답니다.
우리가 성경을 더 깊은 영성으로 읽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저의 문제예요. 큰 힘을 얻습니다.
글을 읽으며 주시는 위로에 눈물이 나지요
옳게 살 능력이 없어서... 슬퍼요 목사님
믿음으로 사는게 뭔가란 물음앞에 이론이 아닌
삶으로 살아 내는게 어렵습니다.
오늘 설교도 세리의기도일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