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7일(목)
루터는 1546년 2월18일 새벽에 죽었다.
돌연사라고 할 수는 없으나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자기의 기력이 다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렇게 금방 죽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기 얼마 전에도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다시 비텐베르크로 가게 된다면,
나는 관 속에 누워 벌레들에게 뚱뚱한 박사를
실컷 포식하게 해줄 것이다.”
루터의 시신은 의장병에 의해서 비텐베르크로 운송되었다.
중간에 유해가 안치되는 곳마다 군중들이 몰렸다.
그의 유해가 도착하기 전에 전령이 먼저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텐베르크 사람들은 그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루터의 오랜 친구이지 개혁 운동의 동지인 맬랑히톤은
강의 중에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엘리야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기병이 떨어졌도다.
이스라엘의 병거여, 그 기병이여!
Alas, obiit auriga et currus Israel!”(왕하 2:12)
루터는 운이 좋았다.
그는 죽을 뻔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추기경이나 황제 앞에 재판을 받으러 호출당할 때마다
그는 실제로 죽을 각오를 다졌다.
당대에 화형을 당한 종교개혁자들이 실제로 있었다.
루터에게 따른 운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가 된다.
1) 당시 독일에 중산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로마에 저항하는 루터를 지지했다.
2) 독일의 민족주의도 한몫 했다.
3) 프레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해서 몇몇의 유력 정치인들이 루터를 지원했다.
4) 비텐베르크 주교와 신학대학 동료들의 지지가 컸다.
5) 당시의 유럽 정치 역학도 도움이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루터에게 초점을 맞춰 본다면 두 가지다.
1) 루터의 신학이 당시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로마가톨릭의 신학은 낡은 패러다임이었기에
루터 신학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2) 루터 신학이나 세계관이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었다.
만약 사회개혁까지 아우르는 변화를 추구했다면
십중팔구 그의 개혁운동은 실패했을 것이다.
영주들과의 관계가 나빠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대에
혜성같이 나타나서 불을 지핀 사람이다.
역사가 그의 개혁운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가 역사를 새롭게 했다.
어느 정도 개혁의 열매를 맛보고
루터는 63세에 나름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
목사님께서 소개해주신 책, <루터- 하나님과 악마사이의 인간> H.오버만, 좀 읽어보렸더니 품절 절판되어
아예 상품검색창에 뜨질 않네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루터 생애를 다룬 책이 여럿 있는데 괜찮은 책으로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 댓글 보시는 선생님들께서도 소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