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일(토)
지난 설교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이다.
“... 더 나가서 본문의 세리처럼 지금 여기서 이미
그 옳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옳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저 말은 ‘칭의의 능력’이라고 보면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삶의 참된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능력을 다르게 생각한다.
돈이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제압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것을 삶의 능력으로 여긴다.
그게 우리 눈에 쉽게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사실을 인식하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겼다는 뜻이다.
그런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삶의 과정을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길로 여긴다.
우리 눈에 좋게 보이거나 나쁘게 보이는 것의 차이가 없다.
실연을 당하거나 사업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로 인식된다.
그것이 삶의 능력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능력을 갖추고 사는 게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생존 본성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은
생존 경쟁을 통해서 진화되어 온 탓에
그것이 우리 몸에 완전히 배어 있다.
상대를 제압하는 방식이 아니면
뭔가 불안하게 느낀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싸워서라도 상대를 굴복시켜야 한다.
문제는 상대를 굴복시켰다고 해서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자기보다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나면
자기가 굴복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투쟁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나
그런 방식으로는 참된 평화를 얻지 못한다는 딜레마에 갇혀 있다.
기독교인의 삶은 차원을 완전히 달리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권력을 손에 넣거나
마음 수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다.
그 희망과 일치될 때 참된 삶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칭의(옮음)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