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일(금)
지난 주일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가 비록 신앙의 부침이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하면
평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신앙이 앞으로 진보할 것이며,
삶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삶의 완성’이라는 말을 오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완성은 불가능하다.
구원받았는데도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소위 구원파다.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회심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일종의 실증적 구원론이다.
구원에 대한 열정은 높이 살만 하나 구원이, 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긴장관계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적으로 미숙한 것만은 분명하다.
요한 웨슬리는 ‘기독자 완전’(Christian Perfection)이라는 개념을 말했다.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의 특징이 여기에 있다.
웨슬리는 기독교인들이 중생 이후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어느 지점에 이르면 기독교 완전의 단계에 이른다고 보았다.
이걸 성령 세례, 불세례라고 한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경지를 가리킨다.
물론 기독자 완전의 단계에 들어가도
죽기 전까지는 잘못이 없을 수는 없으나
완전이라는 말을 붙여도 좋을 정도의 단계에는 이른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여기서 따지고 싶지 않다.
기독교인의 삶이 실제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말하는 삶의 완성은
구원파의 그것도 아니고 웨슬리의 그것도 아니다.
그 삶의 완성은 세상과 상관없이 하늘에서만 실현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점진적인 노력으로 실현해야 할 삶의 목표도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약속된 종말론적인 생명 사건이다.
그 생명 사건은 아직 우리에게 실현되지 않았으나
이미 우리의 삶에 비밀한 방식으로 개입되어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예수의 운명에서 경험했고,
오늘 우리는 그런 신앙경험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져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듯이
예수의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져서
우리도 이미 그 부활생명에 참여 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삶은 완성을 향해서 나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