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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신비라는 말에서 ‘신비’는 오해받기 쉬운 단어다. 특히 개신교회에서는 그런 오해가 잦다. 신비를 산신령에게 나타나는 속성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는 마술 비슷한 것으로 여긴다. 한국교회에서는 기도원 운동이 이런 왜곡된, 또는 정통 기독교 사상과는 구별되는 신비주의와 결합되었다. 방언, 입신, 축귀 등의 능력도 신비로 받아들여진다. 기독교 정통신학에서의 신비는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 나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중세기 신비주의자에게서 기독교의 정통 신비주의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에크하르트는 그 누구보다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유한 속에서 무한의 깊이를 논리와 합리의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아래는 폴 틸리히의 설명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개인이 신적인 것의 심연에서 사라지는 절대적, 또는 추상적 신비주의, 곧 동방적 신비주의나 신플라톤적 신비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정통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조차도 그것을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이라고 일컬었던 것으로,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현존하는 신과 직접적으로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통주의 신학자들도 여기서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신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보았다.(폴 틸리히, 그리스도교 사상사, 228쪽).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신비주의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비는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서 궁극적인 것을 만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우주물리학과 양자역학을 알아야만 세상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깊은지를 내다볼 수 있으며, 거기서 신비를 경험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역사도 기계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진화의 돌연변이 현상은 역사에서도 일어난다. 개인의 실존에는 무한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자 궁극적인 미래인 하나님 경험을 신비 외에 그 어떤 개념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폴 틸리히의 제자인 존 쉘비 스퐁 감독은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거이며,
생명의 원천이고 사랑의 원천이다.
기독교인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신비의 바다를 헤엄치는 사람이다.' 고 했네요.
목사님이 말하신 존재 신비와 맥이 비슷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