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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존재 신비로 경험한다는 주장은 철학적이거나 자연주의적인 관점이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거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일리 있는 반론이다. 그리고 목회 현장에서 볼 때 현실적인 반론이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살이에 관한 것만으로도 머리가 충분히 복잡하기에 교회에 나와서까지 현학적인 것으로 오해될 수 있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더구나 예수 복음은 존재나 신비 같은 개념적인 용어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전달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주장은 옳다. 설교자인 나도 역시 교회를 찾아온 회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는 한 가지 메시지만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하나님 경험’을 말하는 이 자리에서 존재 신비를 강조하는 이유는 복음을 구호로만 다루지 말고 거기에 내용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복음의 내용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토대에서, 즉 삶의 총체적 관점에서 채워지지 않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공동체가 아니라 종교 마켓으로 전락하게 되고, 목사는 마켓 매니저로 자리매김을 당할 것이다. 삶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은 그런 조짐을 이미 충분할 정도로 느끼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미 오래 전에 이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다른 이들로부터 구원의 내용에 관해서 질문받기 전에라도 구원의 수행자로서 우리 스스로 묻고 답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목사 구원』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