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0편 강해-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시편 40편입니다. 읽겠습니다.

 

〚다윗의 기념하는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6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9.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11.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12.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13.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15.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16.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아멘! 오늘 이 말씀의 내용을 하나하나 우리가 따라 간다면 할 이야기가 많이 있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 시인의 그 영적인 경험을 다 따라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그가, 혹은 이 시를 형성한 그 공동체가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한 하나님의 계시를 2500. 6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의 차이가 있고요, 그리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다른 우리가 오로지 다 따라 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이 말씀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언어가 모든 것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언어가 어떤 영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온전히 열린 자세로 의존할 수 있다면 처음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한 이 사람들의 그 어떤 영적인 상태, 혹은 사태를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언어의 힘이지요. 또 하나는 더 근본적인 것인데 우리의 어떤 인식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다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들이거든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요. 또 그 성령이 지금도 우리에게 활동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연다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 원래 계시, 원래 그분의 구원사건,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는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조금 앞에 제가 말씀 드리는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것이 있지요? 그러한 구절들, 신약 서신서 어디에 나오지요? 제가 잠깐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러한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보통 그런 경우면 아, 기도하다가 막 떠올라서 그리되었다, 그냥 어떤 열광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이 기록할 수 있도록 막 불러 주셔서 따라 간 거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향해서 마음을 열 때에 가능한 진리 경험이라고 할 수 있어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딤후3:16),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1)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도 하니까요. 그런 영성가지요. 신학자고 영성가이고 신비주의자들이고 예언자들이고, 성령이 그들을 감동시키는 거지요? 진리를 경험하게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 것에 온전히 자기자아는 작아지고 그런 영에게 강력하게 자기를 사로잡히는 그런 경험들, 그런 가운데서 성서를 기록할 수 있었거든요? 참고적으로 한 마디 더 한다면 그들은 본인들이 성서를 기록한다는 생각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이야기겠지요? 지금 내가 이렇게 쓰면 앞으로 성경이 되고 어떻게 될 거다, 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인이 순전히 목적을 의식하지 않고 시적인 경험을 하고 시를 쓴 것처럼 이 성서기자들도 그런 상황, 그런 경험 속에서 이 말씀을 기록한 거예요. 오늘 이 40편 말씀의 결론 부분을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가 여태까지는 앞에서부터 봤는데요, 그게 원칙이긴 합니다마는 그러나 이 40편 전체가 한 통으로 되어 있어서 사실은 앞부분이나, 끝 부분이나 다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그것이 어느 정도로 일관성이 있느냐 하는 것은 시편에 따라서 다르지요. 정말 하나의 주제로 쭉 연결되는 것들이 대다수고요. 개중에는 끊겨지는 것도 있습니다. 여러 시 구도를 연 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런 것들의 수집물도 있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중간 중간에 연결이 떨어지게 되겠지요. 그래도 이 시편 전체가 편집되는 과정에서 약간의 끊겨지는 현상, 어떤 긴장, 그런 것마저도 받아내는 겁니다. 그런 긴장이나 차이, 그런 끊어짐의 현상을 너머서서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경험과 신앙고백으로 받아드려졌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일관성이 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이 마지막 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제가 쭉 읽다 보니까요, 마지막 절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16절, 17절을 볼까요? 16.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예, 그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들, 그런 자들은 혹은 세력들은, 혹은 사상들은 혹은 그런 학파들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조소하거든요? 15절에서 하하 하하 하고 조소한다고 그랬어요. 그들이 자기 수치로 놀라게 하소서 앞에서 15절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즐거워한다고 하고 16절에 올라오고 있어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수치로 놀라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은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이 문제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치시라고 하는, 친다기보다도 보통 시편에 많이 나와 있듯이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그런 의미도 여기에 부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시편에 그런 표현들이 많이 있거든요. 본인들이 직접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런 표현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그럴까, 원수를 사랑 하지는 못할망정 원수를 원수로 갚지는 말아야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참 어려운 문제인데요, 하나님을 향해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이 기도는 어떤 증오심에서 나온 기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그런 폭력과 폭력, 악과 악순환이 끊겨지는 거거든요? 상당히 승화된 상태에서의 어떤 분노, 이런 것들을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는 것 뿐 입니다. 여기 자기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구절의 두 번째 의미는, 앞에서 말씀드린 게 첫 번째이고요, 그건 일반적인 시편기자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그런 생각하고 일치되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에 따른 건데요, 이건 원수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 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기도라고 합니다.

 

자기수치로 놀라게 된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따르는 사람들을 조소했던 것 때문에 그게 얼마나 잘못 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수치심을 느끼게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에게 돌아오잖아요? 어쨌든 16절에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결론적으로 16절과 17절에서 시편기자가 이렇게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거예요. 결국 이걸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절대적인 관계, 거기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 시련 그리고 분노들, 그런 것들에 매달리지 않고 그리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으로 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를 찾는 것이고요. 주 안에서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라고 하는 이 표현이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거잖아요? 아, 주를 잘 믿으라고 하는 거구나, 그렇게 해야지, 해야지,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생각합니다마는 억지로 잘 안되지요. 쉽지 않습니다. 주님만을 찾는다고 하는 것하고 그러니까 그런 거지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문제들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서 되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하고 맺힌 게 있으면 말해서 풀어라, 풀어라 얘기하지 않습니까? 다 털어 놓고 서로 좋은 관계를 맺으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부분적으로 옳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어떤 상담 차원, 심리적인 차원, 또 좋은 인간관계를 도모하기 위한 어떤 교양으로서는 그런 일들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되고, 그러니까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과 맺혀진 것들을 풀어서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전한 해결은 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두 사람, 어쨋든 상관되는 관계 속에서 서로 벌어지는 문제들이 미안하다 는 말로 서로 풀 수는 있긴 있지만 이미 한 번 받은 어떤 상처, 이런 것들은 쉽게 씻겨 지지가 않습니다. 씻겨진 것처럼 생각할 수는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의식을 함으로써 괜찮다, 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카타르시스는 될 수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완전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더 길게 얘기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상황에 따라서 좀 다르기도 하고요, 상처를 받았다가도 또 서로 가까워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제 말씀이 무조건 옳다고도 말할 수도 없겠어요. 그러나 오늘 이 성서말씀과 저의 인생경험, 그런 것들을 연관시켜서 보면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인간들끼리 풀어서 되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라가야 된다고 하는 거지요. 주를 찾는 거지요. 주님, 이게 너무 교과서적인 대답인 것 같습니다만, 교과서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실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지한 문제입니다. 성서가 이야기 하는 것이 그저, 무어라고 할까요? 나이브한, 이 삶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보고, 혹은 이상적으로만 보고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주를 찾는 자, 주를 찾아라, 하는 이야기는 거기 인간의 문제가 뭐냐, 인간사이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뭐냐, 그것을 근원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에 대한 명확한 통찰에서 나온 겁니다. 그것이 여러 번 반복 되서 깊이 아는 데서 나오는 거예요. 지금 생물학이 쭉 발전해서 점점 더 앞으로 나오듯이 성서에 있는 말씀도 그런 과정을 거친 겁니다. 아주 고도의 영적인 어떤 세계를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고도의 영적인 세계라고 하는 것을 우리 현실 삶과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현실 삶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걸 이해하셔야 됩니다.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문제예요. 생명의 문제예요. 제가 다른 데서도 설명했을 거라고 봅니다만, 영, 영혼 이런 개념들은 생명, 혹은 삶, 삶과 생명은 똑같으니까요. 그 삶의 가장 심층의 차원에서 작동되는 어떤 힘, 그런 것들을 가리키거든요. 그런데 그게 너무 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수치로 계량화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영이라고 하는 거지요. 고도의 영성을 듣는다고 하는 것, 혹은 그런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 일상도 삶이니까요. 이것의 원초적 중심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들이지요. 주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보면 나를 조소하는 자, 그가 좀 자기 잘 못을 알았다고 하는 생각들, 이런 모든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차원이 전혀 달라지는 거지요. 차원자체가 달라지는 거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삶의 어떤 그 충실감? 그런 것들을 확보할 때만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게 안 되면 계속 거기에 붙들려 있고 남습니다. 너무 거기에만 집작하게 되면 노이로제 걸리거나 신경성, 질병으로까지 가게 되고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불안하고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 거지요.

 

이게 같이 연관되는 문제로 생각합니다만 그런 면에서 교회공동체, 혹은 목사가 하는 이 목회 이런 것들을 너무 인간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글에서 이야기 했습니다만, 그 상담목회 이런 것들은 말이 되지 않는다, 상담하는 것은 상담전문가에 맡겨서 당장 문제들을 처리하게 해야 되는 거지 목회가 어떻게 상담차원으로 가느냐, 하는 겁니다. 목회, 교회활동 이런 것은 하나님에게만 집중해야 되는 거거든요? 각자가 하나님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생명의 가장 깊은 세계로 들어가고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그렇게 되면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 크거나 작거나 지나 갈 수 있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아무리 고상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한 완전히 해결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지날 갈 수 있는 거지요.

 

지나 갈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우리가 주를 찾는다고 하는 사실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 갈 수 있다면 그러면 그걸 감싸는 거지요. 상처가 있는데, 상처는 누구나 받을 수 있거든요. 상처가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살아가면서는, 교회 안에서도 상처가 있을 수 있어요. 목사와 신자 사이에도 상처가 있어요. 이건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람은 근본적으로 한계예요. 자기는 별로 다른 뜻이 없다고 얘기 한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입니다. 여러분들이 상처 받지 않는다는 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교회 안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하고 있어도 자기를 아무리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그 상처들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는 거예요. 작다면 큰 문제 되지 않겠지만, 어쨋든 그래도 문제는 문제지요. 인간 사이에서는 그런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람에 대한 기대를 너무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에 대해서 무관심해라, 뭐라고 할까요? 인간미 없게 살라고 하는 게 아니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아야 되겠지요. 기대하지 않고 베풀 수 있으면 좋습니다. 사람은 베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베푸는 시늉은 하긴 하지만 왠만해서는 쉽지 않습니다. 제 말이 좀 옆으로 나갔지요? 사람들 모이는 데는 어디나 그런 충돌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 충돌자체가 별로 크게 우리의 삶을 훼손하지 않는 단계로 가게 하려면 주를 찾는 자가 되어야 되는 거지요.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도 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하는 말을 잘 기억하십시오. 예, 17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이게 결론으로 한 기도입니다.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주께서 나를 생각하신다고 하는 이러한 믿음으로 들어가 있군요. 이 시편기자가요. 주께서 나를 생각하신다, 어느 정도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주께서 나를 생각하신다. 여러분 이것을 구분해야 됩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는 할 수 있어요. 말은 얼마나 잘해요? 한국 사람들이 입에 너무 신앙적인 말이 붙어 다닙니다. 입만 살아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목사는 더구나 더 그렇겠지요. 이런 말을 너무 쉽게 내 뱉는 거예요. 그런 것 하고, 정말 이 사실 속으로 들어가서 나오는 고백하고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사실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지요. 주께서 나를 생각하신다는 그런 고백을 할 정도의 어떤 영적인 경험들이 필요한 겁니다. 그냥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가능하겠어요? 과연 어떤 걸까요? 하나님이, 주님이 나를 생각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신다면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신다고 표현될 정도니까 그 상태가 어떻겠어요?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생각하는 것만 하더라도 이건 기가 막힌데, 자기의 모든 것을 쏟잖아요? 어머니는 아기에게 모든 것을 쏟아도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가 있어요. 아무리 그렇게 자녀를 희생하고 싶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건데요? 유모차를 끌고 가다가 애기를 보호하고 싶은데 자동차가 들이받았다, 이거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인간에겐 그런 한계가 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신다면 그건 완전히 상황이잖아요? 그럼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하등의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는 가난하고 궁핍하지만 이건 불편한 일인데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날 생각한다고 하는 이 고백에 가능한 그 상태가 무얼까요? 좀 바꿔보면 내가 이렇게 몸이 약하지만, 내가 어떤 불치병에 걸렸지만 주님께서 나를 생각하신다고 하는 신앙에 들어간다면 그 단계는 무얼까요?

 

그러니까, 그 가난, 질병, 외로움 이런 것마저도 그런 것들을 부정할 수 없고요, 어쩌면 그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가능할까요? 가능할 수 도 있고 조금 다르게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거기까지 너무 세밀하게 구분하지는 말도록 합시다, 앞의 이야기로만 얘기해도 될 거예요. 가난, 궁핍, 질병, 우리가 살아가면서 피하고 싶은 그런 많은 일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신다고 하는 사실, 그것을 훼손하지는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어떠한 상태에 가야만 그게 가능할까요? 기도하면 들어주고 십일조헌금하면 창고에 가득 차게 해주고, 예를 들자면 그런 신앙으로는 이건 도저히 죽었다 깨어도 되지 않는 이야기거든요? 무얼까요? 답은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도움, 가난하고 궁핍하고 외롭지만 그러나 주님이 나를 돕는다. 생명을 경험 할 수 있게 하신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될까요?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지금 당장 숨 쉬고 먹고 마시고 하는 그런 차원에 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어진 그 생명까지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생명까지 포함한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약속이죠, 생명의 약속이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지금 겉모양의 생명은 후폐해져 가지만 그러나 우리 속에서는 날마다 새롭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도 연관될 수 있고요. 종말론적인 그런 생명을 향한 우리 희망을 끊지 못 한다, 아, 이렇게 얘기하면 되겠군요. 말씀을 드리다 보니까 좀 답이 더 명료해지는 것 같습니다. 종말론적 생명,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선취된 그 영원한 생명을 향한 희망을 끊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님이 나를 생각하신다고 하는 그리고 그 분이 나의 도움이시라고 하는 이런 신앙고백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결론 부분만 좀 이야기하다가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앞에 있는 내용들을 다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결론 부분 제가 3구절을 주석을 한 건데요? 그것만으로도 앞부분까지의 설명을 다 커버할 수 있습니다.

 

예, 16절, 17절을 다시 읽고 오늘 공부 마치겠습니다. 16.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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