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본문은 히브리서 7장입니다. 1절부터 28절까지 있어요. 비교적 긴 장입니다. 여기 멜기세덱이 핵심 주제입니다. 우리가 보통 때는 잘 듣지 못한 이름이죠. 멜기세덱이요. 그리고 성경에도 멜기세덱에 대해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알고 있는 것만 두 군데 정도에 불과해요. 근데 히브리서 기자가 특이한 관점으로, 이게 신약성경에 보면 다른 것도 많잖아요. 바울이 멜기세덱에 대해서 거론한 부분이 있나요? 바울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교리적으로 토대를 한 사람이거든요. 신학화 했죠.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거기도 나름대로 신학이 있습니다마는, 그냥 서술한 반면에 바울은 그걸 교리적으로 한 거예요. 신학 이론화를 한 거예요. 바울이 없었다면, 아까 우리 찬송 부를 때 말씀드린 그리스도론, 기독론이 짜여 지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은 구원 사건이잖아요.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에요. 사건 자체에요. 그건 원형이에요, 원질. 그거를 사람들이 이해하려면 그냥은 안 됩니다. 이론적으로 해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한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근데 바울도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는데 이 히브리서 기자가 고유한 어떤 시각에서 이 멜기세덱을 크리스톨로지에서의 중요한, 인물로 제시하고 있네요. 왜 그런지는 우리가 조금 지나봐서 알 겁니다. 앞에도 한, 두 번 나왔습니다마는 결국은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이다 그걸 말하려는 거죠. 그래서 이 멜기세덱을 끌어들이는데 왜 굳이 멜기세덱이냐 다르게도 할 수 있는데 그 이유가 오늘 7장에 나옵니다. , 71절부터 28절까지 있네요. 저와 여러분들이 교독해서 이 내용을 잘 눈여겨보면서 읽겠습니다.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느니라

 

어떻습니까. 우리가 한 번 읽었는데요. 전체적인 내용이 들어오나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만약에 한 번 읽고 이거를 탁 파악했으면 정말 위대한 학자입니다. 신약학 박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여기에 많은 단어들이 나와요. 우리가 익숙하지 않는 단어들과 구약에 있는 여러 가지가 나오고요. 우리가 잘 쓰지 않는 관용어가 나오기도 하고요. 굉장히 복잡하게 여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 계급은 12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에서 나옵니다. 레위 지파가 다 제사장이 되는 건 아니고요 거기서 그 사람들이 성전 일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 그들이 가나안땅을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정복할 때 12지파가 땅을 배분 받아요. 그러니까 유다는 어디, 누구는 어디 등등해서 12지파가 가나안 지역을 배분 받습니다. 그리고 그쪽을 지배를 하기위해 자기들이 공격을 해서 땅을 차지해야 됩니다. 그 때에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배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전통이 세워졌어요. 그래서 나머지 지파들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십분의 일씩 레위지파에게 주고 그들이 그걸 기본으로 해서 먹고 살면서 성전업무 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제사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아까 맹세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요. 레위지파이기 때문에 혈통을 통해서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제사장이 되겠다고 맹세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레위지파에 속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되는데 예수님의 경우는 하나님이 맹세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다. 더 확실하다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이 왜 등장하냐면 레위지파는, 이 논리를 조금 생각을 하셔야 돼요. 어떻게 보면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는 게 비약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 사람의 설명이 좀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확실성을 말 하려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근데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내려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럼 여기에 전통이 있어야 되는데 이 레위지파의 우두머리는 어디에요. 레위지파는 야곱에게서 나온 거잖아요. 야곱에게 올라가고 야곱 위로 올라가게 되면, 이삭은 좀 생략됩니다.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렇게 네 족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게 파()에요. 조금 더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사실은 할아버지, 아들, 손자, 증손자 내려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12지파 이야기들이 따로따로 이스라엘 역사에 쭉 내려왔어요. 그게 일정한 시점에 편집한 어떤 성서 기자가 할아버지, 아들, 손자, 이렇게 정리를 다시 한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경에서 알고 있는 건 할아버지, 아들, 이렇게 알고 있어요. 그걸 갖다가 제가 신학적인 그런 걸 말씀드렸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하여튼 성서가 얘기하는 걸 따라가게 되면 이 레위지파도 결국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인데 이삭은 좀 빠져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들어가게 되는데 그래도 참고적으로 말이 나왔으니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게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아니라 각각의 따로따로 있었던 전승이라는 걸 어떻게 아냐. 그건 학자들이 잘 연구하면 드러나게 되는 거고요. 그중에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똑같은 일들이 이삭에게도 일어나요.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 일들이 비슷하게 일어나는 거예요. 이거는 따로따로 있었던 이야기들이 그 사람하고 붙어서 쭉 전해서 내려오다가, 보통 우리도 구전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구비문학이라고 해서 민요 이런 것들은 다 옛날에 입을 전해서 내려온 거예요. 이스라엘에도 성경이 있기 전에는 다 구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계급의 레위가 결국은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에게 가요. 아브라함에게 가는 겁니다.

 

여기 10절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10절 후반절에 보면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섰음이라. 아브라함의 허리라고 하는 것은 생산 능력, 남녀 관계에서 하는 그런, 배 안에 이미 씨앗이 들어있다 그런 뜻으로 사용 한 겁니다.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이미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십분의 일, 전쟁에서 얻은 노략물이죠. 깨끗한 돈은 아닙니다.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하러 갔다가 구출만 해온 게 아니라 완전히 상대방을 초전박살 내버리고 많은 물건을 빼앗아 온 거예요. 그 중에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고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지파의 근원으로 올라가게 되면 아브라함인데 그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쳤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그 사람, 멜기세덱입니다. 구약에 보면 멜기세덱은 제사장으로 나오고 있어요. 이 멜기세덱이 이스라엘 종교의 제사장인지 아닌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 그 부분을 잠깐 볼까요. 창세기 14장 멜기세덱에 대한 창세기 이야기 1417절에서 20절입니다. 14장에 소제목이 이렇게 붙어있죠.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다. 롯이 사로잡혔다고 하는 걸 쫓아가서 구출 했어요. 그 당시에 이미 굉장히 개인적인 사병이라고 하죠. 군사를 거느릴 정도로 부호가 된 거예요. 전쟁을 해서 이겼고요. 그 다음에 17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기 전이 아브람이었어요. 아브람이나 아브라함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소돔왕이면 소돔과 고모라, 별로 좋은 도시는 아닌데. 그렇게 됐고 그 다음 18절은 살렘왕은 샬롬, 이러한 뜻도 같이 있는 겁니다. 평화 이런 거죠.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살렘이에요. 왕 멜기세덱이,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이, 예루살렘은 천연 요새라서요.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이 정복하지 못한 땅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들어갔지만 성공하지 못했고요. 다윗시대에 이르러서 겨우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 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고 하기에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약간 그런 쪽으로 온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제사장 계급이 생긴 것은 훨씬 후이니까요.

 

18절이요.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왔고요.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정리가 됐고 그 다음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축복했다고 그래요. 20절에는 아브람이 얻은 것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근거로 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의 제사장 지파인 레위보다도 이 멜기세덱의 전통이 더 우월하다. 그걸 강조하는 거죠. 그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 나왔잖아요. 멜기세덱의, 여기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으니까, 그러한 서열을 따라서 예수가 정말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걸 이제 얘기하려고 하는 거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죠. 내용을 좀 천천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3, 여기에는 멜기세덱에 대한 성서적 근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로 본 거예요. 창세기 1417절에서 20절 사이에 나옵니다. 여기서 내용을 금방 바로 설명한 거예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3절에 히브리서 7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준 멜기세덱에 대해서 살렘의 왕이고 평강의 왕이라고 하면서 3절에 보면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이 나와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이건 멜기세덱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것도 조금 비약이 약간 있는 듯 보입니다. 여기 멜기세덱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을까요. 성서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아버지 없고 어머니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이유가 있겠죠. 왜 그럴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 되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멜기세덱도 역시 그랬다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거죠.

 

실질적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다 있죠. 예수님에게도 사실 요셉과 마리아가 있는 것처럼. 이런 것은 사람에게 아버지, 어머니 없이 태어날 수 있느냐 그렇게 따지고 들면 곤란하고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의 이야기 중에서 십일조가 연관돼서 나옵니다. 4절에서 10절까지예요. 그래서 간혹 교회에서 하는 십일조 헌금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말할 때 이 부분도 나오긴 합니다. 말라기서가 제일 많이 나오지만 이 부분도 나와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했다는 겁니다. 십분의 일 이거는 고대 유대인들의 12지파 중에서 레위지파가 땅도 받지 못했으니까 먹고 살기위한 전통도 있고요. 여기 멜기세덱 이야기하고 연관해서 십분의 일이 나오는 걸보니 고대인들에게는 통상적인 관례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 공부 요약안 두 번째 해당하는 것 잠시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십일조를 근거해서 설명한다. 레위지파들도 주변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아요? 안 받아요? 받지요. 그러나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걸보면 이미 레위지파의 씨앗이라고 할까 그게 이미 아브라함에게 있는 거니까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하다 그러한 논리입니다.

 

강의안을 좀 보십시오. 레위지파는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열두 아들에 기원한다. 레위지파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땅 분배에서 제외 되었고 아까 설명한 겁니다. 다른 지파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아서 살게 됐다.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멜기세덱이 이스라엘 제사장 지파인 레위지파보다 우월하다 그렇게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을 하는 겁니다. 아주 히브리서 기자의 독특한 시각이에요. 신학적인 시각이에요. 아까 말씀드린 바울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거 잘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주로 로마서에서 인용하는 구약 인물은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거론하는데 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십일조를 준 것에 의해서 멜기세덱을 더 우위에 놓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1절에서 14절 소제목으로 제가 옛 제사장직의 붕괴라고 적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 두 개를 대비시키고 있어요.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레위지파의 제사장 계급하고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가 시편 1104절에 근거해서 멜기세덱을 거기에 대립하는 그러한 제사장 계급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입장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제사장 계급은 조금 부족한 거죠. 조금이 아니라 이거는 한계가 있는 거죠. 멜기세덱에 비해서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한계가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평가가 됩니다. 그래서 11절에서 14절 사이에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이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옛 제사장직의 한계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강의안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 지파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서, 어떤 멜기세덱의 질서에 따라서 대제사장이 됐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제 이 제사장의 직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완전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장의 그것을 뒤집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율법도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모세가 제사장과 연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은 유다지파, 그러니까 모세가 얘기했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에 의하면 레위지파가 제사장이 돼야하는 거고 유다지파는 제사장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모세는 제사장 문제와 연관해서 유다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야곱의 몇 째 아들이죠? 세 번째, 네 번째? 그 정도 되죠. 그런데 유다지파는 다윗 가문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될 수 없었어요. 모세가 한 번도 제사장과 연관해서 유다지파를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제 멜기세덱의 더 우월한 제사장 직분에 근거해서 볼 때 이러한 율법도 새롭게 해석해야 된다. 레위지파에서 나온 제사장이라고 하는 그 율법의 어떤 관점, 흐름, 이런 것들이 새롭게 해석돼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해석을 누가합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아니고 어느 지파가 해야 돼요? 유다지파가 되는 거죠. 이게 굉장히 아슬아슬한 거예요. 구약에 의하면 당연히 레위지파여야 되는데 그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에서 제사장, 참된 제사장이 나와야되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 얘기죠. 예수님이 유다지파라고 하는 거 맞나요? 맞지요? 성경에 여러 번 나와 있죠. 복음서에도 나와 있고 다윗 후손이라고 하니까 그게 다 같은 지파니까 분명한 것 같습니다. 12지파 중에서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은 레위지파여야 되는데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새로운 해석에 의하면 유다지파여야 된다. 그 근거의 출발을 어디서 잡아요? 멜기세덱이 참된 제사장이고 레위지파의 제사장들보다 먼저 있었고 레위지파 제사장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오히려 축복을 받고 축복을 할 때는 윗사람이 밑에 사람에게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멜기세덱이 영적으로 훨씬 우월한 사람이었고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 이러한 논리입니다.

 

대충 동의가 되나요? 아니면 조금 비약이 있어 보이나요. 내가 보기엔 그런 시각이 가능하다 생각이 됩니다.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씀을 한마디만 드리겠습니다. 성서는 해석의 문제인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하는 거잖아요. 구약에 있는 레위지파, 모세 율법,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런 사건들을 해석하는 거죠. 이 사람의 독특한 해석이에요.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고 게 아니고 근거가 있어야 되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필요하죠. 그 다음, 15절에서 19절입니다. 율법의 한계에요. 요약문 잠깐 보겠습니다. 본문은 예수가 멜기세덱의 전통에서 오신 분이므로 율법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율법의 전통을 따르면 레위지파여야 되는 거예요. 멜기세덱의 전통에 있기 때문에 율법이 한계가 있는 거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한계다. 15절 성경보세요.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 보니 더욱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죠. 16절에 그는 육신에 속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않고 이거는 레위지파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거예요. 율법을 따르지 않고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랐다. 이거는 부활을 가리킵니다. 불멸의 생명의 능력. 거기에 따라서 그분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다. 여기서 계속해서 율법의 한계, 그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이제 시편을 인용해서 하는 이야기에요. 이 히브리서 기자가 멜기세덱을 인용하는 건 딱 두 개, 아까 말한 창세기 14장에 있는 거하고 여기 시편 이 두 개 약간 좀 성서 근거로 보면 빈약하죠. 그래도 그것에 근거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제사장이라고 하는 확신 가운데서 그렇다면 레위지파에서 오는 제사장 직분이 왜 문제가 있느냐. 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논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인용한 시편 1104절을 잠깐 확인을 해 드릴게요.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간단한 구절이에요.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아사상이 여기 있다 보고요. 그래서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서열에 따라 영원히 제사장이 된 분, 이미 시편기자가 말하고 있지 않냐.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결국 18절에 보면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였다. 계명은 물론 율법이고요. 또 여기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7장의 틀 안에서 본다면 레위지파에게 제사장 직이 대물림된다고 하는 한계를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은 폐하게 됐다. 다음, 20절에서 22. 여기는 맹세라고 하는 얘기가 나오는데 제가 공부 시작할 때 잠깐 말씀 드렸습니다. 레위지파는 맹세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대를 이어서 하는 거니까. 자기 족보만 있으면 되니까요. 예수님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다 얘기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대제사장이 되겠다고 맹세하셨다는 건 아니에요. 이것도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맹세하신 거죠. 내가 예수 외아들을 십자가에 등등,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 그러므로 영원한 번제물로 드려지게 됐고 속죄의 길이 됐고 그래서 참된 제사장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맹세를 하셨다고 하네요. 하나님이 딱 맹세했다는 말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아까 인용한 시편 1104절을 인용하는 거예요. 그 부분을 갖다가 하나님의 맹세다 표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22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정말 참된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2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여기 소제목은 하늘 대제사장 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입니다. 히브리서에서 7장이 어떻게 보면 제일 중요합니다. 핵심이에요.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의 영원성과 완전성을 레위지파보다 더 우월한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고 십분의 일을 바치었던 그 시편 1104절에서 언급된 그 멜기세덱의 반차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의 맹세에 의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옳다 지금 말하고 있는 거죠. 강의 요약문 좀 보겠습니다. 본문은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과 그리스도 예수의 제사장 직분의 질적인 차이를 여기서 밝힌다. 레위지파 제사장들은 죽어야 되기 때문에 숫자가 많다. 계속 대를 이어서 끊임없이 제사장을 하게 되는데 예수는 죽지 않으시기에, 부활이에요. 제사장 직분은 누구에게 대를 잇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제사장. 한 번으로 완성된 그러한 제사장이다. 지금 대제사장, 제사장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는 거죠? 예수님이 제사장 가운 입고 성전에서 제사장 직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런 일을 하셨다는 뜻에서 제사장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것의 핵심은 부활인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몸을 던지셨고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계속 역할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은 분. 결정적인 예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이 부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죄인들이기에 스스로의 죄,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날마다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돼요. 두 양쪽을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반복해야 돼요. 왜냐하면 제사장 스스로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는 반복하지 않고 단번에 자기를 드렸다. 유일회성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과 생명 부활사건의 유일회성 인거죠. 그런 점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바울이나 다른 편지들과 조금 특이하게 접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의 신앙의 중심에 서있는 건 분명합니다. 단번에 드리심, 단번에 구원을 이루심, 이런 것이 바탕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런 것들이 뭐 중요하나 여러분들이 혹시 생각할 수 있어요. 단번이면 어떻고 반복이면 어떠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만약에 반복해야 된다면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가 또 나와야 되는 거예요. 약간 자유주의적인 분들은, 그리고 훨씬 해방 신학적인 입장에 있는 분들은 모택동이 오늘의 그리스도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 해방을 했으니까. 그리고 또 민중 그리스도론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단 한 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고 하는,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내려오는, 그리고 신학성서 곳곳에 배어있는 이러한 구원의 유일회성에 근거하면, 십자가의 드리심과 부활이라고 하는 유일회성에 근거하면, 반복되는 건 아니에요. 이미 그건 끝난 문제에요. 여기서부터는 더 이야기할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건 오늘 접어두고요. 레위 제사장들은 제사를 자꾸 반복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한 번에 끝난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제사하고는 조금 다른 거예요. 다시 반복하는 건 아닌 거예요. 이미 그건 끝났습니다. 죄 용서 받는 이 사건은 더 이상 똑같이 우리가 반복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끝나게 된 거고 그래도 여전히 죄에 휩싸여 있다는 딜레마 속에 있긴 있으나 그건 우리가 극복해야 될 문제이고 일단 그거는 유일회적으로 다 이룬 것으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조금 더 요약문 보십시오. 마지막 부분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인간을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율법 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 부활의 예수를 제사장으로 세웠다. 그렇게 정리가 됐습니다. 28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어떻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쭉 끌고 가는 어떤 방향은 이해하시겠죠. 구도도 정확하게 나와 있는 거죠. 그 안으로 우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 가냐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일단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신앙과 신학의 기본 구도, 이건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참된 제사장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단 번에 이루셨다. 그래서 반복될 필요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회성입니다. 근데 왜 이걸 자꾸 구약에 있는 멜기세덱과 연결해서 반복해서 말 하냐. 왜 그러겠어요. 그런 걸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한 반론입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 율법, 토라, 이런 것들을 여전히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 당시에 당연히 있는 거죠. 거기서부터 유대교의 전통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투쟁을 한 거예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기 남아 있는 거고. 적당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요. 바울 같은 사람들은 완전히 빠져나왔고 신약성서에 기록된 이런 사람들은 다 그 공동체 전통으로부터, 그걸 부정하고 까부시는 건 아니되 왜 다르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기본적으로 구약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분인데 유대 전통이 잘못 해석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율법을 넘어서는, 율법을 부정하지는 않되, 율법을 근원적으로 넘어서는 복음의 사건이다 그거죠. 저도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히브리서를 제가 여러 번 읽긴 읽었습니다마는 대게 그냥 지나가게 되네요. 근데 공부하려고 차분하게 읽고 하다보니까 좋은 영적인 시각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때인가 가서는 기독교 영성의 큰 틀 안에 들어가 있구나, 느끼게 될 겁니다. 단숨에 되는 건 아닙니다. 꾸준하게 이러한 공부에 참여하는 게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히브리서 7장을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런저런 일들로 쫓기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함께 읽고 공부하게 하신 것 하나님의 은총인 줄 알고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사순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그의 참된 대제사장 되심, 그것을 초기 기독교가 처한 독특한 상황에서 잘 풀어서 설명한 이 히브리서 기자의 오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또 귀한 공부시간에 참여한 우리 믿음의 식구들 각각의 삶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형편들이 다 다릅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 모든 삶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함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에 토양들이 되도록, 그리고 토대가 되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들을 늘 주님께서 감춰 주시기를 원하고 늘 새로워지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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