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11 히브리서 9장.hwp

 

오늘 히브리서 공부 계속하겠습니다. 오늘이 9장입니다. 세월이 빠르죠. 벌써 9장이네요. 13장까지 있기 때문에 오늘 하고 네 번만 더 하면 끝나게 되겠습니다. 일전에 한 번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히브리서를 개인적으로는 몇 번 스쳐지나가면서 읽었지만 꼼꼼하게 잘 따져가면서 공부하기위해서 읽은 거는 처음이에요. 모르겠어요. 따른 때 한 번 한지는 모르지만 제 기억으로는 처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히브리서가 구약의 복잡한 제사 이런 문제하고 얽혀있어서 이거 좀 따분 하겠다 그런 선입견이 있었는데 읽다 보니까, 그리고 세부 사정, 이런 것들을 따라가다 보니까 다른 복음서라든지 바울의 편지 못지않게 굉장히 깊이가 있고 은혜롭다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공부를 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9장입니다. 히브리서가 전체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히브리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히브리 사람, 만을 위해 쓴 건 아니지만 그걸 배경으로 해서 기록한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구약에 특별히 율법하고 구약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이야기하는 낱말들 있잖아요. 율법이 있고요. 과거의 약속, 지난 언약,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무의미한 건 아니지만 그건 하나의 모형인 거예요. 진짜가 오기 전까지 필요했었던 어느 정도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에 매달려 있으면 새로운 약속, 새 언약, 참된 제사장, 이런 것들을 따라가기 힘든 거죠. 그래서 그걸 대비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사장 문제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에게는 제사 지파가 어디라고 그랬죠. 레위에요. 레위 가문이어야만 돼요. 혈통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자부심도 있을 거고요. 굉장히 여러 가지 복잡한 제사장 제도가 오랫동안 이스라엘 역사에 발전하고 자리 잡고 있었어요.

 

이스라엘 신앙의 큰 줄기를 이야기한다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얘기하는 성전 중심의 제사장 제도요. 성전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이거는 한 군데입니다. 또 하나가 있다면 회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당은 제사 드리는 곳은 아니에요. 말씀 읽고 공부하는 곳입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거예요. 제사를 드리는 거하고 구약성경을 공부해서 율법대로 잘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똑같은 건 아닙니다. 다른 건데 이 두 가지가 이스라엘 신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히브리서 앞에서 공부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 두 가지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거예요. 대제사장도 레위지파 혈통이 아니라 그 레위지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오히려 축복을 받으면서 자기의 십일조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참된, 더 근원되는 제사장의 반차를 따라서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됐다고 얘기하고 있죠. 그 사람이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레위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 아브라함보다 더 신앙적으로 우월한, 영적으로 우월한 그런 쪽으로 얘기를 한 거예요.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구약성서가 얘기하는 그게 극복되었다 얘기하는 거고요, 이 회당 중심의 율법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새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새 언약, 이 율법은 옛날 언약이니까요. 이 율법을 왜 언약이라고 하는지는 아시겠지요. 약속 언약이라는 거요. 율법을 그렇게 말하는 거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율법 정신이 언약인 거예요. 율법이 누구한테서 시작을 했죠. 모세잖아요. 모세에게 주면서 너희들 이렇게 저렇게 살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언약이거든요. 히브리서 설명에 따르면 그건 옛날 언약인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에 옛날 언약과 제사장과 성전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되 그 한계를 보고 참된 대제사장, 새 언약, 이게 정말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길이다 그걸 알라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그 이야기를 복음의 지평에서 설명합니다. 표현이 좀 딱딱하죠. 특별하게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요. 내가 왜 이런 말을 붙였냐면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누구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신앙생활 하는 거거든요. 율법과 대립적인 차원에 있는 겁니다. 여기서 누구를 믿느냐는 것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속죄 받았다고 하는 사실. 이건 우리가 율법적으로 착하게 살고 이런 방식이 아니라, 이해하시겠죠.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을 착하게 만들어 가는 거예요. 모범생을 만들어 가는 거죠. 바리새인들이 한 일들이 다 그런 겁니다. 굉장히 좋은 거예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공부하면서 나오겠습니다만 반복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하는 그런 일들인 거예요. 그에 반해 예수님이 하신일은 우리가 착하게 율법을 잘 지켜서, 모범적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길이 아니라 단 번에 자기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써 우리의 근본적인 죄가 용서 받는다는 그 사실이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얘기합니다. 복된 소식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된 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된다는 겁니다. 오늘 9장이 길기 때문에 한꺼번에 읽고 공부하기가 매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요약문에서 볼 수 있듯이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어요. 한 단락 공부할 때마다 본문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에서 5절까지 읽겠습니다. 여기는 세상의 성소라고 하는 소제목을 붙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는 것을 그냥 풀이한 거예요. 1절에서 5절까지 함께 통독으로 읽겠습니다.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아멘. 이거는 예루살렘 성전을 간략하게 설명한 겁니다. 굉장히 예루살렘 성전이 복잡해요. 일단 마당이 있어요. 마당도 이방인의 뜰이 있고 여자들이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고 유대인들의 뜰이 있고 제사장의 뜰이 있고 이렇게 아무나 들어가지 못합니다. 칸이 나누어져 있어요. 아마 맨 바깥에 있는 게 이방인의 뜰인지 싶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단계마다 있고요. 안에 가게 되면 성소가 있어요. 그건 건물이죠. 마당이 아니라 건물인데 그 성소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지성소는 아니에요. 제가 거기를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설명하기 힘들고요. 그리고 성소도 조금씩 달라졌어요. 그래서 이걸 복원도 한다고 하지만 시대마다 형태도 달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성소 건물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면 일반적인 성소고요. 휘장이 있는데 그곳을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습니다. 지성소가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지성소라고 하는 말뜻은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뜻입니다. 거기는 제사장들이 들어가지 못하고요.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속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지성소가 그렇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 히브리서 기자가 성전 안에 있는 구조들과 기물들을 간단하게 소개했어요.

 

여기서 지성소와 언약궤가 중요합니다. 그냥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늘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데 지성소는 그렇지 못해요. 이 지성소 안에 몇몇 기물들이 있어요. 여기 2절에 보면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낱말 어려운 거 없죠. 등잔대, 촛불 켜는 것. (), 올려놓는 것, 그리고 진설병이 있습니다. 진설병은 이게 한자고 요즘 잘 쓰지 않는데 병은 떡이고요. 빵이겠죠. 진설, 빵가게 가면 빵 진열해 놓지 않습니까. 진열 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올려놓은 빵이 있는 거예요. 지성소 안에는 빵이 늘 있는 거예요. 다윗이 언젠가 도망가다가 그 안에 들어가서 그걸 먹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좀 특이하죠. 등잔대와 상이 있는 건 이해가 되는데 진설병은 왜 거기다 놨을까요? 정말 거룩한 곳인데 빵을 거기다 놨을까요? 자세히 모르겠는데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죠. 이게 먹고 사는 생명의 양식이기도 하고요. 실제로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우리나라도 옛날에 제사 지낼 때 밥해서 제사상에 올리잖아요. 지금도 절 같은데 가면 늘 부처상 앞에 차려 놓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차려놓은 것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게 성소에 있고요. 휘장이 두 개라고 그러네요. 첫 번째 들어가면 성소에서 그런 것들을 볼 수 있고. 둘째 휘장이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고 하는데 거기에 있는 중요한 게 언약궤라고 하네요. 금으로 싼 언약궤라고 합니다. 보통 다른 말로는 법궤라고도 많이 하죠. 이게 귀해서 금으로 쌌다고 하는데 이 안에 들어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건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거기 다 나와 있어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만나, 이 만나는 출애굽기에 보면 만나를 걷어 들여도 그게 밤이 되면 녹아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대로 있는지 모르겠어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라고 했으니까 만나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항아리만 놓은 건지 사실적인 관계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만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어요. 두 번째는 아론의 지팡이입니다. 이것도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에피소드하고 연관이 돼요. 아론이 모세의 형으로서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왜 너만 그걸 하냐고 여러 지파 사람들이 일종의 항거를 했습니다. 그 때 각각 지파마다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해서 땅에 꽂아 놨는데 다음날 보니까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어요. 이게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게 아니냐는 그러한 에피소드가 담겨있는 겁니다. 사실은 아론의 지팡이보다 모세 지팡이가 더 중요하기는 한데 아론 것이 들어있다고 하네요. 세 번째는 언약의 돌판이라고 하네요. 이게 뭘까요. 십계명이 적혀있는 돌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도 있을까요? 물론 없지요. 예루살렘 성전이 여러 번 무너졌습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초토화 됐는데 그 때 성전 안에 있던 귀한 것은 다 약탈당해 갔어요.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조금 가져 왔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얼마나 가져오겠습니까.

 

역사적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진나라에서 폐물 같은 거 다 가져오잖아요. 나폴레옹도 아프리카, 이집트인가를 공격해서 많이 약탈하고 유럽의 박물관 보면 헬라라든지 이집트의 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일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좀 있어요. 뺏어 온 거죠. 우리나라 보물도 일본이 많이 가져갔는데 이걸 반환하는 운동도 벌이고 있기는 한데요. 가져 간 것도 때에 따라서는 불법적인 것도 있지만 합법적으로 가져 간 것도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사 간 거예요. 그 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귀한 건지 모르고 있다가 돈 많이 준다고 하니까 팔아서 그렇게 됐는데요. 유럽이라든지 일본과 같은 나라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돌려 달라 얘기를 하니까 만약에 그 때 안 가져갔으면 이것도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해라 그런 입장인데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긴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 있던 것들은 물론 없어요. 몇 군데에 문헌에 따라서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설명이었습니다. 다음, 6절에서 10절까지 이것도 함께 읽겠습니다.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아멘. 여기에는 옛 계약과 제사 제도 이런 것의 간단한 설명이 나왔어요. 이거는 제가 앞에서 말씀 드린 것에 포함돼있는 겁니다. 6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첫 장막에 들어가서 의식을 행해요. 이건 일상적으로 하는 겁니다. 촛불도 켜고 이런 저런 거, 진설병 나르는 일 등을 해야 되겠죠. 둘째 장막은 지성소이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고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 들어가서 백성 전체의 사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9절에 보면 하나의 비유라고 하는 거예요. 참된 건 아닌 거죠. 9절 조금 더 보면 이렇습니다. 이에 따라 드리는, 그러니까 옛 계약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 구약에 근거한 예루살렘 성전, 성막에서 드리는 것들은,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의 형식에 떨어질 뿐이지 양심에서 정말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양심이라고 하는 말이 탁 와 닿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양심하면 도덕적으로 옳다 그리다. 양심적으로 판단해야지. 그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양심이라는 것은 그것이라기 보다 더 근원적인 우리의 인식의 능력이라고 봐야 됩니다.

 

제가 그거를 잠깐 설명을 했는데 그 다음 단락이군요. 여러분 강의안 3번에 셋째 줄에도 양심이 나와요. 옛 계약과 제사 제도에 따라서 드리는 그러한 제사로써는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는데 세 번째 단락에서는 새 계약의 피, 이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키죠, 이걸 통해서는 우리의 양심이 깨끗하게 됐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걸 헬라어를 통해서 더 세세하게 알면 좋겠습니다만 거기가지 갈 필요는 없고요. 그냥 그 뜻을 세 번째 단락 세 번째 줄에 설명해놨습니다. 양심은 단순히 도덕적인 판단 능력이 아니라 인식의 가장 깊은 차원의 어떤 능력이다. 번역으로는 탁 와 닿지 않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제사를 잘 드림으로써 옛 계약에 따라서, 의식에 따라서, 오늘 히브리서의 설명에 따르면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하는 의례에 따른 그런 것으로는 온전해질 수 없는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거죠. 하나님만이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건데 아주 화려하게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럴듯하게 보이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온전하게 해주실 수 있는 우리의 심층에 있는 인식의 능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표현하기가 쉽지 않네요. 10절 보십시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이런 것들이 다 율법에 있는 거예요.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이 손을 어떻게 씻고, 옷을 어떻게 입고, 이런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이 나와 있거든요. 이런 것들은 다 육체의 예법일 뿐이다. 양심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게 아니라, 심층에서 작동될 수 있는 우리의 인식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거다.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거라고 했어요. 개혁이라는 건 전체적으로 흐름에서 어울리는 단어는 아닌데 정말 바르게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올 때까지 일시적으로 제사제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락입니다. 11절에서 14절까지 읽겠습니다.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아멘. 지금 굉장히 히브리서 기자가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옛 계약은 아무리 화려하게 보여도 한계가 있는 거고 하나의 형식이고 일시적인 거예요. 그리고 황소, 염소, 양의 피를 잡아서 하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게 못 된다. 일단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이제 세 번째 단락에서 새 계약의 피가 정말 온전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4절이에요. 12절에 재밌는 표현이 나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피로, 피는 구약에서부터 신약 이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데까지 생명의 근원으로 있고요. 사실은 그건 늘 생명이죠.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건 옛 계약이고요.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동물의 피가 아니라 자기의 피, 자기의 죽음이죠. 그걸 통해서 속죄를 이루사, 속죄는 죄를 용서받는 겁니다.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을 이루시고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에서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고 유대인들이 레위지파 제사장들을 통해 쭉 실현돼 왔던 이 제사에서, 동물들의 피를 뿌리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기들의 죄가 일시적으로나마 용서받았다고 하는 그런 생각, 믿음이 있었는데, 그런 거는 옳은 거예요. 그걸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최선으로 그 방식에서 속죄를 경험한 거예요. 동물의 피로도 그렇게 그들이 생각을 했는데, 이제 예수님의 피라고 한다면 우리의 양심을 정말 깨끗하게 할 거 아니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잠깐 보시죠.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 그리스의 피, 그의 속죄 능력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 확실하다, 그걸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 네 번째 단락 15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이 말씀도 함께 읽어 볼까요.

 

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20,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아멘. 네 번째 단락의 소제목을 피를 통한 계약의 체결이라고 잡았습니다. 15절에서 22절이에요. 그 내용에 대한 요약을 강의안에 간단하게 적었습니다. 그걸 좀 보시죠. 세 번째 단락에서 한 거하고 이어지는 거예요. 동물의 피를 잡아서 드린 그들도 일시적이나마 죄가 용서 되었는데 흠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오죽하겠느냐 우리가 양심의 차원에서, 가장 깊은 차원에서 온전하게 된다, 그렇게 세 번째 단락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이제 예수는 과거의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에 의한 중보자라 할 수 있다. 옛 언약에는 동물의 피를 뿌려라, 이게 다 언약이에요. 아시겠죠. 율법이 언약입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에 다 있는 내용들이에요. 이렇게 저렇게 제사를 지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예수는 과거의 언약 그런 차원이 아니라 새 언약에 의한 중보자다. 이게 왜 새롭냐. 겉모양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고 완전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새 언약의 중보자입니다. 예수님이 그렇다고 설명을 하고 있어요. 중보자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해시키는 역할입니다. 이 단락에서 피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설명되고 있어요. 이게 논리가 이런 거예요. 앞부분에서는 유언이 나오잖아요. 이건 약속의 차원에서 말을 하는 건데 유언장을 쓰게 된다면 유언장의 효력은 죽어야 되잖아요. 죽는다는 게 피를 가리키거든요.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 기자의 머릿속에 굉장히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하고는 다른 거죠. 이천년 전 이기도하고 그 당시 유대인들의 온갖 제사제도를 바탕에 놓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왜 그 모든 것의 완성자인지 그걸 지금 논증해 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일상생활하고는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릴 수 있는데 잘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 피가, 이건 죽음을 가리키는 거고, 죽음은 곧 유언장의 효력 가능성을 말하기 때문에 이 피를 반복해서 얘기한 거예요. 율법에 따라서 드리는 제사도 동물의 피를 인한 언약이에요. 피라고 하는 것은 구약에서 생명 자체였습니다. 피를 흘리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피를 먹지 말라 얘기했잖아요. 근동 지방의 다른 종교에서는 피를 많이 먹었어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엄금되어 있었습니다. 이건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근동 다른 지방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 지금도 조금 문자주의 신앙을 가진 교파가 있죠. 여화와 증인, 지금도 독실한 사람은 수혈 안하죠?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따르려면 그렇게 따르는 게 나을지 모르겠어요. 피는 고대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것으로 받아 드려졌습니다. 창세기 410절에 보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요. 내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단락에서는 히브리서 기자가 피의 중요성, 이게 유언장과 효력 시점과 죽음, 피를 연관시키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온전하게 속죄함을 얻었다, 죄를 씻기게 됐다 그 얘기입니다.

 

이런 것들은 교리적인 이야기에요. 이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이해하냐,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게 몸으로 느껴지냐가 중요합니다. 일단 세례 받을 때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은 것을 믿습니까. 아멘해서 그런 식으로 세례를 받긴 하는데요. 그때는 잘 모르더라도 기본적인 교리를 자기 입으로 고백하면 세례 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끝나게 되면 어린아이 신앙에 머무르게 되는 거고 점점 성숙해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용서 받는다고 하는 것, 이게 확 와 닿으시나요. 이천년 전, 우리하고 너무나도 거리가 먼 유대인 한 남자였던 예수의, 사실은 예수님의 피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기서는 죽음인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 십자가의 처형. 그걸 피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진짜 피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아닌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인거예요. 거기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천천히 더 여러분들이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건 간단하게 되는 문제는 아니에요. 거기까지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면 좋고요.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세례 받을 때 교리 문답한 거, 그 정도 틀만이라도 잘 유지하고 있고요. 그리고 사실 이런 문제들은 신학적으로 깊이가 있어서요. 웬만큼 신학공부를 해도 잘 따라가기가 힘듭니다. 일반 평신도들은 두말할 것도 없죠. 그래도 괜찮아요. 우리가 다 신학자가 되어야만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신학자가 되어야만 기독교 영성에 깊이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알면 좋지만 몰라도 거기에 연결될 수 있어요.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예배 안에서 실행되는 그런 것들을 접함으로써 다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고 이거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어떤 경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로써만 가능한 그 어떤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났다 그걸 믿으면 되는 거죠.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 그걸 피라고 하는 아주 자극적인 단어로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23절에서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아멘. 오늘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 8장에 비해서 두 배가 되네요. 강의 요약문을 잠깐 보시죠. 소제목에 속죄의 유일회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우리는 속죄가 반복되는 게 아니에요. 그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난 거예요. 예수 사건으로. 그래서 우리가 제사를 드리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유대의 역사에서 동물의 피를 잡아서 드리는 제사, 하나의 모형으로써, 하나의 그림자로써 그런 일을 하는 것뿐이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드림으로써 그 제사를 완성시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는 속죄 제사라기보다도, 제사는 제사인데 의미가 다른 거예요. 속제 제사가 아니라 속죄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이에요. 기억으로서 종교 의식을 하는 것뿐이지 유대 제사처럼 또 속죄 받고 피를 뿌리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속죄 제사는 단번에 끝난 거예요. 그거를 지금 23절에서 28절 사이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강의 요약문을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세상의 성소에서 행해지는 동물피의 희생제사는, 세상의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이거는 반복돼야 해요. 그 자체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근본이 아니라 모형이에요. 하나의 비유에요. 하나의 그림자이고 오리지널이 아니라 복사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짝퉁인거죠. 그래서 그거는 반복돼야 됩니다. 근본은 예수의 희생제사다. 그래서 여기 몇 번 반복해서 단번이라는 게 강조되고 있어요. 12절에도 이미 나왔죠.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건 유일회적으로 그분에게만 일어난 거예요. 근본은 예수의 희생제사다.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하시려고, 26절입니다.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죠. 단번에 죄를 없이하시려고 자기를 제물로 드린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어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후반부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감당하려고, 죽음으로 우리 모든 인간들은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일종의 삶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느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을 우리 스스로 그 심판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안 되는 거거든요. 그것의 근본적인 것의 해결, 이게 단번에 자기를 희생제사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더 이상의 속죄제사는 이제 필요 없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속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종교의식인 거예요. 거룩한 의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속죄를 완성했다는 이 엄청난, 아주 우주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으로써의 예배가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이루셨는데, 현실로 다 해결이 됐나요? 아직 안 된 거예요. 여전히 죄나 이런 것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거고 우리 스스로도 그 세력 안에 있고요. 그것의 완성은 언제 일어나죠. 예수님 재림이죠. 다시 오시리라 마지막 구절에 붙어 있습니다. 이 긴장 가운데서 우리가 살아요. 이게 계속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행착오도 하고 마음이 찜찜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거기에 얽혀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서 우리가 심판의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은 확실하게 믿고 있지만 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아직은 아닌 거예요.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님의 재림, 그 때까지 우리가 기다려야 됩니다. 참아야 되기도 하고 견뎌야 하는 거예요. 아직 완성되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루어 졌는데 우리에게까지 현실로는 아직 되지 못한 그 심판 너머에 있는 거룩한 성소로 들어가는 그 때까지 우리는 이러한 중간 시간들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스스로 힘든 일이 있거나 실수도 할 수 있고요. 너무 거기에서 절망하지 마시고요.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살면 안 되는 거고 예수그리스도가 단번에 그 일을 이루셨다는 그 사건에 조금 더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2015311일 이 귀한 수요일 저녁에 소수의 무리지만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 마음으로 같이 이 히브리서 9장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이 햇수와 달, 그리고 일, 요일, 이런 것들이 우리가 언제까지 기억하겠습니까마는 찰나에 불과한 이러한 시간들이 말씀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과 잇대어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순간순간의 공부들이 영적으로 축적되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그 구원의 놀라운 신비에, 더 깊이 들어가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십시오. 이 불순한 일기 가운데서도 저희들을 지켜주신 것 감사하고 우리의 주신 모든 삶의 조건들이 다 족한 줄로 알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인도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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