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함께 공부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를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 6장이 되겠네요. 아마 이 히브리서는 여러분들이 집에서 혼자 읽을 때는 읽긴 읽더라도 확 와 닿지는 않을 겁니다. 이게 조금 여러모로 까다롭기도 하고요. 구약에 있는 이야기 하고 연결된 메타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은유, 이런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하는 시간들이 약간 까다로운 성경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1절부터 20절까지 있네요.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1절 읽고 여러분들 그 다음절 읽고 하면서 20절까지 있으니까 딱 떨어지겠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여기 단어 하나만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20절에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나와 있죠. 지난번 5장에서도 반차라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사실은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에요. 이 반차가 차례, 순서이긴 하되 조금 더 엄격한 질서를 가진 순서라고 할 수 있어요. 영어로 오더(order)라고 합니다. 어떤 체계가 잡힌 질서, 선한 질서, 이런 걸 얘기합니다. 대제사장들이 차례차례 직임을 자기가 수행하잖아요. 그 순서, 이런 걸 갖다가 반차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6장은 전체 제목을 신앙의 성장이라고 잡았습니다. 우리가 지난 5장에서도 보면 어린 아이 신앙이 있고 좀 장성한 사람의 신앙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믿음을 큰 믿음이다 작은 믿음이다 우리가 얘기를 하긴 하지만 그 말하기에 따라서 약간 관점이 다른 겁니다. 뭐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고 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게 다 똑같은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근원적으로 보면 이 믿음도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은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은사라고 한다면 큰 은사가 있고 작은 은사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다 똑같은 겁니다. 목사직, 이것도 은사고요. 교회 봉사하는 것들, 주일학교 교사들 등등을 은사라고 얘기합니다. 카리스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아시겠지만 카리스마라고 하는 단어가 일반적인 세속에서는 저 사람 굉장히 카리스마가 있어 하면 어떤 강한 지도력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원래 카리스마라고 하는 단어가 그 뜻은 아닙니다. 선물이라는 뜻이에요. 여기서 카리스마가 있어 얘기하는 것은 틀린 말은 또 아닙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이해하고 하니까 힘이 느껴지는 거죠.

 

이 믿음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걸 크다 작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라고 하는 카리스마나 성가대원이라고 하는 카리스마나 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기능의 차이, 어떤 일을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런 거예요. 그러나 이 믿음을 내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성장하는 믿음이 있고 정체되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성장하는 건 큰 믿음이라고 보통 얘기 할 수 있고 정체되는 건 작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 자체는 완전하게 표현하기는 힘들어요.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보겠냐 그런 말씀이 있는 것처럼 그 믿음에 정말 들어가게 되면 비록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존재론적인 힘이 있어서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다만 여기 히브리서 기자는 젖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하고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성한 사람을 구별하는 것. 이것은 약간 다른 차원입니다. 그게 인제 뭔가 하는 것을 6장에서 천천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6장을 전체적으로 세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도 보면 동그라미를 쳐가지고 단락이 구분되어 있어요. 그것에 따라서 제가 구분을 했습니다. 1절에서 8절까지가 하나고 두 번째는 9절에서 12절까지이고요. 세 번째는 13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각각 소제목을 붙였습니다마는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문맥에서 중요하다 싶은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소제목을 그렇게 붙였습니다. 1절에서 8절까지 소제목이 두 번째 회개 위험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거는 6절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일단 그거 먼저 보십시오. 6,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나니. 회개 못한다. 두 번째 회개는 불가능하다 그런 뜻이죠. 이 말 자체로 보면요. 그래서 아주 옛날 교부시대 때에는 이러한 말에 근거해서 가능한대로 세례를 나중에 받으려고 했습니다. 세례 받은 다음에 또 잘못하면 용서받지 못한다. 이거 회개가 불가능하다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틴, 콘스탄티누스, 기독교를 공인한 그 황제가 일을 많이 했거든요. 4세기 초반, 중반에 역할을 한 사람인데 니케아 회의도 소집하고 굉장히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거의 죽을 때 이르러서 세례를 받았어요. 논리가 그겁니다. 자기가 황제로 살다보니까 잘못도 많이 하겠고 전쟁도 일으키고 해야 되니까 그런 걸 염두에 둬서 그런지 회개한 다음에 또 잘못하면 큰일 난다 생각을 해갖고 거의 죽음에 이르러가지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6절에서 말하는 것은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실수를 안 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런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콘스탄티누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약간 못 미친 거고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오해한 거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실수를 했다 안 했다 그 문제가 아니라 아예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버린 거예요. 그러면 이미 마음이 떠나면 돌이키려고 해봐야 되지 않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 회심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걸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거죠. 그 이야기입니다. 1절에서 8절까지의 핵심 단어를 두 번째 회개의 위험성이라고 정해서 어떤 뜻인가를 먼저 말씀드렸어요. 1절로 다시 돌아가 보도록 합시다. 1절은 앞에 써 있는 5장 이어지는 거예요. 이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렇게 나와 있어요. 뭘 버리라고 이야기하죠. 버리라, 떠나라 하는 겁니다. 그 도라고 하는 단어를 각주에 보니까 말씀이라고 나와 있죠. 로고스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진리, 그런 것의 초보, 기초죠, 출발점이죠. 이걸 버려라 이야기했습니다. 근데 사실 이게 중요한 거거든요. 초보를 버릴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보면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초보를 붙들어야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의 처음 시작이 중요하니까요. 기초가 중요하니까요. 여기서는 초보가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이야기가 아니라 거기에 머물러서 성장이 없는 거. 만날 젖을 먹는 어린아이처럼 기초에만 머물러 있어 가지고 더 이상 성장이 없는 그러한 건 문제가 있다 그걸 말하면서 거기서 좀 떠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여러분들이 잘 아셨을 겁니다.

 

2절에, 1절 다시요. 초보를 버리고 그 다음에 설명이 나오죠. 죽은 행실과 회개와 신앙과 세례와 안수와 부활과 심판에 대한 교훈의 터를, 이게 정말 중요한 거잖아요. 다시 닦지 말고,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시 반복됩니다마는 중요하되 거기서만 머물러 있지 말고 더 완전한 데로 나가라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나가야된다 얘기하고 있어요. 그 완전한 데가 뭔가 그건 설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게 실질적으로 들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초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거를 반복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었던 어떤 경험, 그거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약간 식어지게 되면 예수 영접 회복해라 그래서 거기에 머물러 있죠. 제가 자주 예로 드는 것처럼 구구단을 자꾸만 반복해서 외우는 거예요. 수학은 잘 모르는 거예요. 구구단이 필요 없는 건 아니되 구구단을 기초로 해서 점점 수의 오묘한 세계로 들어가야 그 쪽으로 성숙한 수학을 아닌 게 아니겠어요. 이러한 준비, 훈련들이 우리들이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의 다툼, 갈등, 교단 분열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많은 경우에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거예요. 그냥 기초만 가지고 이걸 어떻게 써먹나, 좀 편하게 얘기해서요. 예수 믿는 걸로 어떻게 세상에서 복을 받는 자, 그럴듯한 기독교인이 되나 이런 거만 생각하지 더 나가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점점 완전한 데로 나가라고 얘기를 하고 있어요. 거기에 다시 터를 닦지 말고 자꾸만 돌아가지 말고,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나가야 되는데 못나가는 그런 상태로 있지 말고 2절 후반절에 보면 안전한 데로 나가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점점 가야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신앙생활하면서 내 신앙이 진보하고 있다, 완전한 데로 점점 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완전한 거를 성취는 못해요. 그러나 그 불빛이 점점 환하게 비추가 있다는 그러한 느낌, 인식, 깨달음, 경험들이 있으신지 모르겠어요. 그건 분명히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자면 부활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낱말 뜻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니면 내가 죽었다 산다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해도 세례는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입으로 자기가 고백하게 되면. 그런데 거기서 더 완전한 데로 나가게 되면 그 생명의 신비들,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과 예수의 재림과 그러한 하나님과 일치된 생명의 세계가 더 가까이 경험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점점 우리에게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면 죽음이라는 것도 작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어디로 통과하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게 신앙적인 자기도취, 자기착각이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것에 대한 깨우침, 경험 죽음으로부터 자유, 해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데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과정이 있는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수행이라고 해요. 이건 불교식으로 수행이 아닌 거예요. 불교는 자기가 막 갈고 닦는 거잖아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초보의 단계에서 점점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어떤 과정, , 이러한 신앙의 성격을 가리켜서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 안 되는 이유는 일단 관심도 없고요. 이게 참 딜레마인데요. 제가 여태까지 평생 동안 많은 사람들, 큰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고. 제가 다른 사람보다 일찍 목사 안수를 받고 군목 갔다 오고 해서 부목사라든지 이런 경험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잠깐잠깐 있었는데 주로 단독 목회를 젊었을 때부터 해서요. 그래도 목사 생활을 하니까 지방이나 총회에 여러 사람들을 알고요. 장로님이나 목사들 많이 알기 때문에 그 분들의 관심이 어디 있나에 대해 대충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단 관심이 없는 거예요.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서, 성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같은 목사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어떨지 모르지만 목사님들도 이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성경, 신학, 영성, 이런 것들이 방편이 돼버려요. 방편이 돼가지고 그걸 통해서 어떻게 교회를 어떻게 키우냐. 그런 식의 관심들이 제일 많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종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요. 부활에 대해서도 사실은 관심이 없습니다. 그거는 구구단처럼 딱 주어진 거라서 그거를 이용해서 내가 구구단을 멋있게 화려하게 잘 외운다. 그런 일종의 쇼처럼 보여주기 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좀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교회 안에 사도신경과 교회 예배가 살아 있으니까 그런 허물이 있어도 나갈 수 있긴 있는데 그런 걸 잘 알고 신앙 생활하는 거 하고 아닌 거하고 차이가 좀 많이 있는 거죠. 그런 점을 여러분들이 심각하게 생각을 해서 과연 내가 신앙의 초보가 아니라 완전한 데로 나가고 있는 그러한 수행으로써 살고 있는지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그 다음 6, 이건 아까 얘기한 거예요. 이게 타락한 자가 새롭게 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얘기예요. 그건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돌아가기 힘든 거는 내가 실수를 한 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건 누구나 하는 거고요. 세례 받아도 그런데 이제 마음이 완전히 강퍅하게 된 거, 예수님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난 버린 거 그런 상태에서는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한 위험성.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절과 8절은 창조의 문제를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실을 맺도록 다 만들어 놓으셨는데 맺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 엉겅퀴가 돼서 버림을 받는 거 아니냐. 그래서 결국 8절 마지막에 보면 불 태워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신앙의 훈련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그 얘기를 한 겁니다. 다음 9절에서 12절입니다. 여러분 강의안 요약본 잠깐 보실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신앙의 초보와 성숙과 두 번째 회개의 불가능성 등등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편지, 혹은 신학 논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참된 신앙에 이르게 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정말 신앙의 근본에 가게 하려고 하는 거죠. 그러한 자세를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신앙의 성장도 있고 신앙의 능력, 그런 것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데요. 그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대게 형식에 떨어지거나 또는 자기 열광에 빠지는 거예요. 신앙하고 자기 열광하고는 정말 다른 겁니다. 내가 믿음 있는 것 같아하면서 그 쪽으로 열심을 내는 것. 그게 아니라 정말 성경이 얘기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부활과 종말의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관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 분의 약속, 가르침, 여기에 정말 마음이 가야 신앙이 좀 성숙해질 수가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다 성숙하게 신앙생활하기 힘들어요. 다는 불가능합니다. 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있는 사람들도 있어야 되고요. 그걸 무조건 배척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한 신앙으로 가는 사람들이 필요하고요. 우리들이 그런 쪽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뭐냐, 참된 신앙의 근원이 뭐냐, 이거를 11절과 12절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 가지예요. 소망, 믿음, 오래 참음. 11절과 12절이에요. 신앙의 성격을 얘기하는 거예요. 혹은 본질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소망과 믿음과 오래 참음. 이 세 단어만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돌아가셔도 공부에 참가한 의미가 있을 겁니다. 보통 우리가 많이 소망, 희망 이야기 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간다. 그러한 희망, 그것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거는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하는 한 부분인 거예요. 소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어떤 속사정들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제 강의 요약문 좀 보십시오. 오늘 제가 글을 잘 설명해야 될 텐데 일단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소망, 믿음, 오래 참음 이게 중요하다고 얘기하는데요. 이런 신앙적인 태도는, 그렇잖아요. 소망, 믿음, 오래 참음이 우리의 태도잖아요. 이런 것들은 그냥 있는 게 아니라 약속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이라는 말을 잘 생각하세요. 약속과 희망, 믿음, 오래 참음이 다 연결되는 이야기에요. 약속은 어때요 이미 받았어요? 아직 못 받았어요? 못 받은 거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아직 우리가 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기도해서 어떤 걸 이루었다. 그런 걸 받은 거다 얘기할 수 있어요. 그런 것들은 약속의 부스러기들입니다. 그건 결정적으로 우리의 약속은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은 뭘까요 쉽게 생각해서. 구원이죠. 하나님의 나라 거기에 참여하는 것, 부활 생명을 얻는 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부활을 이루었나요? 아니 잖아요. 그게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제가 건강을 달라고 기도해가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건강하게 산다거나 10년 더 산다거나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죠. 그건 그래봤자 조금 더 머물다 가거나 먼저 가거나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걸 여러분들이 다 아실 겁니다.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구원이죠. 구원을 다른 말로 부활이라고 얘기하고 다른 말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거를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것들이 너무 절대적인 것이라서 한, 두 단어로 딱 끝낼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이 여러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 신약성서입니다. 복음서는 복음서대로 서신은 서신대로 요한계시록은 요한계시록대로 말이죠. 본문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는데 이미 우리 손 안에 들어 온 것이나 그리고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상관없어요. 막 노력해서 뭘 이루었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생각한다면 참 하나님의 약속이 유치해지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증적으로 어떤 것을 준 게 아니다. 여기서 실증적이라고 하는 말은 물건처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식을 얘기합니다. 이게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약속인 거예요. 지금 끝난 문제가 아니야. 앞으로 되어 질 일. 그러니까 기대가 되죠. 여기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 잘 먹고 잘 산다 그걸 확실하게 보장해 주었다. 이걸로 머문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거는 세상이 우리에게 유혹하는 거예요. 돈 많이 벌면 어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약속입니다. 정말 잘 생각하셔야 돼요. 아직 성취된 거 아니에요. 그러나 정말 신실한 분이 하신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운명을 걸고 사는 거죠.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위험해요. 왜냐하면 확실하게 손에 든 게 아니라 약속에 근거한 거니까 말이죠. 약속한 분을 우리가 신뢰할 만하니까 따라가는 거지 그렇지 않다면 헛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되는 거죠.

 

그래서 사도신경에 처음부터 하나님을 얘기하잖아요. 그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으며 그렇게 나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믿을 만 한 분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그 분으로부터 온 거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사도신경이 얘기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을 만한 분인지 좀 알아야 되잖아요. 알지 않고도 믿습니다하면 되긴 돼요. 사람은 신기해서 자기마저도 속입니다. 자기마저도 기만하고 그래서 실제로는 믿지 못해 신뢰가 가지 않으면서도 열광적으로 매달리다 보면 정말 자기가 믿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잘못된 신앙인 거죠. 그렇게 가능한 거예요. 사이비 이단들의 믿음이 좋은 건 아실 거예요.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이 왜 믿을 만한 분인지를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하고 신학만이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단어죠. 약속입니다. 구원의 약속,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을 기독교인들은 상속 받은 겁니다. 12절에 보면 기업으로 받는 자들,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게 상속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그렇게 된 사람들, 상속받은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참 재밌는 표현이에요. 너희들은 상속받은 자다 이렇게만 말하지 않고요. 상속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인 거예요. 그냥 혼자서 날고 기고 해갖고 번쩍해서 기도 많이 해서, 뭘 받아가지고 깨닫는 게 아닙니다. 앞에 간 사람을 따라가는 거예요. 본받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도들 속사도, 교부들, 지난 몇 천 년 동안 경험한 사람들이 앞에 가고 있잖아요. 우리도 그 길을 가야죠. 잘못 가게 되면 또 삐뚤게 가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본받는 자가 되려면 그렇게 기업을 받은 앞의 선배들이 어떤 신앙이었냐는 것을 알아야죠. 배워야죠.

 

이런 것들이 바로, 성서와 신학이, 역사입니다. 우리가 꾸준하게 배우는 게 최선입니다. 여러분, 공부 이런 것들이 당장 신앙이 불 같이 뜨거워지는 경험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래도 문득문득 여러분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어떤 단어라든지 어떤 개념 설명 그런 걸 통해서 어떤 세계가 열리는 경험들을 조금씩 하게 될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확 더 열리게 됩니다. 그런 단계까지 가는 건데 여기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에 빌리면 완전한 데까지 나가는 거죠. 갑자기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준비 없이는 안 됩니다. 만날 젖만 마시고 달콤한 데만 머물러 있다가는 성장하지 못하죠. 히브리서 기자가 예로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조금 딱딱해도 약간 써도 음식을 자기가 깨물어 먹고 신학도 공부하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뭐냐, 존재한다는 게 뭐냐, 시간이 뭐냐, 그런 걸 예를 들어서.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학습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지금까지 수 천 년 동안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알 수 있고요.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건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왔다 가거든요. 돈이 있으면 좋은 집에 산다거나 건강하면 조금 건강하게 산다거나 그런 거예요. 그런 것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으로 받는다고 하는 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보다 우리들에게 더 시급한 게,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게 뭘까요.

 

다음 마지막 13절에서 20절입니다.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라. 애틋한 마음으로 히브리서를 읽어야 될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권고를, 충고를 했어요.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구약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약속 개념, 이게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에요. 기본적인 걸 잠깐 말씀드리면요. 성서의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혼자 고고하게 있어서 밑에 있는 인간들을 자기 마음대로 체스 놀이하듯이 여기 놨다, 저기 놨다하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람과 약속하는 분으로 성서가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구약에 보면 약속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대표적인 출발이 아브라함입니다. 여기 약속이라고 하는데 단어가 두 가지가 나와요. 약속과 맹세. 그래서 이 단락의 소제목을 그렇게 잡았습니다. 두 가지가 비슷한 거예요. 비슷한데 좀 차이가 있죠. 약속에 근거해서 맹세하는 거예요. 이건 내가 변하지 않고 지키겠다는 약속에 대한 확인, 이게 맹세예요.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시고 또 맹세하셨다. 약속은 서로 관계에서 한 건데요. 맹세는 어떤 근원적인 걸 두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렇게 표현하면 되겠네요. 국기에 대한 맹세, 이런 거 있죠. 우리나라 예식을 공공기관에서 뭐할 때 말이죠. 그건 국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거예요. 약속은 아니죠. 약속을 어떤 권위에 근거해서 확인하는 걸 가리켜서 맹세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을 하시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요. 맹세할 때는 더 높은 권위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더 권위가 있는 존재가 없기에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빌려서 맹세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약속 안에 있으면서 하나님에 근거해서 맹세했다 그걸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건 약속과 맹세 두 가지가 어떻게 차이 있냐, 그건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고요. 어쨌든 약속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핵심적으로 말하려고 합니다.

 

16절이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고 확증이니라. 그러니까 맹세를 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논란이 잠재워 진다는 거죠. 나는 국기에 이름에 나라에 맹세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 앞에서는 애국적이냐, 아니냐, 그런 논란이 필요 없이 해결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핵심적인 표현은 아닌데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지금 여기 약속과 맹세가 반복해서 나왔어요. 여기에 근거해서 여러분 강의 요약문 넷째 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우리의 소망이 확실해진다. 하나님과의 약속,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 그리고 맹세에서 우리의 소망이 확실해집니다. 이거는 조금 더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거기까지만 접어두고 넘어가지요. 19절에서 소망을 가리켜서, 여기 지금 소망이 중요한 거였어요. 앞에서 소망의 풍성함, 믿음,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이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건데 지금 다시 13절부터 그 약속과 맹세를 이야기 하면서 결국은 그게 확실해야 우리가 소망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얘기한 거예요. 19절에서 이 소망을 재밌게 표현 했습니다. 영혼의 닻, 참 표현이 문학적으로 멋집니다. 영혼은 우리 사람의 가장 심층에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입니다. 그게 뭔지는 아직 다 밝혀지지가 않았어요. 우리가 아직 미쳐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서와 성서에 근거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는 신학의 설명에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거죠. 우리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에요. 그게 살아 있어야 정말 사람이 사는 거죠.

 

우리를 정말 살아 있게 만드는 근원적인 힘이 영혼인데 영혼의 닻이다, 닻은 배에서 쓰는 건데요. 닻을 내려야 배가 안정적이잖아요. 우리 영혼이 안정적으로 되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소망이 있어야 됩니다. 근데 이 소망은 약속한 맹세에 근거에서 가능한 거예요. 그 약속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약속이 신실하다는 걸 알고 그 약속에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사는 거죠. 그렇게 된 사람은 그 영혼이, 생명의 근원이, 닻을 내린 배와 같은. 저는 이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의 영혼이 안정이 될 수가 없어요. 그 어떤 것으로 안 됩니다. 닻과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여기서 휘장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그 휘장을 가리킵니다. 성전에는 여러 마당도 있고 건물도 몇 개 있는데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어요. 가장 거룩한 장소라서 거기는 유대 대제사장이 매번 안식일마다 들어가지 못해요. 일 년에 딱 한 번 들어갑니다. 휘장을 열고 들어가는 거예요. 가장 거룩한 곳, 그건 생명의 비밀을 가리키는 거죠. 그러니까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은 닻을 내린 배와 같아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휘장 안에 들어간다, 생명에 중심으로 들어간다. 멋진 표현입니다.

 

저도 이렇게 히브리서를 여러분들과 공부하지 않으면 구석구석 낱낱이 확인할 수 없었는데 공부가 여러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이러한 표현들은 제가 잘 알고 있으면 다른 글을 쓰거나 설교할 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목사도 계속 억지로라도 공부하는 게 필요합니다. 수요일만 하지 말고 매일 모일까요? 무슨 뜻 인가요 웃음이. 약간 옆으로 나가는 말입니다마는 제 꿈, 비슷한 게 수도원 원장 되는 겁니다. 그럼 이제 거기서 매일 성경 가르치고 노동할 수 있으니까, 근데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런 말씀들을 우리가 매일 같이 읽고 보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닻을 내린 것처럼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겠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여러분 강의 요약문 마지막 문장만 보겠습니다. 휘장 안은 생명의 비밀이다. 이런 사건이 예수를 통해서 일어났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공부가 좀 많이 된 히브리서 6장 공부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이렇게 또 순서에 따라서 히브리서 6장을 공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도의 초보, 중요하되, 근본이되, 거기만 머물러 있지 말고 완전한 데까지 나가라고 하는, 그 지성소의 비밀까지 나가라고 하는 간절한 호소를 듣습니다. 저희들에게 히브리서 기자의 간절한 호소가 우리 신앙에 자극, 공명, 그리고 동기가 되도록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그 소망을 안고 영혼의 닻을 내린 것처럼 한 평생을 살아가게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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