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9편 강해-창조 영성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잠깐 쉬는 시간에 우리 집사님하고 존재론적이라는 말을 잠깐 나눴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것에 대해서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조금 더 보충 설명할까 합니다. 존재론적이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데요, 가능한대로 그렇게 안 하려고 하는데 자꾸 나옵니다. 무슨 무슨 的적이다. 이게 일본말투라고 그래요. 딱 맞질 않는데 다른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어요. 존재론적이다. 존재자체, 존재론적 기쁨, 그런 이얘기 했잖아요? 이렇게 낱말 뜻으로 풀었는데요, 낱말 뜻으로 풀 수는 없는 건데 이렇습니다. 우리가 규정하거나, 재단하거나 계량화하거나, 계량화한다는 것은 잰다는 거예요. 규정, 재단, 계량 할 수 없는 근원적이고 심층적이고 배타적이고, 지금도 자꾸만 적이라고 하는데 고유한 통치행위, 이런 걸 존재론적이다, 얘기합니다. 에리히 프롬의 옛날에 읽었던 그 책이 조금 도움이 될 거예요. 이건 학문적인, 전문적인 용어로 설명했지만, 내용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예요.

 

그러나 그것도 다 끝난 문제도 아니예요. 존재, 혹은 존재론적인 것이 뭐냐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누구냐 라는 질문하고 똑 같아서 쉽게 끝날 문제는 아닙니다. 마치 생명이 뭐냐가 아직 끝나지 않은 거 아시지요?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삶이냐, 소유지향적인 것, 존재지향적인 거 이야기 했잖아요? 누가 설명하실 수 있으세요? 소유지향적 이라고 하는 것은 좀 눈에 들어옵니다. 적금 부었는데, 집 샀다, 그런 걸로 내가 뿌듯하다, 지금 내가 살아있구나, 경험하는 거예요. 소유함으로써 살아있다고 경험하는 걸 가리켜서 소유지향적이다, 에리히 프롬이 거기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존재지향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반대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유로 확인하는데요, 그것과 상관없이 확인할 수 있는 삶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 그걸 가리켜서 존재지향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잘 전달 되겠지요.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이겁니다.

 

오늘 저녁밥을 5만원짜리 뷔페 먹었냐, 아니면 10만원짜리 코스요리를 먹었냐, 아니면 5천원짜리 하양 기사식당가서 정식을 먹었냐, 하여튼 그런 차이가 있잖아요. 우리가 10만원짜리 코스요리를 먹었다, 정말 우리가 대단하게 먹었다, 차이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소유지향적인 것이고요, 일반적으로 다 그렇게 살지요. 그리고 존재지향적인 것은 이 세끼, 세 번의 서로 다른 방식의 밥 먹기인데, 어떻게 받아 드리면 될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그렇지요, 먹는 것 자체에 집중하는 거예요. 된장찌개를 먹든지 아니면 비프스테이크를 먹던지,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먹는다, 세상에 우리가 어떤 상태로 사느냐가 아니라 그냥 사는 것, 존재하는 것, 여기에 모든 걸 집중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켜서 에리히 프롬의 말을 빌리면 존재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그런 존재지향적인 것은 우리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스스로 규정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재단하거나 계량할 수 없는 그런 기쁨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게 뭐,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와 닿지 않는다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가능할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것이 와 닿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기독교 신앙도 여전히 도구로 떨어져서 그걸 통해서 어떻게 편하게 사냐로 떨어지게 될 겁니다. 시편 19편 1절에서 14절까지 제목이 “창조영성”이예요. 잠깐 먼저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건 요르크 칭크(Jorg Zink)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이예요. 우리말로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독일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네요. Erde, Feuer, Luft und Wasser: 헬라 사람들이 이야기한 네 가지 원소입니다. <땅, 불, 공기, 물> 이게 책 제목이고 부제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Der Gesang der Schöpfung 창조의 노래 und 그리고 das Lied des Menschen 인간의 노래, 창조를 노래하고 천지찬양과 인간의 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요르크 칭크라고 하는 사람이 1986년도에 썼어요. 출판사는 Kreu3-Verlag, 1986우리나라에서는 1989년도에 번역 되었습니다. 비교적 일찍 번역되었어요. ‘현존사’에서 나왔고요. 강원돈 선생님이 번역하셨네요. 이건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땅, 불, 공기, 물, 이것에 대한 시편과 그리고 주변 지혜서에 나오는 말들을 이 저자의 신학적 영성에서 해석한 책입니다. 제가 이 책을 산 게 1989년도에 나온 건데 1991년도에 샀어요. 1991년 3월 4일날 샀네요. 그때 아주 좋았습니다. 책 읽기의 기쁨이 거기 있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한 단계 올라가는 거예요. 단계가 무수하게 많아서 끝이 없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단계를 높여져요. 책 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제가 여기서 길게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거기서 많은 정보를 얻는 건 아니예요. 알고 있는 것도 많이 있고요. 조금 느낌들이 남아요. 오늘과 내일 우리 강의 하면서 제가 여러 말을 반복하는데, 새로울 게 뭐 있겠습니까, 어떤 느낌이 조금 남을 수 있다면 그럼 충분한 거예요. 그 느낌이 우리의 시각을 조금 열어 줍니다.

 

그런 관점으로 쭉 나가게 되면 그게 축적이 돼서 자기도 모르게 내공이 깊어진 걸 알게 되요. 자기도 모릅니다. 언제 되는지를,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많이 얻었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사진, 그림이 많이 나와요. 태양이겠지요? 바다위에 뜨는 태양 이예요. 그 다음에는 사막에 있는 광야, 하여튼 척박한 지층들이 나오네요. 어디인지는 이 책에, 장소는 나오지 않습니다. 뭐, 등등.. 그런 것들이 쭉 나와요. 제가 지금 아파트 생활 정리하고 영천군 북암면 원당리에 있는 농가로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계획으로는 금년 안 인데 뭐, 될지 안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들어가게 되면 원당일기를 본격적으로 쓸 생각입니다. <월든>은 못 미치지만 거기에서 제가 경험하게 될 것이 정말 많을 것 같아요. 아주 기대가 많습니다. 거기 벌레 한 마리나 하여튼 거기에 봄 이른 여름까지 오디지요? 그런 열매 맺히는 곳, 그리고 맷돼지가 내려오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조금 외딴 곳에서는 농사짓지 못해서 폐허가 된 곳들 비롯해서 우리 농가 아래 있는 마당에 거미, 개미 도마뱀들이 많이 다니거든요, 대나무 등등.. 얼마나 관계를 가져야 될 것들이 많이 있겠어요.

 

두 가지 흥미거리를 말씀 드리면 농가에 앉아 있으면 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야트막하게 요렇게, 막다른 마을인데 작은 언덕, 산이 있습니다. 거기 동쪽이예요. 앉아 있으면 동쪽 산으로, 높지 않아요. 야트막한 산인데 동쪽이라서 태양과 달 떠오르는 게 바로 눈 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별들이 많이 보이고요, 그게 직접 가서 살게 되면 더 많이 느끼게 될 것 같아서 더 기대가 되고, 서쪽이 집 등으로 되어서 언덕이 되어 가지고 거기도 산이예요. 산중턱에, 중턱은 아니고 산이 워낙 작으니까 아랫니긴 하지만 마을에서는 가장 높은 집입니다. 거기 산을 절개해 놓고 거기 집이 들어서게 됩니다. 거기 이층집으로 들어가게 될 텐데요, 그럼 거기 2층에 있으면 바로 산 뒤편으로 창문 옆에 있는 거지요? 손 내밀면 참나무들이 많이 있어요. 손에 잡히겠지요? 그리고 재미 있는 건 또 바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서 무덤도 있어요. 작년 봄엔가 한 분이 또 올라가셨더라구요.

 

옛날에 도를 훈련하는 분들은 무덤 옆에서 자기도 했다고 하잖습니까, 저는 아직 용기가 없어서 무덤 옆에서 잘 수는 없을 것 같고 그 안에서 자면서 아, 내가 결국 돌아가야 될 곳이다, 준비를 좀 더 해 볼까 생각을 합니다. 제가 땅에 묻힐지 어떻게 될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여기 이** 선생님 그런 분들은 시신기부를 하셨으니까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시기 다음에, 죄송합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돌아가실 걸 우린 다 가야되니까, 그렇게 하시는데, 저도 시신 기증할 수도 있고, 장기기증 이런 쪽으로도 가능하고요, 수목장 이런것도 있다고 하는데 무덤을 만들어서 묻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귀찮을 것 같아요. 우리 딸들도 그렇고, 등등..그래도 어쨌든 거기 원당에 들어가서 죽음에 대한 것을 조금더 실질적으로 생각을 해 보자 그런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원당일기를 거기 들어가게 되면 본격적으로 쓰게 되는데 금년 말까지는 기도문을 계속 쓰고요.

 

제가 언젠가 서울샘터에서 공부할 때 그런 이야기, 약속인가 했던 거 같은데요, 내가 환갑 되기 전에 세 권의 책을 꼭 쓰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기억하세요? 두 권인가, 세 권인가, 하나는 기도문 쓰겠다, 365일 기도문, 상투적인 기도문 말고, 나에게 살아 있는 기도문을 쓰겠다, 365일 기도문은 많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도 많이 썼어요. 내 영성에서 써 보자 그래서 지금 금년 말에 끝나니까 어쨌든 그건 될 거고요. 제가 내년에 환갑이거든요, 환갑 때 책이 나오지는 못 할 것 같아요. 그거 하나이고, 젊은 목사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목회 전반의 신학이나 설교나, 그건 지금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가 뭐꼬?> 다시 책으로 내겠다, 약속을 했는데, 두 가지는 되고 한 가지는 안 되고 있어요. 원당일기도 제가 차분하게 엮어서 일단 다비아 사이트를 통해서 다비안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기회 되는대로 책으로 엮겠다,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몇 가지 차분히 엮어야 될 게 있는데요, 시편 강해 한 게 너무 방대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좀 생각을 하고 있고요, 또 하나는 마가복음 묵상집을 지금 다비안들에게 나가고 있는데 한꺼번에 묶으면 4년 치거든요? 이런 것을 해줄 출판사가 있을까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우리 대구성서아카데미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필요한 것들 할까, 그리고 사도신경해설 녹취한 것은 너무 길어서 어떨까, 하여튼 그런 몇 가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지금 이건 절판 됬지요, 이런 책들도 신학교에서 읽고 같이 토론하고 그러면 창조영성에 좀 깊이 들어갈 것 같은데 그런데 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예, 오늘 3강의 제목은 “창조영성”입니다. 창조영성 원래 19편은 독립되었던 두 편의 시가 하나로 통합된 거라고 해요. 주제, 감정, 언어리듬이 크게 다르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보면 다르게 나타나요.

 

하나는 1절에서 6절로 자연을 주제로 하고요, 다른 하나는 7절에서 14절로 율법을 주제로 합니다. 서로 독립되어 있었던 시인데 시편에는 그런 게 많아요. 흩어졌던 게 보이기도 하고 약간 좀 어긋난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서로 다른 시가 통합된 이유는 이 두 개가 다 제의에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제의 전통에서 자연을 주제로 하거나 율법을 주제로 한 시가 들어오게 된 겁니다. 창조를 찬양하고 율법을 찬양하는 그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조의 영성이라고 하는 제목이 있듯이 주로 앞 부분 것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시편 19편 1절에서 6절은 시편 8편하고 비슷한 영성의 의한 노래예요. 시편 8편 1절에서 3절, 그 사이를 보면 비슷합니다. 들어보세요.1.여호와여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외면할 수 없지요. 그러면 안 되지요. 창조한 세계, 구체적인 세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예요. 시편기자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서 거룩한 전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야만 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아름다움, 모든 것들이 미생물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들이 창조의 조화로움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서로 상충되고 싸우고 그러잖아요? 세상이 웅크러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악어가 얼룩말들, 들소들 잡아먹는 거 끔찍하지요? 그러나, 어거스틴의 시에도 그런 게 나올 텐데요, 우리 눈에는 악하고 충돌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놀라운 조화로운 창조다, 그 얘기입니다. 그게 창조영성이면 자연신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 신학에서 이 창조영성의 전통이 있습니다. 당연하고요. 구약 시편만이 아니라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도 그러한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좀 약화 됬어요. 그 약화된 이유가 뭘까요?

 

교리사적으로 보면 어거스틴 때문입니다. 펠라기우스하고 어거스틴이 많이 투닥투닥 했어요. 그런데 어거스틴은 주로 인간의 죄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런데 원죄 개념이 어거스틴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원죄, 원죄 하지만 처음부터 원죄라고 하는 개념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기독교 신학이 다 마찬가지예요. 있는 게 아니라, 없다는 뜻도 아니예요. 학자들이 성서를 해석하면서 논리적으로 어떤 개념들을 제시한 거지요. 그게 기독교 교리예요. 우리가 교리를 알려면 학자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교리사적인 맥락을 알아야겠지요. 그런 것 없이 인간은 죄인이야, 죄인, 맨날 그 얘기하면 그건 정말 잘 못된 겁니다. 왜 죄를 말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그러한 배경을 알아야 되지요. 어쨌든, 어거스틴이, 그런 면에서 욕을 많이 먹어요. 아주 위대한 영성가인데, 저는 전적으로 어거스틴의 신학이 좋다고 해요. 그러나 어떤 신학자도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부분에 약간 생각이 충분하지 않았던 걸 놓고 어거스틴이 다 잘못 됬다 말하면 좀 문제가 되겠지요?

 

특히 어거스틴은 사람이 죄를 이야기 할 때 여성비하적인 게 많이 있었고요. 원죄개념을 유전된다고 하는 거예요. 유전된다고 하는 것이 성서에 딱 있나요? 그건 아니거든요, 그러나 어떤 성서구절을 해석하다보면 그리고 성서전체를 조망하다 보면 그런 흐름들이 있어서 어거스틴이나 이런 학자들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상당히 그런 면에서는 원죄라는 개념이 일리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원죄라고 하는 걸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원죄라고 하는 걸 오해하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의 죄의 경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계몽이나 윤리교육 훈화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더 존재론적 힘이다, 이걸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전달이 됬지요, 그런데 그런 걸 가지고 신화적인 방식으로 뱀이 와서 여자를 유혹하고 여자가 남자한테 얘기해서 선악과를 따 먹었다 뭐 그런 장면이 나오는데 정말 그런 건 신화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걸 통해서 고대 유대인들도 인간의 죄의 경향성을 존재론적으로 보려고 한 거예요.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어, 예, 그러니까 카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도 같은 차원이거든요, 형제가 형제를 살인하는, 그게 현실이예요. 인간 삶의, 그런 현실을 어떻게 해명할 거예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아름다운데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다 악해, 전쟁하고 형제살해하고 뭐, 등등..근친상간 이러나고 그런 것들이 인류역사에서 반복되는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 해명합니까, 이게 하나님이 아니지만 인간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힘이 여기에 미치고 있구나, 그런 결론에 도달해서 그걸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인 장치로 선악과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여기 딜레마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만이 유일한 세계창조주로 아는데 악이 어떻게 들어왔어? 뱀이 왜, 이런 논리는 여긴 없습니다. 그건 해명이 안 되요. 타락한 천사? 하나님이 전능하시는데 천사를 왜 타락하게 만들어? 그러니까 성서와 기독교교리는 그런 것들을 완벽하게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순에 대한, 그리고 인간 삶을 파괴하고 있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명입니다.

 

그러니까 원죄라고 하는 개념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겁니다. 어거스틴은 특별히 성적으로 유전된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고대인들에게서, 3세기, 4세기 그 당시에 여러 가지 벌어지는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창조영성을 좀 등한히 여기게 됬어요. 특별히 유럽의 청교도 신앙하고 그리고 미국의 부흥운동이 이런 데 크게 일조를 했고요. 그리고 한국교회 신앙을 앞도하고 있는 신앙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청교도 신앙하고 부흥운동이예요. 짤막하게라도 여러분들이 교리사, 교회사를 아시면 좋은데요, 청교도나 유럽에 있었던 어떤 갱신운동,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침례교회도 그런 흐름들이기도 하고요. 그냥 큰 흐름만 말씀 드릴께요. 종교개혁이 있었잖아요? 루터, 칼뱅, 쯔빙글리,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카톨릭교회의 형식주의 그리고 성직자주의 그런 것들을 뚫고 나가서 성서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신앙의 원천들을 회복하려고 했던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바울신학으로 돌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신학이 17세기로 넘어오면서 정통주의가 됩니다. 개신교정통주의예요. 이건 종교개혁자들의 그 개혁신앙을 로마 카톨릭교회의 토미즘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성과 계시를 종합하자고 하는 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도였고, 그게 카톨릭의 정통신학이 됬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종교개혁신앙을 교리화 한 거예요. 그게 정통주의 신학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너무 교리화 되는 거지요. 전부 신학화, 신조가 나오고 그렇게 되니까 유럽에서 새로운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죽는다, 그런 식으로 하면 그럼 우리는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간거냐, 좀더 도덕적으로 새로워지고 열심을 내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런 쪽으로 가야된다, 그런 운동이 벌어졌어요.

 

청교도주의, 요한 웨슬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운동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나 이런 사람들의 부흥운동과 연관 되어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신조나 신학이나 교회전통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 당장 내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하고 딱 만나서 뜨거워지고 예수 영접하냐 여기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개인주의 신앙으로 떨어진 거지요. 굉장히 주관적인 신앙으로 떨어진 거지요. 여러분들이 들어서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침례교회 같은데는 더 극단적으로 나가서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도 하지 안 거든요, 그것도 죽은 거다, 그건 카톨릭 신앙이다, 그렇게 지금 당장 예수 영접하고 뜨거움 회복하고 그렇게 살자, 돌아온 탕자, 그런 이야기 쪽으로 많이 나가게 됬습니다. 그게 한국에도 전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자연신학, 창조신앙은 그런 것은 아주 약화 된 거지요. 창조영성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이건 그저 잃었던 우리 정통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기본적인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1절, 다음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하늘이나 궁창이나 똑 같은 것인데요, 하늘은 땅과 대별되는 차원에서 표현된 거고 궁창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하늘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똑 같다고 생각하시면 되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말이 되요?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선포합니까? 보이지도 않는 건데요, 궁창이, 하늘 전체가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편기자의 영성이 놀라운 거지요. 시인들이 일반사람들이 볼 수 없는 어떤 세계를 보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겁니다. 일단 고대인들의 눈에 하늘이 어떻게 비쳤을지 한 번 상상해 보시지요, 하늘이 어떻게 보였을지, 은하수가 있고요, 은하수를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고대인들은, 은하수 가끔 봐요? (못 봤어요.) 정말 못 봤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봤는데, 매일 밤 늦게까지 놀러 다녔으니까, 가로등도 별로 없었으니까 그냥 밤에 나가서 놀다보면 다 보이는 거예요. 유성도 많이 봤습니다. 한번 보도록 해 보세요.

 

고대인들은 그런 것들을 뭐라고 보였을까요? 참 신비로웠을 겁니다. 그리고 비가 오잖아요? 그걸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우리는 수증기가 올라가서 비가 되는 걸 초등학생만 되도 알지요. 고대인들은 그걸 몰랐거든요? 그래서 하늘에도 물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이 있다, 성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전에 한 번 이야기 했는데, 못 들으신 분을 위해서 또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첫째 날은 빛을 만드시고요, 두 번째 날에 만드신 게 하늘 이예요. 궁창인데, 재미있는 게 창세기 1장 6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물과 물, 하늘의 물과 땅의 물, 그러니까 땅도 물에 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이 바다는 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바다 깊이는 모르고, 결국 육지도 바다에 떠 있는, 결국 밑에도 물이고 위에도 물이예요.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이게 둘째 날 창조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물이 있었던 거예요. 물은 따로 만들지 않았는데, 원래 있었던 걸로 이 표현방법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물과 물을 나눴을 뿐이야, 하늘만 만들어, 궁창을, 물은 어디서 온 거야? 만들지도 않았는데, 이상하죠? 성서기자들은 그걸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어떤 보이는 세계의 직관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뿐이예요. 하여튼 물이 내린다고 하는 것, 등등.. 그런 것이 얼마나 놀라왔을까요? 자신들의 인식을 뛰어 넘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원당농가에 들어가려고 하는 중의 하나도 자연과 하늘의 별, 고대인들의 눈으로 좀 더 느끼며 살아보자, 그런 생각이 좀 있는데 모르겠습니다. 하늘은 그들의 비밀이고 신비였어요.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다, 하는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씀은 정말 우주 공간의 어디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신비의 세계, 생명의 신비 은폐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셨다,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성서기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신화적인 세계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더 근원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신화를 뚫고 들어가서 그들은 영적인 눈으로 자신들의 신앙경험을 표현했습니다. 하늘이 그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늘은 그들에게 신비지요.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했습니다. 그 하늘에 대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조금 더 알지만 궁극적으로 하늘을 사실은 모르지요. 얼마나 멀지, 하늘의 별들이 다 태양이라고 하는 것을 아실 거고요. 가장 가까운데 있는 별이 태양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아실거고요. 2~3광년이라고 하는데, 1광년이면 얼마나 멀까요? 까마득한데 얼마나 멀까요? 우주 전체가 135억년 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우주가 얼마나 커졌을 것이며 얼마나 멀리 갈 것이며 어떤 걸까요? 우주 저 하늘 한 공간에 지구와 같은 생명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을까요? 있다고 한다면 아마 우리보다 훨씬 문명이 발전했을 텐데요, 칼 세이건이라는 사람의 <코스모스>라는 책을 제가 신학교 학부 다닐 때 읽고 우주에 대한 새로운 경외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한 과학자들이 비춰주는 우주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생각이 도움이 많이 되지요.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낮과 밤도 그들에게 신비였어요. 낮을 주관하는 해와 밤을 주관하는 달도 신비였습니다. 얼마나 신비로웠겠어요, 우리는 그 신비를 다 놓치고 있어요. 신비라는 말도 이상하게 생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툭하면 신비, 신비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신비가 무얼까, 말이 안 되는 걸 신비라고 하는 걸까요? 신비하면 여러분들 어떻게 머리 속에 그려지세요? 신비가 뭐예요? 성서가 얘기할 때, 신비롭다, 불확실한 걸 신비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의 인식이 미숙하기 때문에 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한 하나님의 어떤 사건 이걸 우리가 신비라고 얘기합니다. 구원의 신비라고 하는 것도 그런 거예요. 그게 지금 다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 자체도 우리가 다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희미한 게 아니라 그건 하나님이 행하실 그 미래에 결정적인 구원에 대한 아직 미숙한 오늘 우리의 영적 시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개념을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비는 굉장히 합리적인 거예요. 그건 말도 되지 않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미래의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3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하늘은 무슨 소리가 없지요, 그러니까 시편 기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냐면 우주 현상이 인간의 인식과 언어를 뛰어 넘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궁극적인 것이니까요, 그것은 언어로 세울 수 없는 그러한 절대적인 세계를 그가 보고 있습니다. 전달이 되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릴께요. 신비, 절대적인 생명을 어렴풋이라도 우리가 느끼자고 하는 뜻으로 드리는 겁니다. 이게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이 지구에서 종말을 고한 뒤에 인류가 멸종할 때가 올거 아니예요, 다음 세대에 이 지구를 지배할 종, 생명체는 무얼까요? 그건 우리가 생각 할 수 있잖아요? 그럴 때가 오기 때문에 그 다음은 무얼까요? 지금 학자들이 얘기한 우주가 135억년 되었다고 하는데 그럼 그 전은 무엇일까요? 참 까마득한 이야기인데 그러니까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 세계, 우주, 하나님 창조 그것은 오늘 여기 시편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더 궁극적이다, 그런 생각들이 우리가 지금 먹고 살고 살기 좋게 사는데 무슨 직접적인 상관이 있냐, 아니냐 여러분들이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4절, 그러니까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는데, 들리는 소리도 없는데, 그러나 시인은 들어요. 놀랍지요? 아, 이게 부러운 거예요. 시인들의 이 영성, 아무도 들을 수 없는데 이 사람 귀에는 들려,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그렇게 노래를 하고 있네요. 그게 하늘이라고 하는 거지요. 하늘, 제가 참고한 시편 1절의 주석, 아투르 바이저가 쓴 건데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깊은 숙고를 통해서 각성하게 된 그 어떤 순간적인 종교적 열광주의로부터 생긴 관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인식이며 또한 자연에 대한 연구를 언제나 추구할 수 길을 배우기 위한 포괄적인 학습 요강이다.”신학자의 표현이 아주, 세계 대가지요? 이런 주석학자들은, 그 사람들의 표현이 아주 멋지지요. 정확하게 보고 있고요,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늘에 대한 이 시편기자의 이 묘사는 단순히 자연에 대한 깊은 숙고를 통해서 각성하게 된 그 어떤 순간적인 종교적 열광주의로부터 생긴 관념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래도록 축적된, 이스라엘 역사에서 축적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가장 심오한 인식이며 또한 자연에 대한 연구를 언제나 추구할 수 있는 길을 배우기 위한 포괄적인 학습 요강이다.”

 

성서기자들은 다 이런 역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거고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가 참여한 기독교 영성의 순례의 길에서 여러분들의 흔적이 나올 수도 있고요, 그게 모여서 기독교 전통이 세워지고 합니다. 단순한 순간적인 종교적 열광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면면히 내려온 하나님에 대한 깊은 숙고에서 나온 하나님 본질에 깊은 인식이다, 이렇게 말하면 되지요. 4절 후반절에서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해를 위해서 하늘에 장막을 치셨다고 노래합니다. 기자의 눈에 하늘이 그렇게 보인 거예요. 해는 계절을 따라서 일정한 길을 가잖아요? 그게 장막을 쳐 논 것처럼 보인 거지요. 그의 진술이 고대 자연주의 종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태양찬양, 많은 종교에서 이런 게 나타나는데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그는 태양을 찬양한 게 아니라 그걸 창조하신 하나님을 그는 주목하고 있습니다. 5절,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능력을, 이건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문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한 겁니다. 6절,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시편기자는 이 태양의 운행을 면밀히 살핀 사람입니다. 태양은 하늘을 전체적으로 지배합니다. 땅의 모든 것들은 태양빛과 열을 받고 지탱 될 수 있지요. 지구가 이 태양빛의 몇 %를 받는지 아세요? 수 십만분의 일정도를 받습니다. 그 태양에너지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지요. 아주 일부만 받으면서도 이 지구의 놀라운 생명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이 시편 19편을 노래한 신앙, 그리고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의안 요점, 이것만 잠깐 읽고 마치겠습니다.

 

“과학과 신앙은 어떤 관계인가, (과학은 자연에 대한 해명이니까요,) 과학과 신앙은 어떤 관계인가, 서로 대립하는가, 서로 조화하는가, 서로 관계없이 양립하는가, 이것은 성서와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성서는 과학문서는 아니지만 과학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아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 첫째, 자연과학에 대한 열린 태도를 취해야 된다. 왜냐하면 자연과 세상은 (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니까요.)하나님의 창조사건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요.)둘째, 하나님을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변증해야 된다.(신학을 자연과학적으로 할 수 없지요.그들과 과학적으로 논쟁하자고 하자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밝혀준 그런 세계를 그들이 말하고 있는 차원에서 신학적으로 변증해야 됩니다.)”시편기자들이 늘 이야기 하듯이 세상 모든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신앙이, 어떤 신앙이요, 세상 모든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고 하는 이러한 신앙고백이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도 변증해야 될 책임, 그런 사명,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걸 안 하면 도태되는 거지요. 예,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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