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편 강해-하나님의 현실성과 심판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뭇랍벤에 맞춘 노래〛

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11.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 도다

13.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 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 다

15.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 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

17.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 리로다

19.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 을 받게 하소서

20.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 (셀 라)

 

다윗이라고 하는 좋은 동산에 와서 우리가 1박2일 동안 수련회를 합니다. 예, 여러분들이 시간을 투자하셨고 회비도 냈지요. 간단한 게 아닌데 그렇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이 복잡하기도 하고 여러분들이 각자 이런 저런 직장일, 또 가정일 등등.. 바쁘신 데 시간을 내서 온다고 하는 게 간단하지 않아요. 교회 책임 있으니까 온다 그런 것도 가능하겠고, 교우들 만나서 친교 한다고 하는 것도 있을 거고요. 어쨌든 쉽지 않은 시간인데, 재미있게 보내는 일도 필요하지요. 아, 이런 저런 일들, 와서 그런 일들 생각했던 것들이 좋은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바라고요, 그래서 저는 강의를 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부담이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각자가 많은 것들을 투자하면서 올 만한 시간으로 내가 강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 이예요. 하여튼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요. 우리가 소위 이야기해서, 흔하게 이야기해서 성령이 인도하시기를 바란다,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뭐, 저도 그런 자세로 섰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준비를 한 것도 있고 또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도 있고요. 여러분들과 같이 이야기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있을 거고, 그런데 이런 것들이 딱딱 정확하게 맞아 돌아가지는 않아요. 어떤 사람에게는 거리가 좀 먼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와 닿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요. 준비가 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그런 아주 복잡한 상황 가운데서 내가 말을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사상을 전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지 않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좀 미묘해요. 여러분들도 신앙생활하면서 기도도 많이 드리고 하잖아요? 성령께서 인도해 달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과연 어떤 거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끼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가만히 있는데 뭐가 와서 우리를 갑자기 새롭게 하는 영적인 경험인가, 아니면 준비가 천천히 많이 된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시각이 열리는 것인가, 등등.. 그런 많은 생각들이 필요합니다.

 

핵심적인 건 이거지요. 모든 걸, 무엇을 전달하는 것 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하고 어떤 인식의 그런 건데 그게 사람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는 것은 필요한 이야기예요. 물론 거기서 강사가 준비도 해야 하고 듣는 사람들도 준비도 해야 됩니다마는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활동이시다.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면서 여러분들에게 오늘 시편을 세 번 강의할 거고요. 지금 하는 것은 시편 9편이고요, 그 다음에 18편, 19편, 그렇지요? 이렇게 세 번 강의하게 됩니다. 지금은 한 편만 하고 저녁 밥 먹고 나눠서 두 편 하게 됩니다. 내일은 교회력에 따라서 예배를 인도하게 될 겁니다. 일단, 제 1강, 제목을 한 번 보세요. 제목만 여러분들이 제목만 이해하셔도 강의는 다 전달된 겁니다. 사실은 제목이 중요해요. “하나님의 현실성과 심판”, 그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현실성과 심판, 굳이 영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리얼리티 거든요? Reality of God 여요. 하나님의 현실성, 하나님에 대한 문제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시나요? 경험이 사실은 가능할까요? 이게 우리의 영적인 딜레마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할 수 없어요.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이 불가능한데 그러나 하나님의 경험은 가능하다고 하는, 이게 서로 어긋나는 말 같은데 여기 안에 어떤 기독교 영성이 있습니다. 안 되는 건데 경험하는 것, ‘보이지 않는 현실성’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들이 이걸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없다고 하는 것, 하나님을 우리가 규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 그게 어떤 맥락인지를 생각하셔야 됩니다. 모세 이야기를 잠깐 할께요. 모세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이고요. 가장 위대한 사람이고요. 율법, 십계명 등등..이야기도 여러분들이 아실 거예요. 그 모세와 관련된 산, 아시지요? 하나는 호렙 산, 그 다음에 시내 산, 이 산은 똑 같은 산 이예요. 이름만 바뀌었지요? 이 산에서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거기 드라마틱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의 핵심이 뭐냐 하면은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탈출시키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요. 그 때 모세가 나는 무능하다, 말도 못한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가냐, 그런 이야기예요. 지나가는 말로 모세도 말을 잘 못했어요. 그래서 저도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바울도 사실은 말을 잘 못했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말을 잘 한 것 같지만 사도행전이 말하고 있는 바울은 정확한 바울이 아닙니다. 그건 바울을 변증하기 위한 한 세대 후에 바울의 어떤 제자가 쓴 거라서 이 바울을 좀 각색을 했어요. 그러니까 성서를 읽을 때 우리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게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정확하게 알려면 직접 쓴 편지를 봐야지요. 보통 우리가 논문 쓰고 할 때 primary source 하고 secondary source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primary가 바울이 직접 쓴 편지이고 secondary가 사도행전이나 이런 것들이거든요?

 

직접 쓴 편지가 중요한 데 거기 보면 말을 못하는 걸로 나와요. 이 모세가 그런 명령을 받고 하나님께 질문한 게 있지요. 당신 이름이 뭐냐, 나를 보낸 자가 누군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할 것이냐, 하고 물어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런 대답을 하셨어요. 이 단락에 대해서는 제가 설교시간에 한 적도 있을거고 <기독교가 뭐꼬?> 강의에서도 한 적이 있었고, 여러 번 말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대답, 나는 스스로 있다고 하는 대답이 이게 이해하기가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거예요. 아직 궁극적인 하나님의 통치, 이런 걸 경험한 이 모세가 하나님을 아직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자존하는 자이다, 대답을 했잖아요? 자존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이게 여러 가지로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성경에 의하면 “앞으로 있게 될 바로 그자다” 그런 뜻 이예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앞으로 있게 될 그자가 바로 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거예요. 보통 기독교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종말론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종말론적인 인식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마지막에 가서 다 드러납니다. 이런 게 말장난 같다, 생각되시는 분도 계실거고 어떤 걸 뚫어 볼 수 있는 분도 있을 겁니다. 모세가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말로 규정할 수 없는 분이 나를 보내셨다, 그렇게 자기가 깨달은 거예요. 그리고 출애굽 사건이 일어난 다음에 시내 산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까? 십계명 그런 걸 받은 다음에, 거기도 마지막 장면에 이렇게 나와요. 당신 영광을 좀 보여 주십시오.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호렙 산 전승에서는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더니 똑같은 인물인데 모세인데 시내 산 전승에서는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둘이 똑같은 이야기예요.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출애굽기에서 설명하셨는지 아시지요? 나를 볼 수 없다, 직접 볼 수 없다, 내 영광을 직접 볼 수 없다. 영광 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현현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내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 모세를 바위틈에 숨기시고 지나간 다음에 뒷모습만 보여 주셨다,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건 다 상징 이예요.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예요.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없어, 알 수 없어 규정할 수 없어, 여러분들이 자꾸만 하나님을 봤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거짓말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천당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여러분들이 거기에 관심을 갖지 마십시오.

 

그 분은 우리 인식으로 담아 낼 수 없고 알 수 없는 그런 어떤 뿐, 막연하다, 도대체, 그런 분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되냐, 확실해야 되지 않냐,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있어요. 예, 확실한 거 없으니까 너무 욕심내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은 어땠을까요? 하나님을 확신했을까요?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표현하기 쉽지 않은 건데 하나님,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나라, 제가 세 가지를 얘기했어요. 하나님,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의 나라, 이런 것들은 어때요? 혹은 하나님의 계시, 이런 용어들이 각각 다르지요. 그러나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통치로 존재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디 있고, 잘 생각하세요. 하나님이 어디 있고, 그 어떤 행위 하는 게 아니라 행위자체가, 통치가 하나님자체인 거예요. 그리고 계시 자체가 하나님 이신거고,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신하셨지요. 그대로 따라서 살았고, 선포하셨어요. 그런데 결국 그게 실패로 돌아갔어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은 결국 실패를 가리키는 건데 그러니까 거기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렇게 토로하셨잖아요? 그 말은 지금 내가 확신하고 했던 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그 모든 것이 말짱 헛것이 된 거 아니냐, 이 모든 것이 잘못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을 거기 담고 있습니다. 성서기자들이 참 정직한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을 더 미화하고 싶다면 그런 말은 다 빼야 되요. 그러나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도, 신학자들도 다 생각을 하는 건데, 마지막 죽을 때까지 예수님도 하나님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는 것 괜찮아요. 여러분들에게 확신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건데 그 분에게 맡기는 거지 결국 신앙은 우리가 많이 이해하고 하나님의 오묘한 것들을 깨달아 가지만 결국은 하나님에게 자기 운명을 맡기는 거든요?

 

하나님을 이 땅위에서 사는 동안 너무 확신하려고 하지 마라 그게 안 되니까 확신할 수 없어요. 기본적으로, 그래서 신자들이 억지로 자기가 자기 틀 안에 넣어서 확신하고 싶어 하거든요, 이거 기도했으니까 응답받았다, 계속 그 안에서, 그러니까 신앙이라기보다도 자기세뇌, 자기최면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에 떨어지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의심된다,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이 회의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좀 말씀이 옆으로 나갔습니다만 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거 우리가 규정할 수도 없고, 우리의 인식 안에 담아 낼 수도 없고 정말 우리들에게 자기 말씀을 하실텐데 그걸 기다리는 거죠. 오늘 제목이 그거 하나고요. 하나님의 현실성, 이게 많은 무게를 담고 있다, 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심판 이예요. 보통 심판이라고 하면 불을 유황불을 내려서 나쁜 놈들 제거하고 좋은 사람들 어떻게 하고 그렇게 하는데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구더기가 있는 곳, 그런 쪽으로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까?

 

고대인들이 생각했었던 신화적인 모습이고요. 심판은 뭐라고 말을 해야 될까요? 진리가 아닌 것과 진리인 것이 구분되는 어떤 사건, 하나님의 행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제목을 제가 잠깐 설명하겠습니다. 시편을 우리가 세 편 공부 할텐데 시편의 유형을 말씀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예요. 시편이 시예요. 그런데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예요. 하나는 탄원시 입니다. 탄원, 하나님께 자기의 억울한 일을 토로하는 거예요. 시편에 그런 거 많이 있지요. 시편이 전체 150편입니다. 그 중에 탄원에 속하는 게 있고, 다음은, 말씀해 보세요. 어떤 게 있을까요? 탄원이 있겠고, 상식적으로 말씀하시면 되요. 예, 감사가 있지요? 하나님께 감사, 또 뭐가 있을까요? 찬송, 찬양입니다. 탄원, 감사, 찬양이 있습니다. 또 뭐 있을까요? 축복과 저주 그런 유형이 있고요. 누굴 축복하고 누굴 저주하는 그런 게 있고요. 다섯 번째로는 약간 성격이 다른 데 지혜와 교훈 그런 겁니다.

 

다섯 가지요. 탄원, 감사, 찬양 그리고 축복과 저주, 지혜와 교훈 이렇게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편을 읽으며 이것이 탄원에 속하냐, 찬양에 속하냐, 지혜와 교훈이냐, 그런 걸 조금 구분해서 보시면 됩니다. 시편은 주로 유대인들이 제의, 제사의식 때 부른 찬송입니다. 우리가 찬양했잖아요? 예배드릴 때, 제사 드릴 때 시편을 통해서 찬양을 많이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렇게 다섯 가지로 나눕니다. 시편 9편은 여러분들이 강의안 보시면 아시겠지만 본래 10편과 한 묶음이었다고 그래요. 그걸 어떻게 아냐, 학자들이 연구하는 겁니다. 거기 네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70인 역과 그 70인 역에 근거한 여러 번역본들이 이 두 편, 9편과 10편을 하나로 묶는다고 그래요. 70인 역은 옛날 고대에 유대에서 팔레스틴에 살지 않고 아프리카라든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7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모여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번역한 것을 가리킵니다. 70명이 모였다고 해서 70인 역이라고 하고요.

 

히브리어 원전을 헬라어로 번역한 거예요. 중요한 구약성서입니다. 여기에 9편과 10편이 하나로 있어요.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누어 있고요. 두 번째는 이 두 시편에 비슷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세 번째는 이 두 편 9편과 10편에 똑 같이 아크로스틱(acrostic)구조라고 되어 있어요. 제가 잘 모르는 것이었는데, 이번에 주석을 보고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아크로스틱이라고 하는지, 애크로스틱이라고 하는지 그런 구조라고 그래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하나하나 가는 언어유희 비슷하게 하는 거지요. 그런 시편들이 많이 있는데, 시편 전체 중에 그런 것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9편과 10편에도 그런 흔적이 거기 있다고 합니다. 그건 우리말 성경으로는 찾아 낼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다윗동산, 다, 뭐, 윗 뭐, 이렇게 문장을 엮어가는 그러한 유형의 문학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10편에는 표제가 없어요. 시편에는 거의 표제가 있는데 없는 게 몇 개 있습니다.

 

9편에는 있는데 10편에는 없어요. 이게 원래는 하나였다는 흔적이 아니냐, 생각을 합니다. 예, 서론적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전체가 20절까지 있어요. 몇 가지로 좀 한 절 한 절 나눠봤습니다. 제가 시간 되는데 까지만 하겠어요. 무조건 길게 다 하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시편을 읽을 때 느낌이 오시나요? 제가 젊었을 때 신학생 때도 그렇고 읽어봐도 가슴에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젊은 목사였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기독교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내적인 어떤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만이 아니라 보통 내공이라고 할까, 그런 게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잖아요? 초등학생들이 괴테나 아니면 서정주나 아니면 횔덜린이나 이런 시를 읽어서 들어오겠어요? 아니잖아요? 교회 다녔다고 해서 그런 시편들이 읽혀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말씀을 읽으면 아주 은혜롭다고 하는데 거짓말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자기 암시가 많습니다. 자기가 아는 범위 안에서 은혜롭다고 하는 거지 정말 말씀을 알아서 은혜로운 건 아니거든요? 뭐 그래도 좋습니다. 각양각색으로 말씀을 이해하면 되니까, 그래도 가능하면 그 시편기자의 영성에 조금이라도 우리가 닿는 것이 좋지요. 그런데 시편기자의 영성과는 상관없이 은혜 받을 수 있어요. 어떻게 하는지 아시지요? QT류가 대게 다 그렇습니다.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오늘 내 삶에 어떻게 적용 시키냐, 아전인수로 이현령비현령으로 성서를 얼마든지 은혜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지만 은혜 중요하지 않다, 은혜는 어떤 것을 통해서도 가능한 거니까, 은혜 좀 내려놓고 하나님자체, 하나님 말씀 자체에 우리가 천착하자, 거기에 집중해 보자, 구원 받을까 안 받을까 그것 좀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의 행위, 거기에 좀 관심을 가져보자, 시편 읽으면서 사실, 제가 젊었을 때까지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언제부터인가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특별히 이 150편을 제가 몇 년 전에 동영상으로 녹화하기도 하고 그 다음에 그냥 엠피쓰리로 녹음해서 다비아에 올렸잖아요? 대구샘터교회에서 수요일 날 공부했던 겁니다. 꼼꼼하게 이 150편을 다 하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어요. 한 주에 한편이니까 150편 하려면, 그리고 여름에 두 달씩 쉬었고요. 4년 걸렸나, 상당히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이건 제가 신자들을 가르친다기보다도 내 스스로 정말 좋았고요. 이 시편을 150편까지 다 읽었으니까 그냥 읽은 게 아니라 주석도 다 보고 정말 마음을 갖고 읽었거든요. 다비아 보면 그걸 녹취 푼 게 있습니다. 박**집사님이 녹취 푸는 게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셔가지고 다 들어 있으니까 한번 읽어 보십시오. 우리 다비안 들 중에서 제가 강의한 걸 풀어주신 분들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인도에 계시는 사티야, 김현혁, 제일 처음에 시작했어요. <기독교가 뭐꼬?>가 책으로 된 거거든요.

 

저는 전혀 생각 없이 라이브로 했는데 그때 인터넷으로 라이브로 직접 강의 할 때 들어 보신 분, 한 번 손 들어 보세요. 아, 예 서너 분 계시네요. 목요일 저녁에 했나? 목요일 저녁하고 주일 저녁에 한 6개월에 걸쳐서 한 시간씩 꼬박꼬박 했습니다. 정말 열심히 잘 했습니다. 하늘에서 상급이 클 줄 믿습니다. 녹음, 녹화 전에 전혀 생각하지 않고 했는데, 김현혁 선교사께서, 인도는 인터넷 상황이 나쁘거든요. 끊기기도 하는데, 억지로 시작을 하셨어요. 그 뒤로 좋은 의견이다, 해서 서로 녹음을 해서 그것을 김현혁 선교사가 다 녹취를 풀어서 <기독교가 뭐꼬?>로 우리가 만들어서 서울샘터교회에서 다시 한 번 공부를 했고요. 지금은 그것을 ‘홍성사’에서 정식 책으로 내려고 편집을 하고 있습니다. 금년 종교개혁기념주일 전에 ‘홍성사’에서 나올 걸로 기대를 하고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그 때 샘터교회에서 사도신경 공부할 때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홍성사’에서 지난 봄에 연락이 왔어요. 무슨무슨 출판연합회에서 각 출판사에 책을 추천을 받아 가지고 그것을 시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홍성사’에서 금년에 출판할 책 중에서 <기독교가 뭐꼬?>이걸 자기들이 지원하겠다고 제 사인 받고 도장도 받아가고 했습니다. 출품을 했을거고요. 만약에 그게 당첨이 되면 저자에게 5백만원, 출판사에 5백만원 준다고 그렇게 하네요. 뭐, 출판사가 많으니까 어디 되겠습니까마는 어쨌든 ‘홍성사’에서 금년에 나온 책중에서 좋게 평가해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녹취 푸신 분들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처음했고, 그 다음에 사도신경해설 강의안도 했는데, 그것도 김현혁 선교사님이 다 푸셨고요. 그게 다 다비아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읽어 보실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시편 150편은 우리 박**집사님이 다 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 150편을 한 다음에 제가 영적으로 많이 자랐습니다. 아직도 많이 어리지만 많이 자랐어요. 그리고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는 감이 잡힌 거지요.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호흡이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공명, 싱크로나이즈 인가요? 이게 뭐냐 라고 하는 것을 조금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거예요.

 

목사님들에게 강의 갔을 때나 신학생들에게 특강 갔을 때도 하고 일반 공부시간에도 좀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하면 설교와 기도를 잘 할 수 있느냐, 그런 방법론을 자꾸 물어봐요. 방법론은 사실 없습니다. 그래도 최소한도 이건 필요하다, 목사나 아니면 교회지도자나 아니면 우리 일반 신자들이나 다 모두가 다 영적인 시인들이다, 시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되냐, 그건 방법론에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최소한도의 방법은 뭐예요? 가장, 최소한의 필수적인 방법은 좋은 시를 외우는 겁니다. 배우는 거예요. 좋은 시를 자꾸만 읽고, 그 시인들의 영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시인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시편 150편을 읽으면서 영성의 대가들 아니예요. 이 사람들이요? 예, 많이 공부를 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사는 자세가 뭐냐, 하는 것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1절 한번 누가 읽어 보십시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예, 감사를 하지요. 감사하고 기이한 일을 전한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감사한 이유는 기이한 일들을 느낄 때, 경험할 때 가능합니다. 기이한 일들, 이 기이한 일들이라고 하는 게 뭔지 잘 보십시오. 아주 고대시인이, 시편이 언제 기록되었을까요? 이게 기원전 약 4세기 5세기 정도 보시면 됩니다. 바벨론 포로 귀한 전후, 바벨론 포로가 기원전 587년이거든요? 귀환 후에 시편이 많이 작성됬는데 물론 그 전부터 내려 온 노래들도 있고요. 어쨌든 기원전 4세기, 5세기, 그 정도인데 그들이 이 기이한 일들이라고 말을 할 때 어떤 걸 생각했을까, 한 번 보십시오. 예, 그런 것들이야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하늘의 별,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일들, 등등.. 많은 것들인데 하여튼 이게 영성의 기초입니다.

 

성서적 영성의 기초는 하나님의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보는 거예요. 그리고 잘 생각하세요. 그 쪽으로 우리의 관심이 막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기이한 일, 신비로운 일, 우리가 그 쪽으로 가기가 힘든 게 우리가 먹고 살고 그런 일들이 급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 가지 인간적인 이해타산에만 걸린 문제들, 그렇습니다. 그건 뭐 우리가 그 안에 사니까 특별하게 그렇지 않은 사람 없는데요, 그런데 거기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들 앞에 바로 서는 것, 이게 감사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리고 기이한 일들을 기다리는 것, 기이한 일들 앞에서 놀라고 기이한 일들을 기다리는 것, 이게 기독교 영성의 토대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걸 제가 극적으로 전달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재주는 없고, 그래도 전달되지요. 기이한 일이라고 하는 것, 칼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가 <복음주의 신학입문>이라고 하는 책속에서 기독교 신학자의 영적 실존의 하나로 된 것이 바로 ‘놀람’이었어요. 놀람, 어떤 때 놀라시나요?

 

어떤 때 하나님이 놀랍다, 기이하시다 경험하시나요? 필요합니다. 그 다음 2절 읽어 보십시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예, 기쁨, 즐거움, 찬송 이런 것들이 거기 연달아 나오고 있지요. 이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영적태도입니다. 아마 이 한절만 가지고도 설교가 가능하겠지요? 약간 재주만 있으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설교하기는 너무 쉬워요. 사실 성경의 몇 가지 단어가지고 적당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리고 거기에 적당한 예화 들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이 그런 영성에 들어가 있느냐 하는 거거든요. 하여튼 우리가 2절만 가지고도 많은 설교가 가능하겠네요. 기쁨, 즐거움, 찬송, 주를 기뻐한다,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들이 다 아시는 이야기예요. 주를 기뻐하며,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그렇게 살고 있을까요? 기쁜 게 다른 게 더 많지요?

 

우리에게 관심이 많이 있잖아요? 하여튼 복권에 당첨되듯이 이런 저런 일들, 그런 것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기쁨, 자극 그런 것들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편기자는 주를 기뻐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무엇을 가지고 이 사람이 지금 주를 기뻐한다고 하겠습니까? 자기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주를 찬양하자 그런 건 아니었을텐데요. 그가 보고 있는 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주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지요. 예, 그건 강의안에 설명한 2절 끝 부분에 있습니다. 내면에 존재론적인 기쁨이 가득해야만 이게 가능합니다. 존재론적인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 의한 것들 아니고요. 존재하는 것 자체에 대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고요. 존재하지 않더라도 가능한 하나님과의 합일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게 과연 가능할까요? 이게 정말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가능할까요? 그게 가능해야 됩니다. 그리고 가능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해 드릴까요? 언제 우리가 삶을 판단할 때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제가 강의할 때 좀 막히는 이유는요, 뻔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내가 지금 또 반복해서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 때가 있어요. 그렇게 하지 말고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잘 할 수 있는데, 주일 학교 학생들한테 하듯이 해야 말하기가 더 편한데 자꾸만 머릿속으로 복잡해져서 그렇습니다. 그걸 감안하고 들으세요. 우리의 개인의 삶, 이런 걸 판단할 때 그림들이 있어요. 이렇게 저렇게 더 좋은 것, 많은 것, 편한 것, 조건들, 그리고 현대에는 백화점이라든지, 소비, 생산, 이런 것에 반복해서 살고요. 이런 저런 행복한 조건들이 많이 있잖습니까? 내가 저절로 끌리는 것 말이지요. 뭐, 그런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다 소중한 거거든요. 사실은요, 다 소중하다고 하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모든 게 똑 같이 존재론적인 무게를 가진, 똑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부자로 살든지 쉽게 이야기해서 아주 가난한 삶을 살든지 아주 건강하고 미모가 있는 사람으로 살든지 그렇지 않든지 이게 똑 같다고 하는 사실 속으로 우리가 깊이 들어갈 수 있냐, 이게 존재론적인 기쁨에 들어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시를 쓴 사람도 있어요. 기독교 시인 이예요. 나는 눈이 없다면 그래도 하나님께 찬양한다, 코가 있으니까,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까, 시각이 없으면 후각으로 세계와 소통하는 거거든요? 부자로 살지 않고 가난하게 살고, 그걸로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돼서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여기에 우리가 가게 되는 거지요. 이런 상태에서는 내면에 존재론적인 기쁨이 불가능한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것이 가능해요. 여러분, 정말 가능합니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거예요. 저도 개인적인 얘기 합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로 살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술가? 그런 것 하고 강의 다니고 하더라도 이게 재미있을 것 같지요?

 

이름도 좀, 네임벨류도 좀 생기고 하니까 좋을 것 같은데, 하나도 없어도 괜찮습니다. 지금 교회나 목회나 책 쓰기나 강의나 이런 것 하나도 하지 않고 조그만 골방에 들어앉아서 텃밭 가꾸고, 너무 낭만적인가? 하여튼 모든 관계가 끊어진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구요. 이건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그런게 끊어질수록 안식, 평화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관계가 끊어지는 거니까 가능한대로 우리가 관계를 끊는 방식으로 인생을 살면 좋습니다. 동양의 어른들도 다 도를 훈련하기 위해서 산속으로 들어간다거나 수도원으로 들어갔잖아요?? 그게 우스운 것 같지만 거기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해요. 제가, 하여튼 집에 있어야 되니까요. 그것도 다 소중한 거니까, 그러나 기본은 그렇습니다. 무덤에 들어갈 준비를 딱 하고 다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정말 안식이다. 그런데 허무하다고 염세적이냐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의 생명이 가능하니까 좀 그런 쪽으로 가야되지 않을까요? 내면에 존재론적인 길로 가야된다. 좀 넘어가서 7절과 8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예,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이 나쁜 놈들 다 때려 엎을테니까 기분 좋다, 그런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원수를 갚는것도 아니고요.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거죠. 하나님의 의, 이게 쉽지 않아요.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걸 우리가 다 해결하고 싶어 하는데 이 시인들은 하나님이 하신다. 만약에 우리가 그걸 정말 신뢰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영적인 평화가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럴때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축복도 하나님이 하시고 심판도 징벌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차원이 아니예요.

 

나쁜 놈들을 하나님이 다 해버린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 그럴 때 그 사람이 정의롭게 살 수 있고 그 때 용감할 수 있고 그 때 인내심이 가능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요. 그런 새로운 생명의 신비속에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시편기자들이 참 놀랍습니다. 9절로 넘어가면 여호와를 요새로 표현해요.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분인데, 이건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이런 성경 읽을 때 자꾸만 오해되는 부분이예요. 그래 그래 세상살이는 중요하지 않아 그냥 떠나고 어디 가야 되, 그 차원이 아닌 겁니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신비롭고 기이한 능력에 대한 고백이예요. 이게 정말, 잘 보십시오. 솔직하게 보셔야 되요.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우리가 가면 피해지나요? 안 피해질걸요? 여전히 배고프고 외롭고 쓸쓸하고 억울하고, 계속 그런 것만 남아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시인들은 어떻게 이런 찬송을 부를 수 있었을까? 어떤 것을 보았을까? 생각해 보세요. 이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자기 합리화도 아니고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우리 삶의 참된 평화가 가능한 어떤 사건, 그게 이제 여호와지요. 그게 하나님이지요. 비유적으로 얘기하자면 여러분들이 부도를 받는다거나 이혼을 한다거나 아니면 불치병이 걸린다거나 그런 어려운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각오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도 마찬가지고 우리 딸들에 대해서도요, 자식이니까 잘 되기를 바라는데 안 될 수도 있다, 생각을 합니다. 뭐 결혼하지 않고 살 수도 있고요. 그런 일들이 많이 있는데 나에게만 그런 일이 피하라는 것도 없고 우리 자식에게만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늘 그런 일들이 일어나니까요. 그건 억지로 막고 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그런 일들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좀 더 단절 됬을 때 그 때가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걸요?

 

그 어떤 힘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이예요. 시간이 좀 되어서 정리를 좀 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꼭 해야 될 말이 있었는데요, 예,15절과 16절 이것만 하고 정리하겠습니다. 15절, 16절, 이게 심판과 연관된 문제예요. 우리 다 같이 15절, 16절 읽어보겠습니다.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힉가욘과 셀라 나왔는데, 우리말로 하면 얼쑤, 부추김, 추임새 그런 단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16절과 16절에서 이 시인은 다시 한번 역사를 돌아보면서 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성찰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라도 반복해서 읽어 보시고 생각해 보셔야 되요. 저도 이 구절이 굉장히 인상깊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다고 할 때 당장 악이 파멸되고 그렇게 되는 걸 바라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악한 자가 잘 될 수도 있어요. 의로운 자가 고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억지로 되는 문제가 아니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늘 그러한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간도 더 많이 필요한 거고요. 오늘 이 15절 16절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악은 속성자체가 심판이고 파멸이라는 겁니다. 악 그 자체가 파멸이예요. 악 자체가, 놀라운 통찰이지요.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한 거예요.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악이 잘 못 되서 심판이 아니라 악 자체가 심판인 거예요.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된다, 말이 됩니다. 이건 맞는 이야기예요. 그런 영적인 시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제가 거기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죠? 전달이 되죠? 불의한 재물, 그 자체가 사람에게 파멸인 거예요. 기독교인들은, 성서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정의롭게 살아야 되는 건 당연한데 악을 봤을 때 왜 망하지 않나 너무 안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악을 통해서 잘 되는 걸 통해서 부러워 할 필요도 없고요. 악 자체가 파멸입니다. 그건, 예, 여러분 강의안 마지막 패라그래프 보십시오. “시편 9편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십자가 처형을 일삼는 이들을 심판하셨다. (이해가 되시지요? 심판을 자꾸만 망하는 것, 그 쪽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겉으로 망하는 것, 이게 아닌 거예요. 생명이 없는 것 자체가 심판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심판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 행위,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의 악이 무효화 된 게 부활 이예요. 하나님이 그 방식으로 심판하신 거예요. 하나님 없는 것 자체가 심판인 거예요.) 예수의 십자가에 연루된 이들은 결국 부활을 통해서 자기들의 의도가 무효가 된 거니까 심판 받은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통치다, 구원 통치다. 그 근거가 무엇인가?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마지막 질문에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제 1강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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