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월7일부터 4월8일까지 매주 수요일 대구샘터교회에서 진행된 히브리서 강의 녹음 파일을

김철(닉네임 문전옥답) 님이 녹취록으로 만들어서 다비아 동영상 메뉴에 올렸습니다.

모든 회원들이 볼 수 있도록 제가 매일 한 편씩 다른 메뉴로 옮겨놓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김철 님께 다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용섭-

 

성경 다 가지고 오셨습니까? 우리가 오늘부터 시작해서 히브리서를 공부하게 될 텐데 이게 전체 13장까지 있습니다. 한 주에 한 장씩 우리가 다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3주면 다 끝날 것 같아요. 이 히브리서는 조금 특이한 책입니다. 제가 마틴 루터 번역 성경을 가지고 왔어요. 조그만 글씨로 되어 있는데 주로 제가 설교 준비할 때라든지, 성경 본문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을 때 참고하는 책입니다. 이것을 살 때는 안경을 안 쓰고 다 보고 했습니다. 지금은 안경 써야만 하는 그러한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걸 왜 가져왔냐면 마틴 루터가 번역한 건데 성경 순서가 달라요. 예를 들자면 이 신약성경은 히브리서가 보통 빌레몬 다음에 나오는데 마틴 루터는 그 차례를 좀 바꿨습니다. 빌레몬 다음에 히브리서가 아니라 베드로전서, 후서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히브리서하고 야고보서를 뺐습니다. 그 순서에서. 뒤로 돌렸어요. 그거하고 히브리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이 네 권을 뒤로 돌렸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이게 사도 바울이라든지 어떤 복음의 진수, 여기서 약간 못 미친다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못 미친다고 하는 표현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고요. 그래도 사도 바울이 말하는 어떤 그리스도론, 칭의 이런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뒤로 돌렸어요. 그래서 지푸라기와 같은 거다, 나쁜 건 아닌데, 약간 어떤 부분에서 미치지 못한 부분이 했다는 생각을 마틴 루터가 했습니다. 그래서 그 순서가 다르다고 하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 마틴 루터의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제가 앞으로 히브리서를 공부할 때 참고할 주석서도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오토 리켈이라고 하는 독일 사람이에요. 제가 설교할 때도 보고 있는 성서주석, 국제성서주석의 43번째, 마흔 세 번째 책입니다. 굉장히 긴 전집으로 되어있어요. 이게 1984년도 괴팅겐이라는 곳에서 출판 됐습니다. 그게 우리나라말로 번역이 된 거죠. 이 책이 몇 쪽까지 있냐면 772쪽까지 있습니다. 굉장히 자세하게 나오고 있어요. 이런 책을 주석한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2천년동안 신학이 굉장히 많이 발전했고요. 특히 계몽주의 이후로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이 나오면서부터 훨씬 많이 연구가 됐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성경이 연구가 됐어요. 그거를 하나하나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거죠. 여기 있는 내용을 제가 이제 천천히 차례대로 따라서 읽어 가면서 참고적으로, 여기 있는 내용을 다 말씀드릴 필요는 없습니다만 전문적인 것이기 때문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혹시 보고 싶은 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빌려 드릴 테니까.

 

,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한 번 펴보세요. 히브리서가 1장부터 13장까지 있는데 일단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히브리서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생각이 있으신 분들 말씀 해 보시죠. 히브리서하면 어떤 생각이 난다 그런 게 있습니까? 여기에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죠? 아마 아실 거예요. 믿음에 대한 이야기요. 너무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거니까, 거기 중요한 거라서 한 번 볼까요? 11장입니다. 아마 이게 가장 유명한 구절이 아닐까 싶네요.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많이 들었던 거예요. 이 히브리서의 특징은 주로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예표적으로 많이 설명을 하는 거예요. 뭘 비교하죠. 천사, 제사장, 비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려는 그러한 성경입니다. 이게 이제 서신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서신이라기보다는 신학 논문이라고 분류하는 게 맞습니다. 누가 썼냐? 이것도 확실하게 드러난 게 없습니다. 모든 성경이 저자가 확실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이 히브리서가 사도 바울의 편지다 그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글 쓰는 방식이 다른 거구요. 그렇다고 해서 바울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학자들의 의견이 굉장히 분분합니다. 일단 본문을 좀 보죠. 분문을 우리가 11절부터 14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면 제가 읽고 차례대로 가면서 한절 씩 읽어 보시겠어요. 숫자가 다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가는데 까지만 읽겠습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그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6.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아멘. 어떻습니까? 읽어 가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나 문장이 눈에 띠나요? 보십시오. 전체적으로 기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요? 8절에 규라고 나와 있는데 무슨 뜻이지 아시는지요? , 지팡이 맞죠? 또 단어 중에서 혹시 잘 안 되는 것이 있습니까? 13절에 보면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나오죠? 발등상, 이 단어가 뭔지 아시나요? 발등이 아니라 발을 올려놓는 판, 이런 걸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등받이가 없이 판으로 되어 있는 것 있죠? 발을 올려놓는 어떤 납작한 상, 그런 것을 가리킵니다. 또 단어나 문장에서 애매한 것 있을까요? 이것의 신학적 이야기나 영적인 이야기는 둘째 치고, 그것은 우리가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그 중에서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이와 같습니다. 이게 직접적인 말이 아니라 메타포에요. 은유에요. 이것은 손가락과 같아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아서, 달은 안보이고 일단 손가락만 보입니다. 손가락을 통해서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달 쪽으로 가야되는데 그 작업이 사실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런 게 좀 어려운 점이고요. 또 하나를 본다면 시간적인 차이입니다. 2천년이라고 하는 것. 2천 년 전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다르잖아요? 그 차이를 우리가 어떻게 뛰어 넘을까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꾸준하게 연구를 했고요. 그리고 또, 그래도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고 그것이 공부가 가능하다고 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이게 꾸준하게 2천년 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서 텍스트를 안고 씨름했고 그것을 해석을 했고 전하고 해서요. 교회 전승 안에 흐름 속에 있어서 우리가 이것을 공부 하는데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게 한 점이 있고. 또 어떤 차원에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성령이죠, ,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그것을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에 이게 공부가 가능합니다.

 

14절까지 있는데 좀 보실까요? 한 절씩 제가 천천히 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설명 하겠습니다. 여러 분들이 미리 생각했던 것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또 비슷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집에서 읽고 어떤 뜻인가 미리 공부를 스스로 조금씩이라도 하고 오시면 되겠습니다. 1절 이렇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 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다짜고짜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데 관심 있는 게 아니에요. 선지자가 누군지는 아실 거고요.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다른 말로 예언자라고 얘기하고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사람들이에요. 구약에 종교적인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선지자고 또 하나는 제사장이겠죠. 서로 성격이 달라요. 자세한 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고, 어쨌든 제사장은 성전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번제나 여러 가지 제사 행위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이고요. 첫째 안정적으로 갈 수 밖에 없고요. , 이런 사람들하고 가까울 수밖에 없어요. 이것에 반해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야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수적인 게 아니라 개혁적이고, 이러한 양축을 중심으로 해서 유대교가 쭉 내려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는 일들이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하는 것인데, 그 행위를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하면 신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을 위임받아서 말씀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오라클(Oracle)이라고 영어로 써요. ORACLE라고 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라고 하는 것은 신탁을 받은 특별한 집단들, 오늘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그러한 학파, 하나님 말씀과 관계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을 1절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부터 히브리서의 어떤 성격이 드러나죠.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상당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바탕으로 놓고 얘기를 하는 거죠. 구약은 그런 면에서 참 중요합니다.

 

2절 보십시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마지막에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이미 앞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어요. 역사적으로 하신 거예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런데 종말론적으로는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두 개가 비교되죠? 앞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여기 2절에서는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은 역사적인 것이고요. 유대인의 역사들,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 역사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고 아들을 통해서는 뭐라고요? 어떻게? 종말론적으로, 마지막에 라고 하는 거예요.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자주 쓰시는 게 좋습니다. 이게 그냥 일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종말, 종말, 예수님의 재림, 마지막, 그런 얘기를 하는데 종말론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약간 낯설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억지로 우리가 학자들 흉내를 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좋은 단어는 알고 있는 게 좋고요. 아는 것뿐만 아니라 입에서 그것을 표현 하는 게 좋습니다. 언어라고 하는 게 특별한 힘이 있어서요. 그것을 자기가 다 모르고 서도, 말라도 자꾸만 하게 되면 어느 때인가 언어의 세계가 자기에게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뜻도 모르고 염불 외우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게 터무니없는 게 아닙니다. 염불을 통해서 어떤 세계에 들어가는 노력이니까요. 종말론적인 거예요. 두 가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하고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 두 개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도 아주 큰 주제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하는 그런 차원에서 간단하게 한 말씀만 드리면 이렇습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이라고 하는 뜻이에요. 역사적이라고 하는 것은 과정, 하나의 점진적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어떠한 일들이 전개해 나가는 것, 이런 방식으로, 왕이 정의롭게 통치를 해야 된다. 선지자들이 그런 것 많이 얘기하잖아요. 과부와 고아를 힘들게 하지 마라라든지 그런 것들이 이 사회가 점진적으로 괜찮아지는 그러한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종말론적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어떤 생명 사건이 완성된 그 차원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두 가지 종말론적인 아들의 말씀, 종말론적인 아들을 통한 종말론적 말씀, 아들을 통한 종말론적인 계시, 이렇게 바꿔서 얘기할 수도 있어요. 사실 히브리서가 전부 그걸 얘기 하려는 겁니다. 아들 예수 그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말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거를 이제 말하기 위해서 초장부터 이 히브리서 기자가 짚고 있습니다.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이미 여기서 어떤 창조에 대한 문제에 아들 예수가 참여한 것으로 설명이 되네요. 비슷한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도 나와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뭐 그런 거 있죠. 잠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등등. 그리고 요한복음 3절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마임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까지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있는 비슷한 차원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 금방 얘기한 게 전달이 됐습니까?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게 어떤 근거로 가능한지? 예수가 왜 창조의 근원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냥 교리적으로는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사셨던 그러한 분이고 창조된 다음에. 우리 오늘의 물리학적인 어떤 정보에 의하면 120억년 내지는 130억년 쭉 지난 다음에 아주 최근에 2천 년 전에 역사에 사셨는데 바로 그 분이 어떻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에 깊숙이 관여 했냐, 창조 사건의 근원이 됐냐 하는 거죠. 왜 그런지, 그건 여러 가지로 얘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각자 생각할 수 있는데 따라 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오늘 제가 그것까지 또 말을 하지는 않겠어요. 여러분들 머리가 복잡 해 지실 것 같으니까. 앞으로 공부하면서 이런 비슷한 얘기가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따라 가야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되잖아요. 그냥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런 걸 얘기해요. 내가 뭐 예수 믿고 죄 용서를 받았다라고 할 때 증거가 있습니까? 죄 용서 받았다는 게? 우리가 믿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으로 잘 와 닿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없이 우격다짐으로 가르치는데 그건 아닌 거예요. 거기에 충분한 근거들,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그런 것들은 이제 숨겨져 있다고 할까요? 그 안에 들어 있어요. 확 들어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이 그런 것들을 경험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다른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면,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 즐겁잖아요. 즐거운데 왜 즐거운지를 설명할 수 있으면 좋은 음악 감상에서 뛰어난 감상을 하는 겁니다. 설명을 하지 못해도 즐거울 수는 있어요. 그러나 왜 즐거운지 이게 화음이 어떻게 되고 그리고 어떤 주제고 어떻게 반복 돼가지고 우리들의 마음들, 감정, 어떻게 끌어가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좋은 음악 경험이 된다고 설명할 수 있으면, 그리고 알고 들으면 좋은 감상이 되는 거고 음악적인 어떤 힘들이 더 많아집니다. 신앙도 비슷합니다. 꾸준하게 가야죠.

 

3, 이는 이는은 뭘까요? ‘이는은 아들이죠. 어떻게 하나님이 아들이 있을까요? 아들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그리고 여기 보면 6절에 보면 맏아들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맏아들이 있다면 둘째 아들이 있다는 건가? 그래서 사이비 이단 교주들은 이런 근거를 가지고 나는 둘째 아들이다 이렇게 얘기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 계시 받았으니까 내가 몇 째 아들이다 얘기 하는데요. 왜 이런 아들 그리고 다른 데에는 맏아들 이렇게 표현하지 않고 독생자 외아들 많이 표현하지 않습니까? 외아들, 맏아들, 그냥 아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고 각각 나름대로 그 단어를 쓴 성서 기자의 어떤 영성이 거기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이 아니고 구약성서와 그 당시 신앙의 어떤 자료들, 그런 것을 바탕에 두고 그런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시오. 점점 더 어려운 단어가 나오네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마어마한 개념들이 여기 3절에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 말부터 시작해서 사실은 그렇습니다. 영광, 광채, 본체, 형상, 만물, 죄 정결, 높은 곳, 지극히 크신 이, 그 분의 우편, 이런 단어들이에요. 이런 것들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메타포에요. 시적인 언어에요.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혹은 개인이 이런 방식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어서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건 접어두고 단어 하나하나 우리가 다 지금 따라가기는 힘들고요. 한 가지만 봅시다. 우편이라고 하는 것. 우편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사도신경에도 나오죠. 다른데도 조금 몇 군데 나옵니다. 하나님에게 오른편이 있고 왼편이 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는 않죠. 하나님에게는 동서남북 이런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거는 전적인 타자에요. 바르트식으로 표현하면 전적인 타자,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모든 대상들, 이런 것들하고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사물을 만지고 있다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거하고는 전혀 다른 타자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는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많이 노력해서 머리가 좋아가지고 어디에 닿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을까요? 신학은 그걸 계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어떤 궁극적인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라, 사실 기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합니다만 우리가 생명이 뭔지를 다 모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냥 숨 쉬고 사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적인 생명, 근원적인 거, 그거 자체가 아닌 것처럼 우리가 어떤 지성적인 노력을 통해서 또 신학적인 노력을 통해서도 사실은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오신다, 자기를 드러내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여기 우편이라고 얘기 했는데 하나님에게는 오른편도 없고 왼편도 없어요. 무슨 얘길까요 이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고대 유대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그걸 전제하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구약 성서의 유대교를 아는 게 우리 기독교는 그게 모판으로 해서 나왔기 때문에 중요한 거예요.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우편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어떤 이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를 가진 분으로 계시다. 그걸 이제 말 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 말도 그냥 알고 있을 거예요. 조금 더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우편, 그래요,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 이렇게까지 우리 생각할 수 있는데 정말 그게 뭔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 하나님의 존재 자체, 그게 뭔지에 대해서 말이죠. 됐습니다.

 

그 다음 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천사 이야기가 나와요. 그게 1장에서 예수님을 표현하려고 하는 중요한 구약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5절부터 쭉 보면 14절까지 7번 정도 구약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대다수가 시편이고요. 그 다음에 사무엘하가 한군데 있나? 시편이 주로 나오는데 7번 정도 구약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5, 천사와 예수님이 비교가 될 수 있냐. 비교 될 수 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유대인들이 천사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아마 이 히브리서에 독자일겁니다. 그들을 위해서, 천사에 대한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더 잘 전하기 위해서 그걸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그 다음에 이제 두 가지가 인용됐어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시편 27절입니다. 그 다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사무엘하 714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얘기 했겠느냐 너희가 천사를 위대하게 생각하지만 천사에게는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거다 그 얘기입니다. 6,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맏아들, 외아들이라고 해도 좋고요. 바로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외아들하고 맏아들,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하나님과 성, 남자다, 여자다, 그런 생각을 뛰어 넘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성, 관계를 말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상도 아니고 아버지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성격도 하나님에게 많이 있는 거죠.

 

그런데 아버지라는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정말 우리 육체적인 아버지, 남자로서 아버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뭐라고 혹시 제가 언젠가 얘기 했는데 기억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아버지라는 표현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특별히 아빠 아버지라고 표현했잖아요. 진짜 우리의 아버지는 아니죠. 자신의 영혼까지 다 맡길 수 있는 그 대상, 그 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빠 아버지라고 얘기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 자체에 여러분들이 자꾸만 빠지면 안돼요. 하나님, 야훼, 엘로힘, 아빠 아버지, 뭐 이러한 단어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을 더 잘 표현하려고 했던 거지 이 안에 담기면 안돼요. 그걸 어려운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범주 안에다 끌어 들이면 안 됩니다. 범주라고 하면 카테고리를 말해요. 그러니까 아버지하면 아버지라는 범주가 있잖아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아내, 고체, 이런 것처럼 말이죠. 성서에는 그렇게 하나님을 표현하는 게 많이 있어요. 탕자와 이런 비유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고 또 무소불위하다는 그러한 거라든지 이런 것들도 범주, 속성이라는 겁니다. 거기 안에 하나님이 담기지 않으니까 하여튼 거기까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단어로 설명한 것이지 그 단어 안에 담기진 않습니다. 6절에서요.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그냥 오게 한다고 하지 않고 다시 들어오게 하신다고 했어요. 이게 뭘 가리킬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죠. 다시 오신다 그건 기독교 신앙에 기본 바탕에 있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 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비교가 되죠. 예수님은 아들로서 세상에 올 때 천사들이 경배를 해야 돼요. 비교의 대상이 아닌 거죠 사실은요. 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 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아들 예수에 대한 그러한 적극적인 평가를 지금 시편 456절 이하를 인용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0, 여기도 인용이죠. 시편 10225절입니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표현이 재미있네요.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셨으며, 이번 돌아오는 주일 제 설교 제목이 태초에 라는 건데 창세기 11절부터 5절까지 나오는 말씀이 교회력에 따라서 중진 성서 일과, 돌아오는 주일에 제목인데 제 1독서 구약 성경의 본문입니다. 태초인데 여기도 지금 태초가 나오네요. 오늘 이 구절이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태초에 땅에 기초를 두셨고 땅과 하늘 이게나오죠. 태초 할 때는 천지, 하늘과 땅, 온 세계를 가리켜요. 아주 어마어마하죠. 일단 그것을 여러분들이 고대인의 시각으로 천지를 보셔야 됩니다. 옛날에는, 구약성경 1장에도 나오지만, 하늘에도 물이 있고 땅에도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밑에도 물이고 하늘과 땅, 전체가 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창조할 때, 여러분들 기억을 하시겠습니다만, 제일 첫날 창조한 게 빛이었어요. 빛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고대인들의 생각이 거기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을 신으로 대다수가 섬겼어요. 이집트도 그렇고, 로마도 그렇고, 바벨론도 그렇고, 잉카 문명도 그렇고, 이 태양은 신입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 보면 창조한 게, 궁창, 하늘이에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하늘을, 궁창인데, 그것을 그냥 창조한 게 아니라 물과 물을 나눈 겁니다. 이 전체가 물이에요 이렇게 세계가. 그 당시에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것을 나눠가지고 하나는 위로 올라가고 하나는 밑으로 내려가게 해가지고 이 중간 이것을 갖다가 하늘이다, 궁창이다 그렇게 불렀다는 거죠. 그래서 물이라고 하는 것을 고대인들이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봤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헬라 철학자 탈레스도 만물의 본질이 물이라고 얘기 한 것도 그냥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와 있는 재미난 이야기는 제가 지난주일 저녁에 서울에 신학공부 창조론 공부 하면서 얘기 한 겁니다만 다시 반복되네요. 두 번째 날에 창조한 하늘과 궁창은 그 전에 이미 물이 있어, 그럼 물이 어디서 왔을까요? 일단 물을 창조하고 그 다음에 물과 물을 나눠가지고 하늘을 창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있는 걸로 전제가 되겠어요. 이 성경 창세기 앞부분에 보면. 그러니까 이게 논리적으로 약간 맞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물리학이나 이런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약간의 착오가 있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고대인들의 시각으로 하늘과 땅, 태초, 이런 것들을 생각하시라는 뜻으로 잠깐 옆으로 나가는 말씀을 드렸어요. 대단한 거죠. 하늘과 땅. 그런데 11절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게 이제 근동 지방의 종교하고 유대교하고 큰 차이에요. 태양 이런 것들을 정말 엄청난 에너지와 생명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슷했지만 유대인들은 그것도 피조물이라고 봅니다. 없어질 거로 봤거든요. 그걸 신성화 하지 않았습니다. 보기에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절대화하지는 않은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집트나 다른데서는 신으로 섬겼지만 유대교는 신이 아니고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으로 말합니다. 오늘 여기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거죠. 30분되기 전에 제가 정리를 하겠습니다. 11절에 보면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낡아진다. 어떻게 이러한 시각에 도달했을까요? 그 당시의 사람들이. 태양 같으면 정말 영원할 것처럼 보일 텐데요. 그 당시에 시각으로 봤을 때요. 오늘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양도 앞으로 45억년 있으면 없어지는 거니까 세계가 다 그런 것처럼. 현대 물리학이 나올수록 성서가 말하는 어떤 세계관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창조만 하더라도 무로부터 창조를 얘기하잖아요. 이게 현대 물리학에서 얘기하는 빅뱅하고 상당히 구도가 맞는 거예요.

 

12절도 그렇고요. 세계는 아무리 대단해도 없어 진다고 얘기를 하면서 이제 아들의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13절이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구절입니다. 인용한 부분 보겠습니다. 각주로 달아서 나왔습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발을 놓는 의자에, 의자가 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고요. 초기 기독교가 시편 1101, 많이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시편을 많이 인용했어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때는 굉장히 시편이 중요했습니다. 이 구절도 그와 같은 거예요. 보십시오. 그 구절 그냥 보십시오. 내가 네 원수로, 원수는 누굴까요? 네 원수, 네라고 할 때는, 내가 나는 이제 하나님이죠. 너의 원수라고 할 때 너는 오늘 히브리서 기자 입장에서 볼 때 아들 예수고요. 원수는 누굴까요? 예수의 구원을 막는 어떤 악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네 발판이 되기까지는, 이건 완전히 굴복한다는 뜻이죠. 발로 밟는다는 뜻이니까요. 그럴 때까지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이 말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예수님의 재림의 순간에는 이 세계에 예수님의 원수들, 생명과 적대적인 것들, 악한 세력들은 다 파괴되는, 다 정복되는 때다 그런 걸 우리가 알 수 있죠. 당연한 이야기죠. 우리가 알고 있던 바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곧 우리의 일반적인 말로 바꾸면 생명의 완성이에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하는 것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서 완성 된다 그러한 뜻입니다.

 

마지막 14절입니다.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아마 천사를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단들이 초기 기독교에 있었던 것 같아요. 뒤에 보면 또 나올지 모릅니다.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약간 다르게 가르치는 거예요. 같이 길을 가다가 약간 옆으로 샛길로 빠지는 것을 얘기 하거든요. 초기 기독교에도 이단들이 참 많았습니다. 지금만, 우리 한국 교회에 많은 게 아니라 원래 많았습니다. 그러한 신앙이 외곡 되거나 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는 위험 속에서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성서 기자들과 사도들과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한 거예요. 천사 숭배하는 자들을 향해서 아니다 천사들은 오히려 아들 예수를 섬겨야 될 영이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150107 히브리서 1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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