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8편 강해-여호와는 나의 힘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1.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3.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4.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5.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6.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7.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

8.그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입에서 불이 나와 사름이여 그 불에 숯이 피었도다

9.그가 또 하늘을 드리우시고 강림하시니 그의 발 아래는 어두캄캄하도다

10.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도다

11.그가 흑암을 그의 숨는 곳으로 삼으사 장막 같이 자기를 두르게 하심이여 곧 물의 흑암 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그리하시도다

12.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를 내시고 지존하신 이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을 내 리시도다

14.그의 화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그들을 깨뜨리셨도다

15.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말미암아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 도다

16.그가 높은 곳에서 손을 펴사 나를 붙잡아 주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17.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힘이 세기 때문이로다

18.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19.나를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나를 구원하셨도다

20,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21.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하게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22.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23.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24.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25.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 이시며

26.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 니

27.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0.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 패시로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32.이 하나님이 힘으로 내게 띠 띠우시며 내 길을 완전하게 하시며

33.나의 발을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34.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35.또 주께서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36.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

37.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가리니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돌아서지 아니하리이다

38.내가 그들을 쳐서 능히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리이다

39.주께서 나를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이 내게 굴복하게 하셨나이다

40.또 주께서 내 원수들에게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을 내가 끊어 버리게 하셨나이다

41.그들이 부르짖으나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아니하 셨나이다

42.내가 그들을 바람 앞에 티끌 같이 부숴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쏟아 버렸나이다

43.주께서 나를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여러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 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44.그들이 내 소문을 들은 즉시로 내게 청종함이여 이방인들이 내게 복종하리로다

45.이방 자손들이 쇠잔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46.여호와는 살아 계시니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47.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해 주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해 주시도다

48.주께서 나를 내 원수들에게서 구조하시니 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자들의 위에 나를 높이 드시고 나를 포악한 자에게서 건지시나이다

49.여호와여 이러므로 내가 이방 나라들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이다

50.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 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제가 며칠 전에 전화를 받았어요. 서울에 계신 어떤 장로님이세요. 일반적으로 장로가 당회를 구성하고 있지요. 당회중심으로 교회정치가 운영되고 장로, 혹은 주로 권사는 명예직에 가깝고 이 장로가 정치적인 그런 결정기구라서 실질적인 교회를 운영하는 멤버들이지요. 어쨌든 그 장로님이 기장에 계신 분이라고 하는데 제가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제가 1년 반 동안 서울 인문학적 성서읽기 설교공부모임이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 했어요. 그 때 꾸준하게 나오셨던 분입니다. 그분이 전화해서 저에게 하시는 이야기가 여태까지 제 책을 통해서 성경학교, 교회학교 장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학교가 있어요. 어떤 처치스쿨해서 보통 주일학교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국에는 어른까지 다 되고요. 지금도 원칙적으로 말하면 어른들 교회학교를 해야 되는 겁니다. 미국교회가 그런 전통이 있고, 유럽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장로님이 오랫동안 맡아서 하셨대요.

 

교회전통이 오래되 갖고 나이 드신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을 대상으로 당신 자신이 직접 강의안을 따로 쓰지는 않고 제 책을 통해서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뭐꼬?>도 했고 그리고 최근 몇 달 동안은 <주기도란 무엇인가?> 그 책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 분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준비를 해서 전하면 사람들이 너무 잘 받는다는 거예요. 잘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나이 드신 권사님들이 처음 들어봤다, 참 좋다, 그래서 호응이 좋았다고 하는 걸 이야기를 해요. 다 알아듣는 건 아니지만 이 장로님이 준비를 하기 위해서 여러 번 읽고 간다고 그래요. 하여튼 그걸 꾸준하게 공부를 했는데 다 마쳤다, 그래서 이 <주기도란 무엇인가?>를 한 번 더 할 것인가? 아니면 혹시 다른 추천할 만한 책 중에 당신이 쓰신 것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예, 그래서 두 권을 추천했습니다. 하나는 <빌립보서 강해>가 있고요. 또 하나는 <로마서 강해>가 있어요.

 

그것도 다 다비아 성경공부에 다 올라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대구성서아카데미 이름으로 출판을 해서 가까운 분들이 다 구입해서 보셨어요. 이런 것들도 다 제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신학, 성서, 그리고 인문학적 성서읽기 바탕에 썼으니까, 해보시라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하시는 이야기가 자기도 칠십이 넘으셨는데 칠 십 평생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하시더라구요.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한 게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상식적인 이야기,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 처음 들었다 하는 거예요. 다른 권사님들도 다 그렇게 느끼셔서 다 늦게 기독교를 새로 배우는 것 같다고 말씀을 하시네요. 저를 위해서 덕담을 하시는 걸까요? 진짜 그렇게 느끼셔서 하는 걸까요? 그러면서 그 분이 하시는 이야기가 교회에 사람들이 나오면서 하나님 중심 그것보다도 이번 주에 우리 식사 당번이 누구다, 교회봉사를 어떻게 해야 된다, 순전히 그것에만 관심을 가져서 교회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만 익숙해져 있다가 하나님 나라, 부활의 현실성, 왜 이 부활이 가야바나, 아니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총독에게는 보이지 않고 그리고 이스라엘 일반 민중들에게도 전혀 경험되지 않고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에게만 됬는가, 이런 질문들, 그리고 창조가 무로부터 되었다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등등..이런 이야기를 전혀 듣도 보도 못했다, 엉뚱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새롭다, 그러면서 새롭게 기독교 영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가 예, 고맙습니다. 그렇군요. 이러고 끊지 않았으면 더 하실 것 같았는데, 대충 정리를 해서 끊었습니다. 아주 좋으신 분이고 지금 일반 직장 은퇴하시고 시간도 넉넉하시고 연금 받으시면서 사시는 분이세요. 그러니까 어떤 신앙생활에 길들여지는 거지요. 좋은 뜻입니다. 그런 것도 좀 필요합니다. 늘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할 수는 없어서 따뜻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게 중심은 아니거든요. 예, 그런데 이게 저도 딜레마입니다. 저도 늘 종말, 하나님 나라, 칭의, 성화, 교회 본질인 단일성, 보편성, 등등..사도신경이 말하고 있는 그것, 그리고 불가시적 현실성, 등등..오고 있는 하나님 이런 것만 늘 생각하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교회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인간적인 친교도 필요한데 이게 조화가 잘 안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영적으로 살아 있으면서도 아주 구체적으로 생생한 그런 교회 공동체를 꾸려 갈 수 있을 것인가, 그게 하나의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이것저것 다 잘 할 수는 없고요. 저는 한가지로만 집중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회를 어떻게 잘 하냐, 그런 관심은, 관심은 있지요. 교회가 부흥하면 좋으니까 그러나 그런 건 제 능력 밖이고 그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에, 그 속에 좀 들어가 보자 그런 이야기입니다. ‘홍성사’에서 최근에 조그만 책자가 하나 나왔어요.

 

<왜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못할까?> 제목이 조금 이상하지요? 조그만 소책자예요. 두 달쯤 전에 ‘홍성사’에서 그걸 맡은 분이, 직원들이 많이 있거든요? 책을 다 맡아요. 편집하고, 광고까지, 뒤에 추천서까지 받고 이런 것 까지 다 해요. 번역이 파일로 다 되고 교정도 다 본 다음에 마지막 교정보기 직전에 책의 뒷 표지에다 추천 받을 사람에게 추천서 한 두 마디 받고 하는 게 있거든요. 제가 설교에 대해서, 제가 설교학 교수 아닙니다. 설교학 전공하지도 않았는데 한국의 출판사에서 설교에 관한 책들이 나올 때 저에게 추천서 써달고 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요. 다 쓰지는 못합니다만, 참 이상하지요? 설교도 잘 못하고 그러는데, 하여튼 그런 관계로 정용섭 목사, 그러면 설교, 이런 거 좀 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홍성사’에서도 그걸 저한테 요청해 왔어요.

 

<왜 우리 목사님은 설교를 못할까?>라고 하는 약간 자극적인 제목의 설교학 책이 있는데 읽어 보시고 목사님하고 코드가 맞는 것 같다, 그럼 추천서 하나 써 달라.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라고 하는 어디서 나왔는가요, 거기도 제가 책 뒷 표지 에다 썼거든요? 그런 식으로 좀 장엄하게 써 달라고 부탁을 한 거예요.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에는 이 책을 읽어 봤더니 마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9번인가요? 그거하고 베르디의 레퀘엠을 함께 듣는 거와 같은 느낌이 들더라, 그럴듯하게 썼더니 그게 맘에 드는가 봐요. 책을 만든 사람들은 그렇게 비슷하게 써 달라고 일단 보내 왔는데, 다른 이야기는 접고요. 그 책을 파일로 읽어 봤습니다. 아주 좋았어요. 짧은 책인데 괜찮습니다. 그 분이 암에 걸려서 암3기인가,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 생각, 신학대학교수이고 설교자로 활동하는 분이 정말 속에 있는 말을, 나이는 좀 들었지요. 젊은 목사, 신학생들에게 작심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설교에 대한 이야기를 쓴 겁니다.

 

짧아요. 글은, 맨 첫마디 앞에 나오는 것은 이렇습니다. 자기는 지금까지 많은 교회 가서 들어 봤는데 최소한도 설교답게 설교를 한 사람들이 15%도 안 되더라, 프로수는 제가 정확하게 기억 못하는데, 아주 작아요. 최소한도 논리적인 것, 논리성이 없더라, 이게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에베소서에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것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본문만 해 놓고 기도하자, 전도하자, 뭐 충성하자, 목사에게 순종하자, 뭐 그런 이야기만 하는 설교들이 태반이더라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서 그 분이 전공은 미디어 생태학 인가봐요. 신학교에서도 가르치는데 그런데 왜 현대 목사들이 성서텍스트를 읽는 능력이 떨어지냐 보니까 미디어의 역할이 크다는 겁니다. 거기에 어릴 때부터 계속 노출되어 있으니까 이 텍스트를 읽고 글쓰기 이 책읽기와 글쓰기가 전반적으로 근본적으로 되지 않더라,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성서텍스트를 읽으면서, 여기 설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거기서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 찾아내서 읽느냐 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요? 아까 장로님 이야기를 했지요? 그 신앙생활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있는데 사실은 어떤 봉사다 이런 것에 너무 우리의 관심이 흩어져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제2강 제목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저희 설교 제목을 쭉 보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를 끌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느 정도 될른지 모르지만 그게 핵심이기 때문에요. 그런 거예요. 그걸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케리그마적인 설교라고 하거든요? 케리그마, 예수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사건, 구원통치 그런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좀 다른 관심을 좀 내려놓고 하나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들, 그런 데 좀 관심을 갖자는 거지요.

 

제목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거예요. 18장 1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고 느끼시는지 말이지요. 실제적으로 그렇게 느낄 수도 있고요, 아니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정말 잘 알 수도 있고요. 아니면 아예 이런 걸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다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로 교회를 다닐 수도 있고요. 심지어는 뭐, 꽤 오랫동안 다니면서 축의금, 부조금 많으니까 내가 시집장가 갈 때 까지는 안 떠나, 두레공동체 비슷하게 여기서 상부상조하는 그런 분들도 사실은 많이 있습니다. 제가 무조건 매도하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으십시오. 이렇게 저렇게 여러분들이 다 생각이 있으실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힘이다. 이 제목을 생각해 보십시오. 힘을 어떻게 느끼는지, 이게 그렇게 아, 그렇다, 느끼면서 살면 될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느낄 수도 있고요. 사람은 신기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리석어서 억지로 믿으면 됩니다. 구타당하는 여자들 있잖아요? 그래도 남편밖에 없어, 제일 사랑해, 정기적으로 구타하지만 나를 끔찍하게 사랑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아, 기독교 신앙도 그렇게 가능한 거지요. 가끔 설교학 강의하러 갈 때 이렇게 질문한 분들이 있어요. 목사님들이 질문하는 거요. 정말 좋은 설교자가 누구냐, 베스트 설교자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설교비평하면서, 청파교회 김기석, 민영진 목사님 경동교회 박종호 목사님, 말씀을 드리면서 참고적으로 베스트가 아니라 워스트가 있다, 가장 나쁜 설교가 있다, 가장 나쁜 설교, 언제 한번 제가 얘기한 적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정필도 목사님 설교, 저는 이런 것은 우리 영성을 죽인다고 생각하고요. 연세중앙교회 윤석준 목사님 설교, 이건 정말 심각하게 문제가 있습니다. 이단에 가깝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 복음이라기보다도 우리 심리를 아주 가학적으로 억압하는 거거든요. 사람은 아시지요? 자기를 학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게 사람이거든요. 아주 왜곡된 영성인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든지 자기최면, 쇄뇌 방식에 믿으면 가능합니다. 제가 앞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은혜 받는다, 믿음 있다, 이런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편안하게 생각하시고 성서가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들에게 해명하고 있는지, 조금 더 정확하게 그들도 다 몰라요. 성서기자들도 여러분들이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이렇게 가리키고 있는 겁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성서는 아무리 읽어도 하나님이 거기 없어요. 어떤 분들은 성경을 많이 읽으면 하나님이 보이더라, 얘기하는데 그것은 조금 잘 못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왜 믿음이 없냐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내버려 두시고요, 천천히 성서의 세계로 한 발짝 한 발짝 들어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어떻게 들어 갈 수 있느냐, 텍스트의 세계로, 제가 아까 예로 든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에서 최소한도로 글 읽기와 글쓰기가 안 되는 교회지도자들이 오늘 미디어의 영향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잘 안되거든요. 어떻게 되느냐, 앞 시간에는 제가 영적인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시를 읽고 배우고 외워야 되는 거라고 했습니다. 일단 좋은 시를 해야 되요,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면 바둑을 예로 든 거예요. 일단 정석을 배워야 됩니다. 여기 바둑 두시는 분들 있지요? 그런데 바둑 1급 정도 두시는 분 있어요? 아니면 1단 있으세요? 바둑 두실 수 있는 분 손 들어 보세요. 아니 정말 길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 예 최소한도 1급, 2급, 아니면 단 정도 되어야 되거든요? 아마추어로요. 없으세요? 제가 인터넷 바둑으로 2단입니다. 길을 좀 알지요. 테니스 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아, 우리 두 분은 같이 해 봤으니까 실력을 알고, 제가 아마추어로 테니스 동호회 가서 꿀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여기 증인이 있어요. 그렇지요?

 

바둑, 테니스 이런 것 잡기 이런 것, 목회보다도 이런 것에 열심이네요. 목회는 나중에 다 해도 되는데, 테니스 같은 것들은 젊었을 때 안 해 놓으면 못합니다. 젊었을 때 정말 잘했다, 목회 좀 게을리 하고. 바둑을 잘 하려면 정석을 배워야 되어요. 허점정석, 외목정석, 정석들이 다 있습니다. 정석들이 하나만 아니라 여러 개 있고요, 계속 변해요. 최소한도 바둑을 잘 하려면 바둑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성서텍스트는 바둑의 기보예요. 아시겠어요? 기보, 프로바둑기사의 놓은 것을 그대로 풀어놓은 것이 기보라고 하거든요. 바둑, 기보(棋譜)요, 꼭 악보하고 같습니다. 그 기보를 이해하려면 정석을 알아야 해요. 성서기보를 알아야 하려면 신학을 공부하는 수 밖 에 없습니다. 최선 이예요. 신학, 신학이 없으면 성서는 읽히지 않습니다. 정석 모르고 여러분들이 기보 읽을 수 있어? 흑백 돌이 이렇게 저렇게 엉켜 있는 거 알 수 있겠어요? 이세돌이라는 사람이 가로 딱 한 점을 놓으면, 놓기 위해서 수 십 가지의 변화, 바리에이션을 생각했다고 하는 것 상상이 갑니까? 있는 거예요.

 

그 점 하나에 수 십 가지가 숨어 있어요. 성서텍스트가 꼭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이 잘 전달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바둑을 안 보는 사람들은 기보를 봐야, 흑과 백돌이 엉켜 이상하다. 그런 정도만 보는 거예요. 수가 깊을수록, 이세돌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신학 이예요. 신학이 최선입니다. 평신도가 어떻게 신학을 할 수 있냐, 신학교 가야 되냐, 그렇지 않습니다. 신학교 가지 않더라도 신학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게 필요한 거지요. 그런데 이게 꼭 바르트가 이야기하고 조직신학이 어떻고 꼭 꼼꼼히 배워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배우면 더 좋고요. 그럼 전문가가 되는 거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대구성서아카데미가 추구하고 있는 인문학적인 소양 그것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럼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고 하는 것, 어떻게 해서 내가 여호와를 나의 힘이라고 느끼냐 하는 거지요.

 

이 본문을 우리가 천천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이렇게 느낄 수 있다면 그런 것이 우리 영성에 자리 잡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다르게 살 걸요? 우리의 내공, 삶의 내공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아까도 잠깐 얘기했는데, 우리 딸들이 이런 세계로 빨리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잘 안 되요.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책을 읽으라고 해도 잘 안 읽고요, 시대가 그런 것 같습니다. 목사후보생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게 세계관이거든요? 금방 형성 되지가 않습니다. 헝클어진 세계관에 계속 접촉하게 되면 거기에 물들게 되는데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의식을 계속 지배하게 되고 그게 무의식이 되 버리고 나중엔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고칠 수가 없어요. 그건, 신앙도 마찬가지고, 그 쪽으로 이미 형성 되어 버리면, 패라다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딱 굳어 버리는 거예요. 가끔 그런 이야기하지요. 가까운 목사님들하고 이야기 할 때 지금 농촌에 들어가고 싶어도 사정 때문에 못하고 나중에 늙어서 은퇴하면 들어가겠다. 은퇴해도 못 들어갑니다.

 

젊었을 때 그런 준비되지 않으면 그런 삶을 받아 낼 수가 없는 거거든요? 패라다임이 딱 굳어 버리면 잘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이게 얼마나 심각한지 여러분들이 이런 얘길 들어보시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지동설이 처음 나왔을 때 루터나 이런 종교개혁자들이 그걸 다 반대했습니다. 과학적으로 다 드러난 건데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는 엄청난 거인인데 그런 분들마저도 이 지동설을 이상하게 본 거예요. 그러니까 한쪽으로 천동설이라고 하는 것이 굳어져 버린 겁니다. 이게요, 그래도 나중에 정확하게 배우면 되지, 안됩니다.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그래서 정말 중요합니다. 시편 18편은 표제에 나와 있는데, 다윗의 노래라고 해요. 다윗의 노래, 이 다윗이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벗어났을 때 부른 노래라고 했습니다.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왜 사울이 들어갔을까요? 사울과 경쟁했거든요? 사울과 다윗의 관계도 인문학적으로 여러분들이 좀 생각해 보면 재미있어요.

 

성서기자들은 사울을 못된 놈, 못된 왕으로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결국은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거든요. 구약은 다윗왕조의 입장에서 기록한 거예요. 다윗 왕조와 반대되는 것은 나쁘게 얘기할 수 밖 에 없습니다. 다윗왕조를 세우는 것은 물론 억지로 하지는 않지만 상당히 편파적이라고까지 얘기할 것 까진 없지만, 상당히 다윗 왕조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에 이 사울이 좀 이상한 왕으로 많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왕조의 시작인 다윗이 부른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강의안을 보십시오. “고대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왕조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 노래로 표현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좀 맘에 들지 않지요. 그런데 이건 그 당시로 봐야 합니다. 그 당시로요, 다윗왕조와 자신들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왕조의 어떤 특성들이지요.

 

지금 북한의 김정은 청년이지요? 20대 후반이니까, 김일성 왕조거든요? 정서적으로는 이 씨 왕조분위기가 거기는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겁니다. 만약에 우리처럼 김일성 다음에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그 나라는 허물어져요. 그럴 수 밖 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김정은 체제라고 하는 것은 북한체제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옳다, 그르다 말하기에는 좀 곤란하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그래도 민주주의 해야지,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인권이야기 해야지,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북한 문제는 여기서 더 하지 않고요, 지나가겠습니다. 괜히 북한 문제 나와서 바깥으로 나가서, 좀 연민이 느껴져서 그런 거예요. 다윗왕조와 자신들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왕조의 역사를 배경으로 삼는 시편이긴 하지만 그 내면에는 여호와를 향한 참된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기독교인들도 이런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읽는 거지요. 앞 시간에 제가 잠깐 설명을 했지요? 기독교인들이 왜 구약성서를 받아 드릴까?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합니다. 서울샘터교회 강의시간에 없어서,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다시 반복되더라도 이해하십시오. 구약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정한 게 아니예요. 아시지요? 유대인들이 정한 거예요. 얌니야 회의 때 랍비들이 모여서 정한 거예요. 그게 기원후 90년입니다. 그 이전에는 구약성경, 경전이 없었어요. 여러 가지 문서들이 많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다 정리가 되었습니다마는, 완전히 39권이라고 하는 구약성경은 얌니야 회의 때 결정된 거예요. 예수님 때도 그것이 결정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얌니야회의 때 느닷없이 그걸 결정했냐, 여러 가지 배경들이 있습니다. 그건 기원후 70년이라고 하면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함락된 해거든요, 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참 역사라고 하는 게 교묘하지요? 참 이상하지요? 만약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기독교가 탄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요. 역사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어쨌든 그 상황이 뭐냐, 여러분들이 아시고 싶으시면 제가 추천도서에도 써 놨는데, <초기기독교영성>을 읽어 보시면 될 겁니다. 기독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이건 우여곡절 주변의 많은 정치, 종교, 사회적인 맥락이 이렇게 저렇게 꿈뜰 꿈뜰 대면서 그런 와중에 아주 고유한 하나의 종교가 싹이 터서 나왔고 처음에 기독교가 한 줄기도 아니고 굉장히 복잡한 상태에서 어떤 사건들이 개입하면서 되었다, 참 신비롭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도 기독교가 당장 받아 드린 게 아니고 397년에 이르러서야 받아드려졌습니다. 그게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시작했으면 신약성경까지 포함해서 27권 딱 딱 결정하지 왜 결정하지 않고 있다가 자꾸만 뒤로 미루다가 4세기 후반에 돼서야 경전으로 인정 했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없다. 틀림이 없다라든지 성경을 초기기독교인들이 처음부터 잘 읽었다든지 그건 좀 오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성경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어요. 자체가, 바울이 자기가 성경 쓴다고 썼겠습니까, 그냥 편지 쓴 거거든요. 복음서를 쓴 사람들이 이건 성경이다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이 죽으니까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죽으니까 자기 후배들에게, 후손들에게 예수님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또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있으니까, 정말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어요. 초기 기독교에 영웅이 있으면 영웅에 얽힌 이상한 이야기가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아이로 묘사한 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기독교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 후손들에게 예수님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복음서도 썼고 그러니까 성경을 쓴다는 생각 없이 한 것인데 4세기 후반에 결정되었습니다.

 

왜 구약을 읽어야 될까? 앞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구약성경이 예수그리스도를 소급의 방식으로 조금 혹은, 더 신학적인 표현으로 뭘까요? 소극적인 걸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많이 들었지요? 선취의 방식으로, 그걸 선취라고 하는 개념을 잘 생각해 보세요. 이건 꼭 신학적인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좀 생각하기는 가능한 겁니다. 미래사건이 오는 거거든요.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요? 예, 어쨌든 오늘 우리가 이런 모임을 갖지 않았습니까,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오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5년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5년전에 다비아 들어오신 분도 계실텐데, 그 전으로 돌아가서 십년전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10년전의 여러분과 지금 같이 공부하는 여러분 사이에 뭐가 있겠어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공백이예요? 아니거든요?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코이노니아를 나누는 어떤 사건이 10년전의 여러분의 그 삶의 자리로 소급, 혹은 선취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미치고 있다, 그래서 온 거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요.

 

가능할까요? 아닐까요? 우리 신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섭리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섭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다. 결정됬다, 참 신앙적인 용어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오해하기가 쉬운데, 섭리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정된 건 아니야, 결정론은 아니야, 그러나 큰 틀에서 이미 준비된거야, 결정된건 아닌데 준비된 어떤 하나님의 뜻, 10년 후 100년후도 이미 섭리가 되어 있어요. 그러나 거기로 나갈 가능성은 여러갈래가 있는데, 그게 이루어졌을 때를 가리켜서 섭리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 서울샘터교회동체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10년후, 아니면 50년후 100년 후에도 우리 후손들에게 이러한 공동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갈까요? 아니면 흐지부지 되고 다르게 될까요? 그건 여러 가지 선택, 갈래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그 중의 하나가 선택되서 나갈텐데, 우리는 그걸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고 그걸 미리 깨닫고 결단을 하고 힘을 모으고 하면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지요.

 

그게 어떻게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나, 그건 사실 다 모릅니다. 참 그게 어려운 문제예요. 구약의 예언자들이 많이 있잖아요? 다 각각 하나님으로부터 무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서로 충돌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 몇 사람, 선택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거든요? 최선은 이겁니다. 제가 말씀 전하는것도 백 프로 옳은 게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감안하고 들으세, 그러니까 모험이예요. 말씀을 전하다고 하는 것은 틀릴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전하는 거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해 달라고 하는 성령에 의지하면서 모험식으로 하는 겁니다. 어쩌면 제가 설교비평한 워스트라고 얘기한 윤석전목사님 그런 분이 맞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틀릴지도 모릅니다. 아닐까요? 어쨌든 제가 예를 들어 말씀 드리는 겁니다. 모험이다. 어쩌면 궁극적으로 우리 신앙 자체가 모험입니다. 던지는 거지요. 배팅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 것을 던지는 거지요. 예수그리스도에게 내 미래를 맡기는 거니까요. 그러나 그 때까지 로또 뽑듯이 아무 근거도 없이가 아니라 수천년 동안 축적된 기독교영성이 있으니까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예수에게 맡긴다. 저도 그것 뿐입니다. 더 확실한 건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전혀 우리가 알수 없는 문제고요. 예수의 운명과 내가 하나 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만 모든 걸 맡긴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간다고 한다는 말은 정확한 게 아니예요. 가서 우리 가족들 만나서 오순도순, 그거 아니예요. 질적으로 다른 생명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장가가고 시집가는 거 아니다 먹고 자는 것 아니다, 그 나라는, 바울도 그 비슷한 얘기했고요. 전적인 하나님 통치예요. 서울샘터교회 공부시간에 언뜻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그 나라에 가면 우리가 모두 물로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바위로 있을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제가 표현 한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그게 행복한 거예요. 그게 영생인 거예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연장된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질적으로 다른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모험이다, 우리는 영적인 모험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정말 우리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왔던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죽음과 죽음이후 까지 모든 걸 다 맡기는 겁니다. 그럴만하다고 생각합니다. 18편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요.1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고 2부는 왕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부만 오늘 봅니다. 오늘 강의는 1부하고 잠깐 쉬었다 하겠습니다. 아직 쉴 시간이 아니니까 조금 기다려 주세요. 1절, 2절, 들어가는 찬송입니다. 누가 한 번 읽어 주세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예, 놀라운 문학적인 표현들입니다. 반석, 요새, 바위, 방패, 구원의 산성, 이렇게 우리가 노래 할 수 있다면 우리 영적인 심층으로부터 정말 살아있는 언어로부터 이런 살아 있는 것이 나올 수 있다면 뭐가 더 필요할까요? 그러니까 이거는 이거예요. 꼼꼼히 생각해 보세요. 하여튼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하여튼 누가 생각하는 민족이 산다 이야기 했어요? 그럴 듯한데 성서도 생각을 해야 하거든요. <시>라고 하는 영화 있지요? 거기서 김용택 시인이 나와서 재미있게 표현해요. 시인이 되는 건 다른 것 없다, 사과 하나 보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봐라, 정말 봐라, 이건 먹는 다는 생각으로 맛있다,

 

그것만 보지 말고 이 사과가 맺히기 위해서 뜨거운 여름철, 태양과 어떤 사랑을 나눴을 것이며 붉게 물 들 때 벌레들하고 어떤 대화들을 했을 것이며 이슬하고 어땠을 것이며 이 색깔과 우주와의 관계, 그런 걸 깊이 생각하고 글로 표현하면, 글로 쓰면 시가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나 그냥은 안 보여요. 정신을 우리가 다른 데 쏟기 때문에 먹고 그냥 재미있게 하는 것뿐이지 사과를, 제가 자주 쓰는 말인데 존재론적으로 바라보진 않습니다. 그게 우주와 같다고 하는 걸 보지 못 하는 거예요. 우리가 성찬 예식 할 때, 빵 하나, 포도주 하나, 거기 있다고 하는 것, 없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 그게 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우주의 힘이 거기에 작동했는지를 깨닫고 한다면 다른 것들은 사소해 지는 거예요. 사실은, 다른 것은요, 직장에서 연봉 조금 적게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우리의 삶을 그렇게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게 이 시편기자 모든 게 잘되니까 그런 이야기 한 거 아닙니다. 정말 힘들은 거예요. 그리고 여기 핵심은 다른 데를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는 걸 전제하는 겁니다. 다윗 왕이었어요. 군사력도 의지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거지요. 이 세계에 있는 여러 가지 구조, 힘, 등등 우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열거하면 다 아시겠지요? 의지하는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 것, 아, 그럼 세상 무슨 재미로 사냐,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까요? 그냥 세상살이는 재미로 느끼며 사시면 됩니다. 거기에 치우치지 않고 해야 되겠지요? 정말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지요. 그걸 우리가 알고 있느냐, 그리고 느끼냐가 참 중요한 것 같은데요. 그 다음에 7절에서 15절로 넘어 가겠습니다. 여기에, 기니까 읽지 마지고 두 번째는 3절에서 6절까지 고통과 간구고요, 넘어가고, 7절에서 15절은 현현 이예요. 7절에서 15절까지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시는가에 대한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강의안에서 그 대목을 읽어 보겠어요. 고통과 구원을 언급한 시편기자는 이제 하나님의 현현을 언급한다, 당연하다. 구원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다, 묘사방식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에 근거했다, 시내산의 현현과 비슷하다, 땅의 진동, 연기, 불, 하늘을 드리움, 빽빽한 구름, 이건 화산폭발과 같은 거지요. 고대인들은 신의 현현의 한 증거로 보았습니다. 구름, 광채, 우박, 숯불, 우레소리, 오늘 우리는 이런 것들이 자연현상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시편기자들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묘사한 겁니다. 그럼 자연현상을 본 것뿐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못 본 것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렇게 묘사 될 수 없어요. 그러나 그 당시에 고대인들이 최고의 위협적인 것, 가장 신비롭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통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세계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요. 화산폭발 같은 거 자체가 하나님의 현현으로 보면 안 되지요.

 

그건 고대인들의 신화적인 세계이니까.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신비는 놓치지 말아야지요. 그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 신비를 보겠냐, 오늘의 방식은 달라져야 합니다. 뭐예요? 어떤 거예요? 각각 다르겠지요. 그건,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마이너리티의 삶에 참여하고 거기서 그들의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서로 연대해 나가는 그런 삶들,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우주를 더 볼 수 있고요. 예,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거였습니다. 16절에서 19절, 이 시편기자가 다시 여기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구원, 거기 반복되는 단어들이 있어요. 붙잡아 주시고, 건져내주시고, 의지가 되시고, 의지가 되게 하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고 이런 표현들이 열거됩니다. 우리 왕, 다윗왕을 그렇게 했다고 하는 거지요. 여기서 핵심은 다윗 왕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보다도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여기 초점이 있어요. 20절에서 24절에는 왕의 의로움이 나와요, 다윗왕이 늘 의로웠습니까? 다윗왕도 똑같은 사람이었어요. 제가 압살롬과 다윗왕이라고 하는 설교하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그에게도 문제가 많았고요, 평범한 왕이었어요. 아니 평범한 왕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뛰어난 왕이긴 한데, 그러나 고대왕들이 갖고 있었던 속성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요. 왕의 의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다윗 왕이 정말 의로웠기 때문이라기보다도 그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의를 인정하신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라, 거기에 핵심입니다. 사람의 의를 인정하신 하나님의 신뢰가 여기 있는 거예요. 참 중요한 이야기지요. 결국은 하나님인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신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의롭게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인간의 정의로움은 어떻게 조금 약합니다. 때에 따라서 달라져요.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하는 신뢰, 여기로부터 참된 정의로움이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25절에서 30절입니다. 여기서는 기도가 단순히 간구만이 아니라 고백이라고 하는 사실이 나오지요. 여기서 시편기자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기도할 때 주십시오. 택하십시오. 그렇게만 이야기하지 말고 이런 부분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다. 이게 신앙고백이거든요? 그것도 기도이고 찬송입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세상에 비밀스럽게 일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25절에서 27절 이예요. 참 중요한 부분인데, 생각을 해 보십시오. 비밀스럽다고 하는 것, 이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요술, 마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생명의 근원을 보는 거지요. 자비로운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나타내신다고 하는 사실은 비밀입니다.

 

 

지금 자비로운 사람은 욕만 얻어먹어요. 바보취급당할 수 있고요. 손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자비로우심을 나타낸다, 그게 비밀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신뢰하는 자입니다. 그걸 신뢰하는 사람에게 주의 자비가 또 나타나지요. 그게 하나고요. 다른 하나는 감사와 확신을 고백하는 겁니다. 28절에서 30절입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그의 말씀은 순수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피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분은 방패십니다. 그렇게 자기의 감사와 확신을 여기서 고백하는 거지요. 그에게 피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방패다, 막아주시는 분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참된 의미에서 힘이다고 하는 겁니다. 전달되겠지요? 힘이고 방패다, 비밀한 방식으로, 그게 여러분들 영적감수성에 포착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잠시 쉬었다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