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7편 강해-찬송하라

 

시편 47편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인도자를 따라 소산님에 맞춘 것〛

1.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2.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3.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4.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5.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6.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7.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8.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9.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아멘! 좀 짧은 말씀인데요, 1절에서 9절까지 있습니다. 제가 참고로 하고 있는 성서주석, 국제성서주석인데, 여기에 여기 시편1에 해당되는 이 책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47편은 세 가지의 주석방법이 서로 나뉘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면 세 가지 방식으로 학자들이 이 시를 해석한다고 겁니다. 해석한다고 하는 거예요. 시의 형식으로 기록된 시편이죠? 텍스트란 말입니다. 문자로 된 거예요. 그리고 상당히 오래전에 기록된 거고요. 이런 것들은 어떤 자연과학을 설명하는 해명서라든지 하여튼 그런 방식의 확연하게 드러나는 어떤 사실들을 말하는 게 아닌 거지요.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닌데요, 이런 뜻입니다. 이 성서텍스트,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 시편은 좀 더 그렇지요? 장르가 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는데 조금 더 접근하는 그 방식이 여럿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도 시를 해석할 때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르다고도 하잖아요?

 

물론 다른 문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전에 기록된 이 시편을 오늘 학자들이 해석 할 때 세 가지 관점으로 하는데 그것이 조금씩 충돌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문제를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본문으로 들어갈까 합니다. 첫 번째는 역사적 해석이고요, 두 번째는 종말론적 해석이고, 세 번째는 제의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역사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편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역사적인 사건과의 관계 속에서 이 시를 해석하는 거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역사적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성공적으로 끝이 난 전적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포로기 이후 성전회복이 완성 된 것을 가리키는지, 하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대비해서 이 시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어떤 전쟁이 끝나거나 아니면 그 와중에 있거나 바벨론 해방에서 해방되었다거나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그런 것들을 배경을 두고 이 본문을 해석하려고 하는 거예요.

 

두 번째 종말론적 해석은 이 시의 일반적이고 우주적인 성격을 따라가려고 하는 거지요. 이런 해석, 종말론적 해석, 말 그대로 마지막 때라고 하는 영적인 시각으로 이 시를 해석하는 거니까 훨씬 더 우주론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지요. 이 성서주석학자의 말을 조금 따라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해석은 역사적 해석보다 그 정도를 더 높여서 그렇게 한다.”그게 무슨 뜻일까요? 정도를 더 높인다, 어떤 차원이 더 높아진다고 하는 거겠지요? 우주론적인 차원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특색은 어떤 곤란한 점을 일으킨다. 그것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 왕국의 성취를 시점으로 영광 돌리는 것을 이 시의 목적으로 본다.” 역사적인 사실이라기보다도 최종적인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 왕국의 성취를 찬양하는 시다, 이렇게 보는 거지요. 제의적 해석방법은 “이 시가 야훼의 대관식 의식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 제의적, 이 말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야훼의 대관식 의식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 야훼의 대관식이라고 하는 그게 무얼까요? 제사 드리는 것, 일반적인 제사를 이야기하지는 않을 거고요. 왕들의 대관식을 말하는 것은 아닐거고요, 야훼 하나님의 대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얼까요? 아마 뒤에도 좀 설명 되어 있는데, 어쩌면 이것은 새해를 맞이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드리는 하나의 제사행위로써 그것은 바로 야훼 하나님의 대관식이라고 하는 그 형식으로 드려지는 게 아닐까, 제 개인적으로 추정을 합니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 세 가지 해석방식이 오늘 구약 전문 학자들이 이 시를 접근해가는 방식입니다. 세 가지라고 그랬어요. 역사적 방식, 두 번째는 종말론적 해석, 세 번째로 제의적 해석, 아마 이런 해석방법은 이 47편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다른 시편을 다룰 때도 경우에 따라서 많이 해당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이 세 가지는 좀 대립되기는 합니다마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은 아니고요, 그것이 합해서 상호적으로 시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점 이예요. 역사적 접근과 종말론적 접근과 그리고 제의적 해석, 이런 것들이 두루두루 같이 이 시편을 이해하는데 상호적으로 승화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거지요.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게 되면 몇 절은 어떤 부분이고 몇 절은 어떻고 그걸 아주 세심하게 따질 수 있습니다. 우리야 그런 방식으로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전문가에게 맡겨 두고요. 다만 그래도 최소한도 이런 신학적인 배경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말씀을 우리의 신앙의 차원에서 좀 더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이렇습니다.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2절입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지존, 가장 존엄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두렵다, 왜 두려운지는 당연하지요? 옛날에 일반 사람이 왕 앞에 가는 것도 두려워했잖습니까? 당연히 그렇지요.

 

그 두려워하는 이유가 뭐죠? 일반 백성들이 왕 앞에 갔을 때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두려운 게 뭘까요? 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왕 앞에 가게 되면 역시 두려워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양 쪽에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반 백성들과 왕, 그 사이에는 도저히 건너 뛸 수 없는 틈이 있어서 백성으로서는 왕 앞에 선다고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왕은 이 백성의 생명 여탈권(生命與奪權), 생명 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거지요. 백성은 왕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 그는 복종해야 되는 거고요. 이 관계에서는 두려움이 생길 수 밖 에 없습니다. 왕 앞에서도 두려울진데 하나님 앞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지존하신 여호와라고 했잖습니까? 바로 앞에서 지금 왕이 백성의 생명 여탈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두려운 존재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바로 하나님은 더 궁극적으로 그러신 분이지요.

 

우리의 생명이 그분으로부터 왔고, 또 그 분에 의해서 지금 유지되고 있고, 또 그 분에게 돌아간다는 그런 사실을 우리가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면 그 분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공포, 이런 것들은 아니고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 대상 앞에서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도 인용했던 루돌프 오토의 책『Das Heilige』에서 언급되고 있는 누미노제(Numinose)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지요. 거룩한 두려움이예요. 하나님 앞에 섰던 사람들은 모두가 다 그런 걸 느꼈습니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그런 경험들을 한 거고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이사야도 그렇고 모든 예언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선다고 하는 자체가 두려운 거고요, 우리는 두려움, 무슨 두려움? 그것보다도 평화, 기쁨, 자유, 따뜻함, 그런 걸 느낀다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예, 그런 부분도 있지요.

 

하나님을 어떤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머니 같은 자애로우심으로 다가오시기도 하고요, 또는 신약성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친구와 같기도 하고요,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다 내가 너희를 친구로 부르겠다고 하신 말씀이 있잖습니까? 그런 것들을 다 전제하면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 아니,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종교적 심층에서 다가오게 되는 우리의 영적인 경험인 거예요.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공포 이런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죽을까봐 겁난다거나, 내가 벌 받을까봐 어떻게 된다거나, 그런 거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지요.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온 땅에 큰 왕, 왕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큰 왕이니까 그 모든 왕들을 뛰어 넘는 그런 왕이죠? 이 시편기자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표현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외치라고 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지요. 다시 한 번 2절을 읽습니다. 지존하신 여호와는 두려우시고 온 땅에 큰 왕이 되심이로다 우리가 이러한 구절들을 자주 읽었기 때문에 어련하려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 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은 우리가 좀 조심해야 되겠어요. 하나님 말씀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여기에는 이 시를 기록한 시인의 깊은 영성이 들어 있는 거거든요. 이 텍스트 말씀을 누가 그렇게 썼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다른 수가 없지요. 일단 이런 시인들의 영적 경험을 우리도 똑 같이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비슷하게는 할 수 있어야 되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이것에 대한 공부 선행되어야 되겠지요. 3절,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나라들을 우리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며 4절,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셀라)예, 여기 3절과 4절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하게 아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네요.

 

야곱의 영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렇게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씨족 족장들이지요? 그들의 한 사람, 야곱으로부터 12지파가 생기고요. 명실상부하게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확실하게 했던 야곱후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는 첫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들들이 별로 없었잖아요? 아브라함은 이삭 하나 낳았고요, 이스마엘이야 서자니까 좀 제쳐놔야 되고요. 이삭은 쌍둥이를 낳았지요? 아, 말씀 드리다 보니까 놓친 게 있는데, 족장들 후손들 말입니다. 오늘 그건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렇게 내려오는데, 아브라함에게도 이스마엘 말고도 서자가 또 있었거든요? 제가 지금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야곱에 이르러서 아들만 열두 명이고, 딸도 있었고요 큰 대가족으로 늘어났고요, 그들이 이집트로 내려간 다음에 큰 민족을 이루게 되지요. 그래서 야곱의 영화라고 했습니다. 5절,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올라가신다고 표현하네요.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거처하는 곳이 하늘이다 라고 하는 그런 생각으로, 하나님께 대관식 제의를 드리는 바로 그런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리로 가신다고 하는 문학적으로, 혹은 신앙적인 문학적 표현으로 기록 된 것 같습니다. 좀 어렵네요. 그 부분은 넘어 가겠습니다. 이제 6절에는 본격적인 제의적인 모습이 나오네요. 제사 드릴 때, 예배드릴 때 하는 찬양들입니다. 6절이 이렇지요?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계속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요? 제의적인 형태를 띤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6절이 말이지요. 이런 것들을 보고 이 47편을 제의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는 거지요. 그게 어느 부분에서 어느 부분이 역사적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이다, 이것은 제의적이다, 조금 분류하긴 하는데 딱 끊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찬송하라고 하는 것이 여기 몇 번이나 반복되어 있나요? 4번이나 반복 되어 있군요. 하나님을 우리 왕이라고 똑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고 하는 말만 가지고도 우리가 생각할 거리는 많이 있지요. 우리 삶 자체는 찬송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귀가 닳도록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냐, 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냐 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생각하셔야 되요. 우리가 찬송을 많이 부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사실은 예배는 찬송이죠, 찬양이죠, 영광송이죠, 독솔로지(Doxology)라고 하는 영광송입니다. 그런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기본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의 예식으로써 예배의식으로써 중요한 자리를 잡아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의 일상적 의미, 아니면 그것의 현실적 의미가 그것이 무엇이냐는 거지요.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신앙을 너무 뻔 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혹은 너무 아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혹은 그러려니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요, 알겠거니 생각하지 마시고 정말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신자들 사이에 그런 신앙적인 대화가 깊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그렇게 정확하게 무어라고 표현될까요?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께 영광,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든지, 그런 우리 신앙적인 멘트들을 이런 것들을 막 하잖아요? 기도도 그렇게 하고, 그러나 그런 것들을 사실 얼마나 잘 알고 말하겠어요? 실제적으로 예배라든지, 특별히 성경공부 외에는 신자들 사이에 신앙적 대화는 깊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시간에만 그렇게 통하는 예배나, 성경공부시간에는 그걸 누가 따지고 들지 않잖아요? 믿으십니까? 어떻다, 그러면 우리가 칭의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그대로 받아 드리잖습니까? 받아 드리거든요? 그때는 그렇게 얘기를 해도 되요. 다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그런 시간 아니고 자유로운 시간에는 신자들 사이에는 잘 못할걸요? 여러분들은 하시나요? 그런 친구가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왠만 해서는 찾기 힘들 겁니다. 우리가 신앙을 리얼하게 생각하지 않는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에게 들은 풍월로만 알고 있다고 하는 거지요. 옆으로 좀 나간 이야기입니다만 다시 본문으로 들어와서 아까 드린 질문 이예요. 찬송하라 라고 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이 무언가, 구체적으로 그걸 생각해 보시라고 하는 거지요. 그 대답은 딱 하나가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어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의미인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거예요.

 

대상을 우리가 실증적으로 확인 할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실증적으로 대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접적으로 말씀 드리는 거지요. 잘 들어 보세요. 오늘 여기 47편에 전체적으로 우리가 조금 유대인들의 특별한 종교의식을 중심으로 된 시편이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우리가 생각하기는 힘든데 이 하나만이라도 생각하시면 공부의 소득이 있는 걸 거예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닌 것을 아닌 것답게 대하는 태도지요. 찬양을 받지 말아야 될 대상에게 찬양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찬양을 받아야 될 분에게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우리에게 널려 있거든요, 십계명을 통해서 말하자면 우상을 섬기지 않는 거지요. 돈이나 사람이나 우리의 기호적인 관심이나 여러 가지들 그런 것들을 절대화하지 않고 거기 실제적으로 그것을 찬양하지 않는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숭배한다고 하는 뜻이거든요?

 

하나님 아닌 것들을 찬양하지 않는 것이 곧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7절에도 똑 같이 그런 제의적 표현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이러한 찬양들이 우리들도 많이 있어요. 찬송가에도 있고 복음찬송가에도 좀 있지요? 그런 찬송을 부르고 또 예배자체가 그런 찬송이니까, 예배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 한 두 마디에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예배와 찬양을 우리가 하면서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닌 것에 찬양하지 않는 그런 영성을 우리가 확보하게 되는 거지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래야만 우리의 예배와 우리 찬양이 바른 길에 놓일 수 있습니다. 8절, 하나님이 뭇 백성을 다스리시며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라고 하는 게 어떤 공간에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건 세계 전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일부의 장소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그의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직전에 설명해 드린 걸로 바꿔서 말씀 드리자면 그 외에 모든 피조물들도 거룩한 보좌에서 끌어내려야 된다고 하는 거지요. 밑에 자리에 앉게 하는 거지요. 거기에는 실제적인 고관대작이나 왕이나 돈이나 위대한 예술품들을 모든 것들이 다 포함합니다. 그런 것들을 절대화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에 하나님이 앉으셨다고 하는 이 신앙고백이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겁니다. 9절, 마지막 절입니다. 뭇 나라의 고관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임이여, 이렇게 이야기를 했네요. 방패는 무엇을 막아 주는 거지요?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막아주신 근원이다, 그런 뜻이죠, 그런 분인 거지요.

 

우리를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지키시는 그런 분이라고 하는 거지요. 실제적으로 그런 분이 누굴까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는 하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여러분들 마음에, 철학적 용어로는 표상에 나타납니까? 하나님을 여러분들이 자꾸만 어떠한 규범 안에다 넣지 마시고 성서도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거든요? 열어 둬야 되요. 하나님이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뛰어 넘으신다고 하는 거예요. 성서를 읽을 때마다 그렇게 우리가 굳어지지 않는 열린 영성을 통해서 성서를 읽을 때마다 성서를 통해서, 성서는 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의 표현이니까요, 우리의 열린 영성으로 하나님에 대한 표상, 쉽게 얘기하면, 그림 이예요. 그림, 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개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더 확대되는 거지요. 더 깊어지는 거지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이 시간에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칫하면 여러분들이 오해 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하나님이 그렇게 철학적인, 신학적인 그런 사유, 생각을 통해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그런 분이냐, 그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어떻게 규정해 낼 수 있다고 하는 뜻은 아닌 거예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하면서 존재하시는 것이지 우리 인식에 좌우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강조해서 드리는 그 대목은 하나님의 계시에 주도권을 제가 상대화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우리 인간의 인식이 절대적이다, 인식에 의해서 하나님이 좌우된다, 그런 것을 말씀 드리는 것도 아니고요, 하나님 계시가 우리들에게 바르게 전달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에 대한 그 선입관에, 그렇게 말씀 드리면 되겠군요. 우리 선입관을 너무 고착시키지 말아야, 그 얘기지요.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듣고 교육 받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상이 굳어지거든요? 그것이 종교적 경험에 의한 하나님의 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아예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해가 더 빠르게, 더 바른 하나님 이해에 접근할 수 있어요.

 

다른 교육도 비슷하다고 하잖습니까? 교육을 잘 못 받으면 받지 못한 것만도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상이 완전히 가부장적으로 굳어져 있다거나 아니면 옥황상제처럼 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권선징악을 내리는 어떤 존재처럼 되어 있다거나 많잖아요? 아니면 기복적인 대상으로서 다가오는 경우도 많이 있잖습니까? 그런 하나님의 상에 찌들려 있어서 더 이상 우주전체, 생명의 깊이 종말론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이런 데 도저히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그 문제는 거기까지 하고요, 모든 방패는 하나님의 것이며, 그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예, 그는 높임을 받으시리로다 높임을 받는다, 또 나온 이야기지요? 찬송하라라는 이야기, 연관되는 문제지요?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이것도 연관되는 문제지요. 예, 오늘 공부 세 가지 단어를 연결시키면 되겠군요. 찬송, 거룩한 보좌, 높임 이 세 가지 단어가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 그런 우리의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 분만 높임을 받으셔야 되죠, 이 말을 또 거꾸로 하면 그 외의 것들은 다 낮아져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그렇다면 우리 인간 삶은 다 비굴해져야 되냐,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종처럼 살아야 되냐, 그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게 정말 사는 길인 거예요. 왜 그런지는 제가 설명 드리지 않아도 여러분들 아시겠지요? 그렇게 경험하시지요?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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