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1편 강해-나를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고

 

시편 41편, 읽겠습니다.

 

〚다윗의 기념하는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5.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11.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아멘! 1절부터 13절까지 있습니다. 이 중에 4절부터 10절까지가 탄원시라고 합니다. 1절에서 3절 앞부분은 직접 탄원이라기보다도 이 시를 여는 내용인데요, 기도문이죠, 그런데 1절에서 3절과 탄원하는 내용이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문제들은 조금 더 전문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굳이 제가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일반 신자들이 알아야 될 만한 내용이 있고 또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내용이 좀 구별되거든요? 이런 것들은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군요. 클래식 음악이 있다고 합시다, 전문가가 그 그걸 듣고 공부하는 것하고 일반 아마추어음악가, 또는 음악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그것을 공부하는 거, 혹은 또 감상하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거든요? 전문가는 말 그대로 전문가니까요, 그 음악에 세부적인 부분까지 다 공부하고 알아야 되지만 일반대중들이야 어느 정도 까지만 알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건 아닙니다. 일반 음악 애호가라고 하더라도 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많이 안다면 그 만큼 음악에 그 만큼 더 들어갈 수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는 일반 신자들에게도 신학훈련은 필요합니다.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텍스트와 그것을 중심으로 한 2000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전문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거거든요?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알게 되면 기독교가 뭐냐? 이 본질에 조금 더 깊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을 딱 그어서 어디까지는 평신도가 알아야만 되는 것이고 어디까지는 신학전문가들만 알아도 된다, 그렇게 딱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경계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일반적인 신자라고 하더라도 신학전문가 못지않게 신학을 아는 사람들도 있고요, 어쨌든 그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성서텍스트와 기독교 2000년 역사를 전문적으로 알면 알수록 우리는 본질의 깊이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하여튼 그러한 점들이 있어요. 일반신자에게는 그런 신학적인 것은 완전히 필요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제가 그것 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경계가 좀 흔들려가지고 제 말이 두서가 없이 되고 있습니다. 드리려고 하는 말씀이 이겁니다. 일반신자는 신학전문가들에 비해서 성서텍스트와 2000년 기독교 역사를 그들만큼 소상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학이 완전히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많이 알면 알수록 좋다,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여기서 구약성서학자들이 말하는 성서텍스트에 대한 여러 가지 비평은 시간도 짧고요. 어떤 면에서 우리의 이런 시편공부의 성격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제가 이걸 준비하면서도 그런 부분은 많이 줄였습니다. 가능하면 이 말씀의 어떤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보려고 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서텍스트를 해석해야 되거든요? 해석하려면 신학이 따라야 하니까 그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신학이 조금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다 드러내 놓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설명하는 사람이 준비만 되어 있다고 한다면 일반 신자들도 성서텍스트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안내 할 수는 있는 겁니다. 다른 말이 좀 많았습니다. 4절에서 10절까지가 탄원시라고 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시편에는 탄원시가 많거든요? 감사시도 있고요, 11절에서 13절은 감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종류로 구분 되요. 그런데 1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들을 그렇게 구분하는데 그것들이 다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편집역사과정 전에, 전승되는 과정에서 다른 자리에 있었던 시편들이 41편이라고 하는 한 묶음이라고 하는 시편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도 완전히 다른 이야기는 아니지요. 오늘 여기에서 주로 제가 말씀 드리게 될 그 문제는, 전체적으로 다 차근차근 읽으면서 보면 좋겠습니다만, 그래도 하나 중심을 찾아야 되니까요.

 

그런 차원에서 10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좀 살펴볼까 합니다. 이게 조금 특이하니까요. 특이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시편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주제 중의 대표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수에 대한 증오심, 그런 것이 여기 표현되어 있어요. 10절, 이렇습니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그들이라고 하는 것은 원수지요. 그들에게 내가 받은 것만큼 갚게 해 달라고 하는 탄원시 입니다. 4절에서 10절까지의 탄원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까 하고 말이지요. 그럼 세상 사람들하고 무슨 차이가 있냐,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내가 받았으니까 그 만큼 주겠다, 백배로 주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지금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조금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런 문제들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좀 곤란합니다. 지금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약의 관점으로라도 따라 가지 힘든 거지요. 이해하기 힘든 거지요. 신약은 이런 기도는 없습니다. 이런 신학은 없어요. 원수를 갚는다는 그런 신학은 없습니다. 이런 신약적인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거지요. 신약은 오히려 원수 사랑이거든요? 또 구약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완전히 저주거리니까요. 그런 방식으로 살면 안 되지요. 물론 구약이라고 해서 다 원수 갚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아주 상당히, 복잡한 그리고 다양한 삶의 경험들이 있어서 어떤 때는 구약도 평화, 정의, 화해, 원수 이웃에 대한 사랑,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는 힘들겠지요. 악에 대한 멸절해야 된다고 하는 사상이니까요. 여러 가지 다양한 삶에서 나온 신앙경험들이 구약성서에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원수에게 내가 받은 대로 갚게 해 달라고 하는 오늘 우리 관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의 시각으로 읽어야 되요. 아주 중요합니다. 그 당시의 시각으로 읽는다고 해서 무조건 그걸 합리화해도 된다고 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 텍스트가 형성될 때 그 사람들의 세계 경험, 생명경험을 일단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일단요, 그래서 옳다 그르다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린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때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갖다 준다고 믿고 있잖습니까? 그런 것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가져다 놓은 선물이라는 것으로 확인 되서 그런 경험들이 딱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향해서 그런 경험을 잘 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거거든요. 고대인들에게 원수를 받은 대로 갚겠다고 하는 생각들은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침략할 때도 거기 있는 어린아이까지 다 멸절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도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안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밖 에 없었는지는 우리가 인정해야지요. 그것도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어린아이들이 이해하듯이,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미숙하다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 거예요.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보편적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원수를 향해서 증오심을 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느냐 하는 그러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뭔가 그 안에 있는 거지요. 여리고성, 아이 성 그 사건,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벌어졌던 많은 일들은 오늘 이 말씀하고 직접 연관되는 건 아닙니다. 오늘 여기 보응한다고 이런 표현 때문에 제가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연관은 되지요. 왜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보응을 하려고 했을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왜 그런 방식으로 밖에 생각했을까 하는 겁니다. 아, 당했으니까 갚아야지, 그렇게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성서를 전승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인간적인 생각이라고 할까요? 어떤 그런 본능적인 적개심, 이런 것에 빠져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완전히 없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도 살아가면서 많은 한계를 느끼는 것처럼 고대성서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런 인간적인 한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만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대답을 찾으려고 했던 거지요. 이 사람이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라고 한 것은 이렇게 두 가지로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일단 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 거룩한 분노, 이렇게 이야기해도 될 거예요. 자기가 당한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악에 대한 분노인 거지요. 이 악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좀 이상한 거지요.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것이 4절부터 몇 절에 걸쳐서 쭉 설명되어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이렇게 이야기를 한단 말예요. 그러니까 정말 악한 거지요. 악한 것, 9절에 보면,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발꿈치를 들었다고 하는 것은 싸울 태세 아니겠어요? 얼굴을 들이대면서 발꿈치를 들어야 키가 더 커 보이겠죠? 대적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마저 그런 태도를 보인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완전히 허물어진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저주를 퍼 붓고 악담을 퍼 붓고 악에 앞장서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이 성서기자가 이미 4절에서 자기 자신을 이미 성찰하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4절에 보면 하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범죄,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는 인식입니다.

 

죄인이 되는 인식,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 일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지요. 그러한 상태에서 이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고요, 그런 상태에서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보응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그렇게 당했으니까 갚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마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뜻에 온전히 순정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악을 향한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이런 것을 옳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거지요. 구약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탄원을 하지만 거기에만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예요. 참,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10절에서 보응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했다가 11절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원수에게 내가 정복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다고 하는 것을 확연하게 알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이라고 할까요? 정말 어려운 처지에 있었는데, 그런데 그가 그런 어려움들을 벗어나서 이제는 그런 보응하게 하소서 라고 하는 탄원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렇지요? 사람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갚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그 순간적으로는 카타르시스가 될지 모르지만 그건 한계가 있는 거지요. 하여튼 오래전에 읽은 무슨 무슨 백작이라고 있는 것 같은데요,(몬테크리스토 백작) 그 사람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는데, 탈출해서 백작까지 가서 원수를 하나 하나 갚아간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유명한 소설인데, 제가 기억을 못하는군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소설 마지막 부분, 아마 영화도 보고 소설도 본 것 같은데요, 원수를 다 갚았는데, 그런데 허전한 거예요. 결국 하나님이 나를 기뻐해 주신다는 것을 아는데서 구원이 시작되는 거지요.

 

이 사람은 그렇게 정말 어려운 일을 당하고 아프고 그리고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보응하게 해 달라고 탄원하면서도 거기에 빠지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관계에 돌아온다고 하는 사실 이게 중요한 거지요. 그래서 찬양으로 가게 됩니다. 12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1절에서는 주께서는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아셨다, 나를 기뻐하신다, 참 놀라운 영성 이예요. 주께서 나를 기뻐하신다, 어떤 관계일지 여러분들이 아마 이해는 하실 겁니다. 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때 그런 느낌일까요? 아무 걱정도 안하게 되는 거지요? 그럴 때는 자기친구하고 싸운 것도 그렇게 분이 나지 않거든요? 주님, 하나님이시죠? 세계의 주인이시죠? 세계를 창조하시고 완성자이시죠? 그 분이 나를 기뻐하신다, 그러면서 12절에서는 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믿음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망상에 빠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 혼자 도취해 있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깊은 영성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한 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 드립니다. 저도 이러한 영성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주께서 나를 기뻐하신다, 자만심이 아니지요? 있는 그대로 자족하는 거지요? 생명과의 일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기뻐하신다,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신다, 영원히, 지금 시간의 간격이 허물어지는 어떤 사태를 영원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런 시간과 공간의 결합하고 이것 하고는 다른 세계지요. 이런 것은 영원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 가니까요. 다른 방식의 존재양식이라고 할까요? 그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주 앞에 우리를 그렇게 세우신다고 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13절에 이렇게 찬양합니다. 이건 정말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대로 부르는 송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우리가 이런 말들은 자주 듣기는 하는데요, 그리고 때에 따라서 감동을 받기도 하는데 과연 이게 어떤 걸 이야기하는지 따라가기가 쉽지 않지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건 정말 신비한 어떤 때를 이야기 합니다. 제가 앞에서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이 시간과 공간이 결합되어 있는 이런 상태가 아닌 질적으로 새로운 시간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영원을 더 강조하는 거겠지요.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이 시작되었을까요? 이미? 지금 우리 시간과 공간 안에 그 영원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침투해 있을 겁니다. 지금 전혀 우리가 영원하고 상관없이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것을 우리의 생각이나 범주, 우리의 인식으로 끌어 당겨서 실증적으로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은, 그러한 질적으로 새로운 시간의 그 안에서 여호와를 송축한다고 하는 겁니다. 예, 이것도 오늘 우리 신앙화두로 삼아야 될 것 같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자, 과연 송축한다고 하는 것이 무얼까요? 예,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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