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304 히브리서 8장.hwp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내용은 히브리서 8장입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조금 짧아요. 13절까지 밖에 있지 않습니다. 내용도 좀 단순하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구조적으로는 단순하지만 내용이야 깊죠. 1절부터 13절까지 저와 여러분이 교독해서 읽을 텐데 마지막 13절은 함께 읽겠습니다.

 

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우리가 앞에서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말하는데 구약의 어떤 한 인물을 거론하면 이야기를 했습니다. 멜기세덱이었어요. 이 사람은 성경에 그렇게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조카 룻을 구출하러 갔다가 전쟁에서 이기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올 때 여러 지역에 있는 왕들, 옛날에는 씨족사회 그런 정도니까 왕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이라는 의미하고는 다르죠. 추장, 씨족 족장, 이런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여러 사람이 나왔습니다. 나오게 된 이유는 성경이 말을 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추측은 할 수 있어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돌았을 거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이기더라. 오히려 다른 군대가 더 강할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이 다 때려 부수고 많은 노획물을 갖고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으니까요. 저 아브라함에게 잘 보여야 되는 게 아닌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관계를 터놓는 게 신상에 좋겠다는 생각들을 곳곳에 있는 씨족, 추장들이 당연히 생각을 했겠죠. 제가 추정하기로는 그렇습니다. 그 중에 한 인물이 멜기세덱이었어요. 이 사람이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그랬어요. 어디 왕이라고 그랬죠? 살렘이에요.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살렘, 샬롬, 같이 통하는 말들이죠. 평화라는 뜻이에요. 고대 사회에는 왕이 제사장하고 많이 겸했습니다. 종교하고 정치가 하나였어요. 신정정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멜기세덱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하지는 않겠습니다. 멜기세덱 그 흐름은 다시 한 번 말씀드려야겠네요.

 

히브리서 기자가 왜 멜기세덱을 말하는지는 아시겠지요?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직분을 레위지파로 생각한 거예요.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들만 혈통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게 아니라 레위보다도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한, 더 근원적인 제사장인 멜기세덱이야 말로 레위지파보다 더 뛰어난 제사장이다. 이 멜기세덱의 반차, 순서에 따라서 예수님이 참된 제사장이 되었다 그 논리를 펴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1장부터 7장까지 쭉 한 겁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확실하다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8장부터 1018절까지 이 대제사장의 직분이 뭐냐,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이 뭐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할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직무를, 다른 제사장들이 따라올 수 없는 탁월성을 갖고 감당하셨다. 그걸 이제 설명합니다. 물론 여기서도 구약하고 많이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와요. 전체적으로는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무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이건 아주 원천적인 거다, 근원적인 거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이 제사장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에 비교할 때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걸 말하려는 거예요. 1절 잠깐 보십시오. 표현이 재밌어요.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것이다. 이렇게 얘기하죠. 여태까지 7장까지 얘기한 것 중에서 이것을 요약적으로 말을 하면 다음의 사실이다 하는 거죠. 대제사장, 이건 약점이 없는 완전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 이거죠.

 

그런데 그 대제사장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서 1절 후반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여기서 지극히 크신 이는 물론 당연히 하나님이시고요. 하늘은 당연히 하늘을 가리키는데 그걸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져요. 어떤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는데 이런 걸 읽게 되면 여러분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정말 예수님이 사진에서 본 그러한 모습으로 하늘 어느 공간에 임금이 앉듯이 보좌에 앉아 있고 예수님이 오른쪽에, 우편이라고 했으니까, 여기 괜찮은 자리에 앉아계시겠다. 그런 그림이 그려지죠. 일단 이 표현은 그렇습니다. 그건 하나의 그림이에요.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약간 어린아이의 수준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동화를 사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여기에는 더 근원적인 어떤 세계를 이 방식으로 설명한 거예요. 하나님에게 오른편이 어디 있고 왼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은 시간 전체에요. 창조와 종말 그 전체가 하나님인 거예요. 그리고 우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든 것, 그러니까 우리가 아직 다 모르는 겁니다. 지금 제가 설명한 것이 정리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종말 전체 시간을 통치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분은 어떤 형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에 대한 형상, 이런 거 만들지 말라 얘기하잖아요. 하나님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확인 하려고 하지 마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이름을 붙이지 마라라 이야기합니다.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그 이름 안에 가두는 거예요. 사과 이렇게 얘기하면 사과라는 그게 딱 있잖아요. 어떤 이름을 붙여 버리면 제한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 우편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처럼 앉아 있고 오른쪽이라는 걸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인 권위가 있는 분이다 그걸 가리키는 거예요. 이건 이미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용어가 어떻게 사용된 건지를, 그리고 여태까지 관용적으로 유대인들에게서, 이 성경은 유대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걸 알고 읽어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 113절에 이미 한 번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시편 1101절에 근거한 거예요. 잠깐 읽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이 굉장히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읽혔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성경이에요. 물론 모세오경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경전이었지만 시편은 그거하고는 좀 다른 차원에서 중요했습니다. 랍비들이 회당에서 종교 행위를 할 때 시편을 많이 읽었어요. 당연히 예수님도 이 시편을 많이 읽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외우셨을 거예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그런 것들이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이에요. 예수님이 외우고 계시고 그러면서 어느 순간에 그걸로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시편 1101절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와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여호와는 뭐고 주는 뭐냐,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주를 예수님으로 생각을 한 거죠.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는 이러한 말씀을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러한 말씀으로 이해를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한 겁니다. 우편이라고 하는 것을 유대인들이 어떤 뜻으로 사용했냐면 오른편이다 왼편이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는 그것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대제사장인 그 예수님이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똑같은 창조와 인간을 살리는 것, 세계 완성, 그런 권능이 있었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설명을 제 강의안에 적어 놨으니까 보십시오. 강의안 1번에 두 번째 패러그래프, 거기서 셋째 줄 보면 이렇습니다. 우편은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가리킨다. 우편에 앉아있다는 말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 아까 영적인 권위라고 얘기했는데,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에 오르셨다는 뜻이다. 이 궁극적인 생명, 이런 표현하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시겠죠.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는 것은 궁극적이에요 아니에요. 아니죠. 지나가는 거예요. 잠정적이라고 합니다. 무상성이라고 해요. 이게 무의미하다는 거하고는 다른 거예요. 굉장히 오늘 현실이 중요하죠. 그러나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과 동일한 영적 권위가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더 확장시켜 준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지금 말한 궁극적 생명, 이걸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말하면 부활 생명, 그런 거죠.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차이가 있다, 동일하다 어느 쪽? 동일하다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동일한가. 오늘 그것까지 설명하기 시작하면 너무 많은 이야기로 들어가게 되요.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이야기를 하고 오늘은 그 사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에서 동일한 능력이 있는 분이다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2절에 보면 그걸 조금 더 설명하는 거예요. 성서와 참 장막을 섬기는 이시라. 이게 바로 예수님이죠. 대제사장이죠. 성서와 참 장막, 이건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고 사람이 세운 게 아니다 이렇게 비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서와 참 장막이야 말로 영원한 생명, 궁극적 생명이 감춰진 하나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을 두 가지로 설명하네요. 하나는 참 장막이 있고, 이건 주님께서 세우신 것인데, 또 하나는 누가 세운 게 있죠. 사람이 세운 것. 하나는 주님께서 세우신 것, 또 하나는 사람이 세운 것. 이 사람이 세운 것은 유대인들의 성전을 가리키는 거예요. 모세로부터 시작했죠. 성전과 성막. 성전하고 성막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차이가 있어요.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차이가 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고요. 그걸 솔로몬이라고 하는 왕이 지은 거예요. 그걸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성전이라고 얘기합니다. 성막은 성전이 세우기 전에 광야 생활할 때 천막 비슷한 걸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이동식 성전을 가리켜서 성막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게 성전의 원형이긴 하죠. 성막을 비롯해서 그 모든 제사를 드릴 때 습관이나 형식, 그 제사장의 복장, 모든 성서와 성막, 이런 것들 일체에 대한 정보, 자료, 이런 것들은 다 모세에 기원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과 등등을 받았을 때 그 이야기가 자세하게 나오거든요. 그게 이제 사람이 만든 거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어떤 걸 얘기하려고 하는지 감은 오시죠. 유대인들의 제사장 전통도 레위로부터 내려온 굉장히 그들로써는 대단한 건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게 정말 참된 제사장의 전통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멜기세덱으로부터 더 가게 되는 거죠.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성전이 절대적인 것이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이 만든 거야, 모세 전통에 의해서 오긴 온 건데 그래도 율법도 그렇고 성전도 그렇고 다 사람에게서 온 거다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 성소 혹은 성막. 두 가지 개념이 있어요. 이스라엘 전통에 있었던 그것은 사람이 만든 거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분이 만드신 것은 참된 성막 인거죠. 이 두 개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강의안 2번 보십시오. 계속 히브리서 기자가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는 거예요. 땅의 제사장들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보십시오. 유대 레위지파에 속하는 땅의 제사장들이 하는 행위는 모두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다. 5절에 나와 있어요. 굉장히 거룩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모형이고 그림자다. 진짜가 아니다. 그 실체는 하늘의 성소인거죠. 그건 주님께서 지으신 성소입니다. 이게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보면 헬라 철학이 말하는 이데아와 세계관계가 약간 비슷할 수 있어요. 히브리서 기자가 이 대목에서 성소와 연관해서 말하는 핵심은 간단한 겁니다. 정말 참된 성소가 하늘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밑에 있는 유대인들의 성소는 그것의 그림자에요. 모형인 거예요. 원천은 거기 있는 거예요. 사실은 이러한 생각들이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약간 연관이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가 모든 근원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은 그것의 비춰진 어떤 영상들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로부터 모든 것들이 나와서 잠깐 있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그렇게 플라톤이 설명을 했는데 오늘 여기서도 두 가지 성소, 땅에 있는 성소와 하늘에 있는 성소가 그렇게 읽혀 질수가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기자가 철학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원론적이에요. 이 세상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하늘의 성소와 땅의 성소는 그런 거는 아닌 거죠.

 

강의안 중간 부분을 좀 더 보겠습니다. 땅의 제사가 하늘 제사의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땅의 제사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하늘 제사에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죠. 약간 관점의 차이인 거예요. 하늘의 성소가 온전한 거니까 거기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 거기로부터 부여 받은 거다, 그걸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 제사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곧 이가 예수다. 그걸 히브리서 기자가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설명들이 들어오시나요. 이런 표현들은 종교적인 언어라서 좀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들릴 수가 있습니다. 잘 잡히지가 않는 거예요. 하늘의 성소라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건데, 그리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하나 그렇습니다. 참 저도 이 부분에서 설명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늘 망설여져요. 그런 것을 극복하려면 생각을 약간 돌려야 됩니다. 우리는 자꾸만 어떤 사물이 있는 거만 있다고 생각하는 걸로 생각이 고정되어 있어요. 그걸 넘어서야 되는 건데, 근본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는 거죠. 인문학적 사유,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예요. 노자와 장자가 얘기하는 도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이 도라고 하는 게 노자와 장자에게는 가장 리얼한 거, 핵심인 거예요. 다른 것들은 다 지나가고 마는 거예요. 도가 정말 근원이에요. 우리로 말하자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교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도라고 하는 게 눈에 보이나요. 안 보이지요. 그래도 안 보이지만 더 확실하게 느껴서 잘 설명한 게 그 분들의 책인 거예요.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도가 어떻다는 게 잘 자리를 잡는 거 그게 공부에요. 그건 공부하지 않으면 전혀 되지가 않습니다.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 한 유명한 이야기, 도가도 비상도라고 말이죠. 도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딱딱 결정해서 되는 게 아니다. 도를 갖다가 도라고 불러 버리면, 이미 말해 버리면, 아까 하나님에 대해서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얘기 했잖아요. 규정해버리면 근원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를 도라고 이름 부르면 더 이상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게 사람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려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정말 실질적인 것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조금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서 먹고 살기 바쁘고 만날 돈과 연관되어 살면서 그거 말고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늘 그런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설명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이 차분하게 천천히 그렇게 가면 언젠가는 좀 더 확연하게 들어올 때가 있을 거예요.

 

여기서 모형과 그림자라고 하는 그 말이 키워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인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너희들 말이지, 모세의 율법을 받아서 예루살렘 성전과 모든 율법 체계들, 그리고 제사장의 어떤 일들, 이런 것들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걸 특권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결국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에 의해서 된 하늘의 성소로부터 온 그림자다 그걸 말하는 거죠. 그런데 그 그림자가 굉장히 구체적이고 실제로 건물이 있고 제사장 제도가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권위가 있어 보이니까. 그에 반해 하늘의 성소 이것은 보이지 않는 거라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걸 봐라, 그게 핵심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걸 조금 직접적으로 말씀드려야겠네요. 성소, 제사장, 이런 것들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던 어떤 종교적인 제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설명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실제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우주 공간 하늘에 정말 어떤 성소가 있다 그런 뜻은 아닌 거예요. 그럼 왜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언어 등을 통해서 말을 하려고 했던 핵심이 뭘까요. 그건 여러 번 얘기했기 때문에 다 아실 겁니다. 생명을 얻는 거예요. 제사장이 하는 일도 뭡니까. 속죄 제물 드리고 번제 드리는 역할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유대인과 레위지파를 통해서 내려오는 것은 근원적인 게 아니라 그림자고 정말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 받는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의 종교 제도를 통해서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요약문에 나와 있는 단락 보십시오. 모형과 그림자는 한계가 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인간이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약속의 성소와 제사장직은 7절에 나와 있는 대로 무흠하지 못하다. 흠결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을 통해서 중보자를 세웠는데 그가 곧 예수다 이 얘기죠. 이 히브리서 기자만이 아니라 신약의 많은 성서 기자들, 초기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의 한계를 넘어서서 그들의 화려했고 역사가 깊은 종교 행태들을 뛰어 넘어서, 그런 것들은 그림자고 모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 생명에 대한 경험, 하나님 경험이 정말 확실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해하고 경험해야 될 것이 바로 그거인거죠. 그런데요. 기독교 기초 교리 여러분들이 다 아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통해서 구원 받고 부활의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 안에 들어간다, 그건 이제 우리가 교리적으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내가 그걸 경험하냐, 확실하냐, 이게 관건입니다.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그 깊은 세계를 다 이해해야만 구원받는 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얼마나 그 세계에 깊이 들어 갔나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속죄 능력으로 그 분의 부활의 힘이 미래와 우리의 운명을 지배 한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구원 받는다, 안 받는다하고는 좀 차원이 다른 겁니다. 구원 받았지만 더 신비한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거죠.

 

그 다음 네 번째,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구약의 어떤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하려는 거예요. 지금까지 하는 이야기를 아시겠지요. 유대인들의 전통, 성전, 성소, 대제사장들, 이런 것들은 흠결이 있다, 그건 완전한 게 아니라 그림자다, 그림자만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되냐, 더 좋은 약속, 더 참된 성소, 바로 그 분에게 그것을 지으신, 혹은 거기서 제사장이신 그 예수님을 바로 믿어야 된다, 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상대화하고 더 참된 약속으로 들어 가야한다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그 새로운 약속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미 했다는 거예요. 강의 요약문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더 좋은 언약이 예레미야 3131절 이하에서 이미 오래전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모세에게서 나온 거 말고 더 새로운 약속을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셨는데 그게 예수님이다 하는 거죠. 여기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새기겠다, 그 얘기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다는 이야기에요. 왜 그러냐면 모세의 법은 어디에다 새겼죠. 돌에 새겼잖아요. 이걸로는 한계가 있고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주겠다. 이건 예레미야에게 준 예언인데 이게 바로 예수님의 참된 성소, 참된 제사장, 더 근원적인 언약 그거다 얘기하는 거죠.

 

둘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신다. 일방적으로 용서하는 거예요. 모세의 법에 따르면 그냥 용서가 없어요. 일단 벌을 받아야 돼요. 잘못했으면 벌 받고 해결돼요. 그런데 이 방식으로는 똑같은 잘못을 또 해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법의 한계인거예요. 근데 법이 없으면 세상은 안돌아가되 그 법으로 인간과 사회를 구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냥 용서하는 거죠. 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약속을 주셨다. 그 새로운 언약, 두 가지 조건, 하나는 돌 판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에 새겨주셨다. 또 하나는 잘못된 것, 죄를 징벌이 아니라 용서해 준다고 하는 새로운 언약인데 여기에 부합되는 분이 예수다 그 얘기죠.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논리는 따라 오시겠죠. 속으로 우리가 얼마나 들어 가냐는 둘째 치고 굉장히 명쾌하게 분명한 관점을 갖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항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셨기 때문에 옛 언약은 낡아졌다고 말한다. 이 옛 언약은 모세의 법이죠. 유대인들이 딱 붙들고 있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들 조상들에게 내려온 법을 너희들은 그렇게 들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 한다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옛날 모세로부터 내려온 언약은 낡아진 거예요. 더 이상 모세의 법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세의 법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한적이고 그림자이고 모형인 거예요. 참된 것이 왔을 때는 옛것은 낡아지는 거죠. 그걸 완전히 해체하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되 그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주장을 선뜻 받아드리지는 못할 거예요. 자기들은 여전히 모세의 법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겠죠. 그런 점에서 유대교와 우리는 경쟁 관계에 있습니다. 이게 그들을 부정하면 안 되는 거예요. 다만 그들은 히브리서 입장에서 본다면 그림자 안에 있어요.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진짜는 아닌 거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생명을 얻는데 원본이다, 참된 성소다, 그 사실을 계속 변증해 나가고 우리의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써 나아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러한 신앙이 어디에서 결정적으로 형성됐다고 생각이 되세요. 이 말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이 어디서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경험했을까요? 부활이죠. 예수님의 부활. 요즘 제가 사순절 묵상을 쓰고 있는데 톰 라이트라고 하는 성공회 신학자의 사순절 묵상이라는 글도 읽고 있어요. 재미있어요. 톰 라이트의 글을 여러분들이 안심하고 읽으셔도 됩니다. 굉장히 글이 재밌고 토대가 탄탄하고 괜찮습니다. 거기서 부활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설득력이 있어서 생각이 나서 말씀드립니다. 이 부활 경험이 초기 기독교의 핵심이었고 우리도 거기서 참된 성소다, 그림자다, 이런 전반적인 문제를 기독교적인 전통으로 알고 있는 거거든요. 모세의 법을 통해서는 부활 생명, 여기에 닿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재밌는 설명을 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의 예수 부활 경험을 주변에서는 믿지 않으려고 했고 심리학적으로 어떤 것이 떠오르는 그런 정도로 평가하려고 했었다는 거죠. 지금도 기독교인들의 부활 신앙을 실질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심리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팎에 있습니다. 그 당시에 어떤 사건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댈 때 여자들이 증인을 설 수가 없어요. 여자가 확실하게 봤다 이야기하면 코웃음을 치는 겁니다. 만약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증인을 내세우려면 누구를 내세워야 되요. 남자를 내세워야 되잖아요. 그런데 복음서 보면 누구입니까. 여자예요. 제일 첫 장면 빈 무덤에 가서 본 사람은 여자들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가지고 사람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등등을 야이기 하는데 그런 점도 우리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기도하고 질문 있으면 질문, 대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사순절 이렇게 지나는 중 수요일 저녁 저희들이 또 히브리서 공부로 모여서 함께 생각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글자가 있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럽다고 하는 것을 저희들 다시 한 번 느낍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 놀라운, 신비로운 증언을 이천 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가 다시 읽고 경험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오늘 우리의 무상한 이 실존을 포함하면서 또 이것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인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참 성소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하나님의 우편자리라고 설명한 그 근원적인 생명, 부활 생명을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서 지켜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