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기쁨, 4월9일(화)

조회 수 3000 추천 수 1 2013.04.09 23:02:42

 

오늘 인터넷으로 책 몇 권 샀다. 그중의 하나가 황동규 시인의 <사는 기쁨>이다. 제호로 실린 시 ‘사는 기쁨’을 읽겠다.

 

사는 기쁨

 

1

 

오디오 둘러메고 한강 남북으로 이사 다니며

개나 고양이 곁에 두고 않고

칠십대 중반까지 과히 외롭지 않게 살았으니

그간 소홀했던 옛 음악이나 몰아 들으며

결리는 허리엔 파스 붙이고

수박씨처럼 붉은 외로움 속에 박혀 살자,

라고 마음먹고

남은 삶을 달랠 수 있을까?

 

2

 

사는 건물을 바꾸지 않고는 바꿀 수 없는 바램이 있다.

40년 가까이 아파트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나의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거니 생각했다.

마지막 디딤돌에서 발을 떼면

마련한 집의 담을 헐고

마당 절반에 꽃을 심자.

야생화 밟지 말라 표지 세워논 현충원 산책길엔 도통 없는

노루귀 돌단풍 은방울꽃

그래, 몰운대(沒雲臺)에서 눈 크게 뜨고 만난 은방울꽃

카잔차키스 묘소에 열심히 살고 있던 부겐벨리아

루비보다 더 예쁜 루비들을 키우는 노박덩굴을 심자.

겨자씨 비유의 어머니 겨자도 찾아 심자.

나머지 반은 심지 않아도 제물에 이사 와 자리 잡는 풀과

개미와 메뚜기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새들이 들르고

벌레들도 섞여 살겠지.

그래, 느낌 서로 주고받을 마당이 있고

귀 힘 아주 빠지기 전 오디오 볼륨 제대로 올려줄 집이 주어진다면!

오크통에 30년, 책장 구석에 30년, 세상 잊고 산 위스키 앞세워

와인과 막걸리와 칵테일을 모아 친구들을 불러

먼저 가버린 자들도 번호 살아 있으면 문자를 보내

파티를 열자. 바램은 아직 유효하다.

 

3

 

유효할까?

파티 다음 날, 종일 속도 마하 0으로 움직이는 텅 빈 맛이

몸에 버틸 힘을 줄까?

 

가을 들어 처음으로 은행잎이 비행 연습을 시작하는 저녁

동향한 창밖으로

건너편 언덕 아파트의 모든 창들이 일제히 황금향으로 피어난다.

대가(代價) 없이 자신을 태우는 황금의 절창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는

한 해 가운데 이 한때가 가장 마음에 든다.

‘가장’이라는 말에는 지금까지라는 뜻이 숨어 있고

다음은 텅 빔?

조금 전 건물 입구에서

시들고 있는 꽃에게 안부를 물었다.

코 끝에 맴돌자마자 사라지는 향기로

꽃은 답했다. 텅 빔?

바램의 속내가 가짐인가 텅 빔인가?

햇빛 스러지면 한 자락씩 황금에서 어둠으로 바뀌는 창들이

차례로 물음을 던진다.

 

4

 

그간 군(郡)에서 주차장 집어넣고

매점과 화장실 내고 길 펴고 넓혀

오르내리는 맛을 한껏 줄인 몰운대,

발걸음 멈추게 하던 제비꽃 달개비들 사라지고

숨었다 들키던 은방울꽃 자취 감추고

미끄러워 마음 잡아주던 바윗길은 보이지 않고

올라보면, 시야 가득 차오는 비밀하우스들

뜬구름도 뜨지 않고

아 ‘몰운대’에서 풀어난 몰운대!

그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해

강원도에서 차를 몰다 덜 살고 싶은 때면 슬그머니 들려

낯에는 대에 올라 다른 아무 데도 눈 주지 않고

밤에는 모깃불 피워놓고 모기 침 쿡쿡 맞으며

답답함에서 풀려나리라던 긴 긴 꿈에서

이제 새삼 놓여나지 않아도 괜찮게 되었는가?

영영 놓여나지 못하게 되었는가?

 

5

 

바위틈에 발톱 박고 서 있는 아무 다섯 그루

바로 뒤에 야트막한 초막

비어 있다.

그 뒤로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말없이 넓게 펼쳐진 물

물 건거 그림자 하나 없이 커다랗고 깨끗한 산.

원나라 화가 예찬(倪瓚)의 한없이 맑고 적적한 산수는

은둔 신호만 켜지면 모든 것 놔두고 들어가

신선인 듯 가볍게 거닐고 싶었던 곳.

오늘 그의 그림 다시 들여다보니

사람들도 짐승들도 그냥 들여다보기만 했을 뿐

멧새 하나 날지 않는다.

들어오려면 그림자도 놔두고 오라?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 한 병 차고 들어가

물가에 뵈지 않게 숨겨논 배를 풀어 천천히 노를 저을까?

건너편을 겨냥했으나 산이 통째로 너무도 크고 맑아

무심결에 조금 더 무심해져

느낌과 꿈을 부려놓고 그냥 떠돌까?

 

바람이 인다. 갑자기 구름 떼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여기저기 물기둥들이 솟아 상체를 흔들고

얼음처럼 투명한 해가 불타며 하늘 한가운데로 굴러 나온다.

바위에 발톱 박은 나무들이 불길처럼 너울대자

부리 날카론 새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몰려든다.

느낌과 상상력을 비우고 마감하라는 삶의 끄트머리가

어찌 사납지 않으랴!

예찬이여, 아픔과 그리움을 부려놓는 게 신선의 길이라면

그 길에 한참 못 미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간히 들리는 곳에서 말을 더듬는다.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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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13.04.10 03:08:04

 오호.. 저보다 조금 늦으셨네요 목사님!
황동규 시인이 이제 칠십도 반을 넘기셨다는데
삶의 혜안으로 쓰신 시들.. 참 좋습니다.

p.s.. 확실히 몰라 찾아보니 1938년 4월 9일 생이시네요.
이곳은 오늘 4월 9일인데..  목사님의 글도 4월 9일에 쓰신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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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4.10 14:10:08

미국에 계시면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저 책을
벌써 구입했단 말이군요.
대단하시에요.
근데 내가 황 선생님의 생일날
그분의 시를 올렸군요.
이런 우연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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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2013.04.10 08:29:45

오늘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해도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겠습니다.~~
오늘도 사는 기쁨이 충만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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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4.10 14:12:10

그렇지요.
소소한 일상에 충실한 것도 
전문적인 구도자들의 높은 경지 못지 않겠지요.
봄이 더디네요.
바람 불고,
구름 많고,
싸늘하네요.

[레벨:11]질그릇

2013.04.10 14:27:23

바람이 몹시 불고 있는 속초입니다.
산간에는 눈도 쌓이는 날들이 계속되는군요.
시집을 사러 서점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소소한 일상에 충실하고 있답니다.ㅎㅎ
따뜻한 봄소식을 기다립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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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04.10 14:37:04

질그릇 님이 계신 속초는
여기보다 바람이 더 세겠군요.
휴전선도 더 가깝구요.
기다리세요.
봄소식을 화끈하게 전할 순간이 올 겁니다.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3.04.10 20:47:01

박목사님,
저도요. 어제밤 저 시 읽다가
내가 시집을 언제적에 샀었나? 했어요.^^
그래서 냉큼 한 밤중에 질렀어요.
기다려지네요. 연애편지 기다리는 맨치로.ㅎㅎ
그러고 보니 이 분 시 중에 "즐거운 편지"가 있네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던,
젊은친구들이 엄청 좋아했다네요.

목사님, 목사님의 '소소한 일상이야기' 기다려져요.^^
여기도 엄청 바람불고,
이러다 목련꽃 다 떨어질까 걱정되어요.
profile

[레벨:38]클라라

2013.04.13 13:36:06

나른한 오후,
어제 배달 된 <사는 기쁨>을 집어 들었습니다. 
"나두 시집 샀다!"
인증으로 한 편 읊어보려구요. 홍홍...
제목은 "하루살이"입니다.

호기심에 홀려 머뭇대다
지도에 채 오르지 않은 산길로 들어섰다.
투덜대는 차 달래며 풀 듬성듬성 난 돌길 천천히 달려
벼랑 가를 돌자 무덤이 한 채,
지난 비에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있었다.

차 돌리려 뒤걸음치다 후미등 하나 깨트리고
앞으로 빼다 나무 그루터기에 범퍼를 대고
헛바퀴를 돌렸다.
시동 끄고 차에서 내리자
무엇엔가 막 씻긴 듯한 고요
수평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날개 쫑긋 단 단풍나무 씨들이
무얼 하러 오셨냐는 듯 각기 제 곡선을 그리며
가볍게 주의를 맴돌았다.

눈어림으로 차 돌릴 자리를
재보고 다시 재보았다.
바퀴를 안고 짓이겨진 쑥부쟁이들,
걱정스레 해가 지고 있었다.
바퀴 꺾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차에 오르려는 손등에
가벼움 하나가 내려앉았다.
인간의 입김을 타보려는 씨도 다 있네.
후 부니 의외로 위로 날았다.
아, 하루살이, 자신을 우습게 보며 즐길 내일마저
우습게 보는!

자신을 우습게 보며
즐길 내일마저 우습게 보는
하루살이!
아, '하루살이 영성'..이여!!

[레벨:11]질그릇

2013.04.16 07:35:19

박집사님,
저도 신청한 시집을 받아 "하루살이"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ㅎ
시인들의 세계는 어쩜 그렇게 넓고 깊은 사유가 담겨 있는지....

많은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만남의 시간도 많지 않았는데
집사님은 가끔씩 생각이 나고 댓글에서 만나면 괜히스리 반갑고
댓글이 없을 때는 궁금하고 했답니다.
그곳에서도 서울 샘터교회에 올라가시 것 같더군요^^
모쪼록 건강하시고, 기쁨 가득한 시간들 보내세요.
주님의 은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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