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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예수의 첫 표적으로 인정된다. 요 2:11절은 이렇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 전승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 사건은 기독교적인 성격보다는 이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헬라 신화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사람들에게 포도주는 생활필수품이었다. 거기에 얽힌 에피소드는 지천이다.
이 표적으로 예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예수의 영광’이다. 그것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든지 차용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영광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신 감각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을 찾는다. 그걸 이상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문제는 그런 감각적인 것에 머물러서 다른 것을 못 본다는 것이다. 마치 남편이나 아내의 사랑을 선물로만 확인하려는 태도와 비슷하다.
2C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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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표적으로 예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예수의 영광’이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것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든지 차용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시고
다음 페이지에서는
다음 페이지에서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냐, 딱 부러지게 말하라고 다그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말해야겠다.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지 않았다.
이 문제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말해야겠다.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물리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는 ‘온전한 사람’이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예수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라고 하시니..
예수는 ‘온전한 사람’이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사람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예수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라고 하시니..
지난 3월 26일 매일묵상은 <존 머쿼리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란 제목이더니
이 페이지는 그러면
<요한복음 기자가 되신 정용섭 목사님 내지는 하나님이 되신 정용섭 목사님> 쯤으로
제목을 바꾸는 게 어떨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또
“손가락만 보면 안 되지만
손가락도 보아야 합니다.
손가락을 보는 것 자체로 간단한 게 아니지요.
우리 눈에 많은 비늘 비슷한 것이 끼어 있으니까요.”
라고도 하시는데..
“손가락도 보는” 거야 뭐 그리 “간단한 게 아닌” 것이 되어야 하는 일까지도 아니지만
그 손가락이 되어 보려고 하는 손가락 자체에 “끼어 있는 많은 비늘 비슷한 것”과
그 손가락이 되어 보려고 하는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엉뚱한 방향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건
“간단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이런 “간단한 게 아닌” 문제에 있어서의 최선의 해결을 위한 접근 방법이란 기도 가운데
“그 손가락이 되어 보려고 하는 손가락”과
맨투맨으로 직접 대화하는 것이라는 게 아닌가 싶었더니만
그런 비밀 댓글 등등을 통한 단독 대화에 의한 지원 시도, 즉
선의에서 나온, 그 같은 최선의 노력의 “실수”(?)란 건
선의에서 나온, 그 같은 최선의 노력의 “실수”(?)란 건
“그 손가락이 되어 보려고 하는 손가락”으로부터는 “냉소적”인 시니컬한 반응으로
일언지하에 거부되는 한편으로, 아울러
소위 그 “비늘 비슷한 것”들을 놓고 거드는 그 주위 “빠” 부대인지 뭔지의
적반하장 악질 사이버 폭력들이나 그 선의의 “실수”에 대한 대가(?)랍시고 몰려들 나오는가 하면
그 같은 악질 사이버 폭력에 방조로 협업하는 그 “친구”과 “이웃”의 "행태들"이나
그 선의의 “실수”에 대한 “대응”(?)이랍시고 나오곤 하니..
선의가 통하지 않는, 이런 별천지 '세상'의 상황이란 건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최선이자
그 “빠” 부대 일원 말마따나 이런 별천지 '세상'의 상황이란 건 곁에서 그냥 “구경”이나 하는 게
최선이다 라는 말이 있는 게 아마도 그래서 그런 듯.. — 그리고,
'그분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촛대 사이에”(계 1:13) 계신 분의
'그분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촛대 사이에”(계 1:13) 계신 분의
그 “불꽃 같은 눈빛”(계 2:18)과 그 “좌우에 날선 검”(계1:16, 2:12)이
그 촛대 간검(看檢)을 위한 행정 수행에 결단코 “실수”가 없으시다는 확고한 사실은
"성경문자주의에 빠진"(?), "사리분별이 안 될 정도로 순진한"(?) 자들이
아닌 자들이라도 지키는 믿음 내용 중 하나.
그 촛대 간검(看檢)을 위한 행정 수행에 결단코 “실수”가 없으시다는 확고한 사실은
"성경문자주의에 빠진"(?), "사리분별이 안 될 정도로 순진한"(?) 자들이
아닌 자들이라도 지키는 믿음 내용 중 하나.
목사님,
"성서기자의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봐라,"
이 말씀이군요.
목사님께서는 얼마전 요한복음 묵상 <은혜와 진리>편에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그 은폐된 세상과
그 생명을 드러내는 능력이라고 본다"라고 하셨는데,
저는 이 요한복음(성서)도 은폐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요.^^
이 은폐된 성서, 그 성서가 우리에게 "나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를
드러내 주는 사건, 그 사건이 성서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실로, 우리에게는 동터오르는 아침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새벽 저에게 그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