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1일
광야의 영성
세례 요한은 누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 따라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규정되었다. 요한은 요단강 서안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래서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한다. 초기 기독교에 세례가 성찬식과 더불어 중요한 종교 의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크다. 그런 흔적이 사도행전에 종종 나온다. 문명과 거리가 먼 광야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요한의 설교를 들은 민중들이 어떤 감동을 받았을지는 상상이 간다. 설교에서도 짚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는 광야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까지 오는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 그 시절이 그들에게는 영적으로 절정의 순간이었다. 매일 하루치의 먹을거리로 주어진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는 게 그 증거다. 하루치의 먹을거리에 매달린다는 것은 한편으로 불안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평화다. 그게 왜 불안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으니 평화인 이유만 짚자.
우리가 짜증스럽고 불만스럽게 사는 이유는 소유가 남보다 못하다는 데에 있다. 똑같이 가난하면 삶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군대 생활을 보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는 부대원들은 다 그런 생활을 감수한다. 그것 자체가 불행의 절대적인 요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나와 메추라기는 아무리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루치 이상을 소유할 수 없는 먹을거리였다. 일주일 먹을 양을 거둬들여도 하루가 지나면 그게 다 썩어버렸다. 이것보다 더 공평한 세상은 없었다. 더구나 하루치의 양식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능하게 했다.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십계명을 비롯해서 율법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런 광야의 영성이 21세기 저자거리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가능할까? 여기에 대해서 나는 대답하지 않겠다. 다만 이런 영성이 있는 사람만이 이사야처럼, 세례 요한처럼 ‘외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말만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