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1일
성모 마리아
어제 설교 앞부분에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서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몇 마디 했다. 15세 전후로 추정되는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임신한 사건으로 인해서 구설수에 시달렸을 거라고 말이다. 소위 동정녀 마리아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이 아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그 사실을 말하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과 나머지 서신들은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동정녀 보도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들어온 게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들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초기 기독교에 있었다. 이 문제는 복잡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설명하지 않겠다.
한 인간으로서, 또 한 여자로서 마리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죽음이다. 어머니는 본성적으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아버지보다 강하다. 특히 장남에 대한 마음은 남다르다. 마리아도 장남 예수에 대한 마음이 유별났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마음을 뺏겨 결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급기야 출가해버린 아들 예수는 마리아의 가슴에 못을 박은 건지 모른다. 예수가 귀신 들렸다거나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이니, 그 상황이 어떨지 상상이 간다. 마리아는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예수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예수를 집으로 끌고 오지는 못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가족이냐?’하는 매정한 말만 전해 들었다.
예수는 출가 삼년 후에 십자가에 처형당한다. 그때가 마리아 나이 사십대 후반이었다. 예수의 동생들은 당연히 시집가고 장가갔을 것이다. 장남 예수만 떠돌이처럼 살다가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도 이런 사건 앞에서 크게 당황했는데, 어머니 마리아야 오죽하겠는가. ‘이 어미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내 아들 예수가 저렇게 죽었단 말이냐.’ 하고 자책했을까, 하나님을 원망했을까, 그저 망연자실에 빠졌을까?
미켈란젤로가 ‘피에타’ 상에서 묘사한 마리아의 모습은 자신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눈치 챈 여자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거룩한 그것이었다. 예수 잉태 고지 앞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한 것처럼 예수 죽음 앞에서도 똑같은 태도가 아니었겠는가. 절정의 신앙은 결국 순종이다.
대리석을 깎은 작품인데 얼마나 세밀하고 부드러운지 진흙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똑같은 작품의 디테일이다. 실제 몸처럼 생생하다.
40대 후반의 유대인 여자 치고는 너무 곱다.
미켈란젤로는 예수 출산하던 때의 마리아와
십자가에 죽은 아들을 무릎에 앉힌 마리아를
일부러 똑같은 모습으로 형상화한 같다.
저 표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