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9일
규범과 설교
골 3장에는 악덕, 또는 패덕 항목 다섯 개와 선한 덕목 다섯 개가 나온다.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 그것이다. 설교에서 짚었지만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용어들이 성서에는 많이 나온다. 갈 5:22,23절에는 아홉 개나 열거되었다. 사랑, 희락,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등이 그것이다. 이것 외에도 신구약성경에는 무수하게 많은 윤리적 규범들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은 이런 용어 자체를 설명하고 우리 삶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설교한다. 성경이 사랑하라고 했으니 사랑해야 한다고, 오래 참으라고 했으니 어떤 경우에도 오래 참으라는 식이다. 심지어는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을 강요한다. 남편이 습관적으로 구타하더라도 믿음으로 참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내하면서 남편을 변화시킨 경우를 예로 든다. 위의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을 그대로 오늘의 삶에 적용시키면서 독재 정권 앞에서 입 다물게 한다. 순종은 설교자들이 가장 애용하는 개념이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말을 근거로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면서, 한걸음 더 나가 그것이 바로 교회와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규범들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설교자들은 대부분의 성경을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이런 설교 앞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한 신자들은 부담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게 설교일까?
물론 신자들이 부담을 느껴도 필요한 말은 해야 한다. 그러나 성서의 규범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설교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규범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맥락을, 신학 용어로 ‘삶의 자리’를 찾아서 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규범적인 정답을 원하는 신자들에게 내 설교는 ‘그래서 어쩌라고’로 들린다.
정목사님 말씀이 옳지만, 당하는 사람은 소리를 낼수록 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관계된 사람까지도 죽음으로 몰아재끼는 상황들땜에 군소리 없이 당할수밖엔 없는 거였을수도 있는데요..
그 규범속에 살았고, 살아왔던 저로서는 그때의 상황이 그 설교들이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되는것이고, 열받는 설교지만, 그또한 하나님이 허락한 환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데..
이끄심속의 한과정이요.. 이렇게 생각하는것 또한 세뇌된 것일까요? ㅎ 잘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