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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성령강림절 조회 수 8303 추천 수 0 2019.07.28 23:11:29
설교듣기 : https://youtu.be/4BRXthkAgxY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호세아 1:2-10 

살아계신 하나님

1:2-10,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2019728

 

2.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3.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4.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5.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6.고멜이 또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7.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8.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고대 이스라엘에는 사회적으로 매우 특이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그들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소명에 따라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신탁(神託)을 문서로 남긴 선지자들은 각각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문서를 시작합니다. 호세아의 경우는 매우 특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게 아니라 결혼하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평범한 결혼이 아니라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위 구절 후반부에 나오는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음란하다.’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한다는 뜻입니다. 우상숭배, 즉 바알을 섬기는 백성들을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선지자의 일인데, 호세아는 그런 일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음란한 여자를 택해서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의 속삭임처럼 들립니다. 호세아는 이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고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아 세 남매를 낳았습니다. 첫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로, 둘째인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로, 셋째인 아들 이름을 로암미로 지었습니다. 각각의 이름은 역사적으로나 뜻으로 볼 때 불행한 운명과 연결됩니다. 이스르엘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이었고, 로루하마는 긍휼이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의미이고,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라는 뜻입니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요?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고, 자식들에게 저주받는다는 의미의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의견들이 있습니다. 호세아의 결혼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교훈을 위한 비유나 알레고리(寓意)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근거 없는 이야기였다면 이런 알레고리가 나올 까닭이 없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더 정확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세아가 아내로 선택한 고멜은 본문에서 음란한 여자로 나옵니다. 신전 창기였다는 뜻입니다. 신전 창기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고대 가나안 종교를 다루는 우가릿 문서에 따르면 고대 바알-신전에는 제사장만이 아니라 남녀로 구성된 신전 창기가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순전히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산과 풍년이라는 종교적 목표를 위한 거룩한 종교의식으로 매음 활동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그런 바알 숭배의 종교의식을 비판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호세아는 신전 창기인 고멜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본다면, 두 사람이 어릴 때 단짝 사이였지만 고멜의 집안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신전 창기가 되었다가 나중에 호세아가 찾아가서 결혼하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의 결혼은 불행했습니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이 이스라엘의 불행한 역사와 직결된다고 생각한 호세아가 그 불행한 결혼 마저 자신을 선지자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호세아의 관심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운명이었습니다.

호세아가 선지자로 활동한 시기는 기원전 750-725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우리로 말한다면 일제에 의해서 국권침탈이 이루어진 1910년 바로 이전까지 25년 동안 활동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절인 기원전 787-746년에 잠시 번영을 누렸으나 그 후로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나라의 힘이 쇠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요인은 아시리아 제국의 팽창 정책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733년에 이스라엘에 인접 국가인 아람 왕국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함락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훗날 반()아시리아 외교정책을 펼치다가 기원전 722년에 수도 사마리아가 무너졌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쇠락 원인이 바알 숭배에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바알 신앙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근동 지역에 광범위하게 펴져 있었습니다. 이 신앙의 핵심을 요즘 말로 바꾸면 기복주의입니다. 고대사회는 농사를 주업으로 삼았습니다. 농경 목축 사회입니다. 양과 소가 새끼를 많이 낳고 풍년이 들도록 도와주는 신이 바로 고대 가나안 지역의 바알입니다. 부를 보장하는 신입니다. 당시에는 자식도 재산에 속했기에 자식을 많이 낳아야만 했습니다. 바알은 다산까지 관리하는 신이었습니다. 풍년과 다산이 인간 생존의 두 기둥이기에 바알 신앙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아무리 비판해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기복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돈을 신처럼 섬깁니다. 이를 무조건 매도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바알 신앙을 극도로 배격한 이유는 풍년과 다산을 삶의 목표로 하면 결국 삶이 훼손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 역시 풍년과 다산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 없이는 인간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땅과 후손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고 후손을 밤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주신다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그런 진술의 형식만 보면 바알 신앙과 하나님 신앙에 차이가 없지만, 그 내용에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알 신앙에서는 풍년과 다산이 목표였지만 하나님 신앙에서는 하나님이 목표였습니다. 바알을 믿는 사람들은 풍년과 다산에서만 신을 경험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나라가 망해도, 가난해져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는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줄기차게 전했습니다. 풍년과 다산이 생명의 토대가 아니라 하나님 신앙이 생명의 토대라는 것입니다. 이를 강조하려고 선지자들은 조상들의 광야 40년 역사를 종종 거론했습니다. 이 역사에서 하나님이 생명의 토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가장 초라한 먹을거리였습니다. 풍년이나 다산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라고 말할 정도로 궁핍했던 시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켜주셨습니다. 그 시절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영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선지자들이 말하는 이 역사를 기억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앙에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가 제공하는 가르침은 거리가 멀고 현실은 손에 잡혔기에 가나안 문명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숭배에 반복해서 떨어졌습니다. 이 바알 숭배를 선지자들은 간음이라고 표현했고, 오늘 호세아는 음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풍요가 그럴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호세아는 바알 숭배에 떨어진 자기 백성들을 무조건 비판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매우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이라고 말입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2절에 나오는 음란한 자식과 대비됩니다. 음란한 자식들은 그 이름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들이 피를 뿌리며 싸워도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이와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정을 전폭적으로 받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에게 붙은 살아계신이라는 수식어가 중요합니다. 선지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이 수식어를 바알에게는 붙이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죽은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이 혼란스럽습니다. 바알이라는 신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풍년과 다산을 약속하는 신입니다. 21세기 현대인들도 대다수가 바알을 숭배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오랜 인류 역사에서 풍년과 다산, 즉 기복적인 요소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절대적이라는 증거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바알을 신으로 섬긴다고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여기서 벗어나는 일은 영적으로 준비가 된 소수의 사람 외에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호세아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고 외쳤습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바알은 거짓 신, 즉 죽은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호세아의 말이 옳은가요? 망상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하나님이 살아있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살아있다는 말은 활동한다, 움직인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숨도 안 쉬고 먹지도 않기에 활동이 없지만 산 사람은 부단히 생명 활동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창조로부터 시작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창조주로 활동합니다. 성경은 그 사실을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활동을 눈여겨보라는 뜻입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해와 달은 뜨고 지며, 벌레가 기어 다닙니다. 우리 몸 안에서 놀라운 생명 활동이 전개됩니다. 심장이 뛰면서 피가 우리 몸 구석구석을 누비고, 폐가 공기를 끌어들이고 쏟아냅니다. 위와 내장이 움직이고, 그 안에서 수많은 균이 활동합니다. 지진과 화산 폭발과 빙하와 바닷물의 움직임도 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입니다. 지구가 살아있으니 지구를 지으신 하나님도 살아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구를 비롯하여 우주의 근원에 관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습니다. 풍년만이 아니라 흉년도 궁극적으로는 생명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이 바이러스 공격을 받아서 아픈 것도 생명 활동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 활동의 신비와 능력에 눈을 뜨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서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으나 가장 저주스러운 재앙을 당합니다. 뭔가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라는 친구의 조언을 거절합니다. 재앙은 하나님이 더 큰 은총을 내려주기 위한 시련이라는 친구의 충고도 외면합니다. 38장부터 세상의 신비와 능력이 묘사됩니다.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38:16-18). 그제야 욥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했다고 회개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42:5,6).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신비와 능력 앞에서 자신을 무한히 낮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작아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세월이 갈수록 더 절실하게 느끼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찬양하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삶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지를 자신들이 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잘못 아는 사실도 많습니다. 소위 태극기 부대로 일컬어지는 분들은 자신들이 세상 이치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가짜 뉴스를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고 여깁니다. 얼마 전에 일본 우익 세력을 등에 업은 아베 정권이 대한민국을 향해서 경제 보복을 시도했습니다. 아베의 행위가 세계 IT 산업의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전 세계의 관계자들이 아베를 비판합니다. 대한민국 일부 정치 집단과 언론은 일본 아베도 잘못했으나 대한민국 정권도 잘못했다고 양비론을 펼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강도와 싸우는 와중에 왜 강도 만날 짓을 했느냐고 따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관입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다가 결국은 친일적인 행태를 보이는 겁니다. 사람의 인식은 이렇게 얄팍하고 제한적입니다. 혹시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얄팍하고 제한적인 인생관에 파묻혀서, 그것을 인생의 모든 것으로 알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고백과는 동떨어져서 사는 건 아닐까요?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평생 애를 쓰지만, 생명 충만과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건 아닐까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릴 것이라는 호세아의 메시지는 지금 여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혹은 딸로 살아야 한다는 충고이자 격려입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지금 저에게 묻고 싶은 분들은 안 계시겠지요. 이미 그 답은 앞에서 주어졌습니다. 풍년과 다산 이데올로기에 떨어지지 않고 훨씬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창조와 생명의 깊이에 마음을 여는 삶이 대답입니다. 거기서만 영혼의 만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는 영혼의 만족이나 생명 충만처럼 관념적인 말은 필요 없고 그저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재미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큰 욕심 없이 소박하게 죽을 때까지 건강하고 가족들이 무탈하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큰 욕심이 없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욕심이 많은 겁니다. 그렇게 무탈하게 사는 삶 자체가 드물고, 그렇게 산다고 해서 재미있는 삶도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의 인생살이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이미 바알 신앙에 길들어서 다른 차원의 삶이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는 나름 최선이겠으나 더 새로운 차원을 모른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삶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의 삶은 초등학문에 속합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순리에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공허합니다. 바울은 갈 4: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을 얻었다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풍년과 다산을 미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실제로는 죽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그러니 생명의 세계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바알의 음란한 자식들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어 큰 능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아가도록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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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은혜

July 30, 2019
*.229.148.165

유진 피터슨이 그랬다지요.

청중이 하나나님 나라의 메세지를 듣고도 무반응이라면,

당신이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때문이거나, 그들이 메세지를 오해했기때문이다.

어떻게 급진적인 메세지를 듣고도 삶이 흔들리지 않을수 있는가...라고요.


우리가 바알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면서도
오늘 본문 말씀이 내 신앙적 양심에 비수가 되어
'내가 바로 음란한 자이구나... ' 하며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이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걸 보면,
설령 이보다 더 살벌한 표현으로 우릴 향해 경고하시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안할만큼,

 이 시대 설교자들이나 청중이나 모두 후안무치의 탈을 쓴채
그걸 서로 눈감아주는,

속고 속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게 아닐런지요. 

설마 내가 음란하기까지야....
오늘 소름이 돋는 경고 말씀을 남 얘기듣듯 1회용 훈계로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만다면,
하나님도 어쩌지 못하는 내 변하지 않는 철옹성같은 속사람을 포장하고자
경건의 모양은 더 강고해질터이니
그 악순환속에서
'창조능력'이나
창조물을 유지 보존하시는 '생명활동'이란 표현은
피안의 세계에서나 나올법한 용어로 치부할수 밖에요

설교문을 여러차례 읽고서
전개과정에서 논리적인 비약이 있는듯 해서요.

(실은 설교문에서의 비약이 아니고 본문으로 인용된
하나님 말씀에 비약이 있어 보였답니다 ㅎㅎ)

음란한 자식들의 음란이 끊이지 않을 것임에도
그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자식들로 여김을 받게될것이다..

우리가 음란함에서 돌이킴과 관계없이,
계속 음란할지라도,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음란한 우리들을 당신의 아들로 만드실 것이다..

이렇게 해석함이 맞겠죠?
십자가와 부활을 모든 설교의 핵심키워드로 제시하시는
목사님께서 왜 이번 설교 말미에는 이를 빠뜨리셨을까..
음란함에서 회심할 가능성이라고는  도무지 없어보이는 작금의 크리스천들이

어찌 하나남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수 있단 말인가..

첨에는 그 비약이 살짝 의아했었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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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30, 2019
*.182.156.135

더운 날씨도 그런대로 지낼만하지요?

성경 본문에 비약이 있다는 걸 눈치 채셨다니, 안목이 날까우시군요.

음란한 자식들과 하나님의 아들들 사이의 비약은,

회개와 변화된 삶에 대한 전제조건이 없으니...,

독자들이 채워넣어야 할 틈입니다.

1) 부스러기 님의 말처럼 돌이킴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속량이 개입될 수도 있고

2)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으로 돌이키라는 강력한 충고와 격려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

저는 두번째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설교 말미에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바울의 진술을 통해서 암시만 했을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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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流水不爭先

July 31, 2019
*.172.97.215

하나님의 자녀들로 선택받은 사람들에 있어서 사람의 노력이 개입될수 있을 까요

하나님의 선택은 누구에게나 있지않을까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예외가 있나요


다만 그것을 모른다는 현실이 있을뿐이죠

풍년과 다산때문에

풍년과 다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서 주님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 저의 남은 삶을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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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uly 31, 2019
*.182.156.135

하나님의 자녀들로 선택받은 사람들에 있어서 사람의 노력이 개입될수 있을 까요

-선택받았다는 말은 사람의 노력까지 이미 포함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누구에게나 있지않을까요

-예,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택은 열려 있습니다. 누구나 숨을 쉴 수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예외가 있나요

-예외는 없지만 사람이 거부함으로써 예외 상황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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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 성령강림절 못 하실 일이 없는 하나님 (창 18:1-15) [6] 2020-06-14 9185
852 성령강림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고후 13:11-13) [4] 2020-06-07 8047
851 성령강림절 성령 공동체의 길 (고전 12:4-13) [2] 2020-05-31 8144
850 부활절 영광과 영생 (요 17:1-11) [4] 2020-05-24 8251
849 부활절 사랑과 계명 (요 14:15-21) 2020-05-17 9044
848 부활절 어두운 데서 기이한 빛으로! (벧전 2:2-10) [4] 2020-05-10 8228
847 부활절 성찬 예배 공동체 (행 2:42-47) [2] 2020-05-03 7649
846 부활절 눈이 밝아진 제자들 (눅 24:13-35) [2] 2020-04-26 9154
845 부활절 예수의 손과 옆구리 (요 20:19-29) [2] 2020-04-19 11826
844 부활절 "위의 것을 찾으라!" (골 3:1-4) [2] 2020-04-12 11811
843 사순절 주의 손과 주의 얼굴 (시 31:9-16) [6] 2020-04-05 8533
842 사순절 여호와의 손과 영 (겔 37:1-14) [2] 2020-03-29 8131
841 사순절 예수는 심판 주다! (요 9:35-41) [2] 2020-03-22 9134
840 사순절 생존의 위기 앞에서 (출 17:1-7) 2020-03-15 8969
839 사순절 영생과 예수 (요 3:1-17) 2020-03-08 8090
838 사순절 의와 생명 (롬 5:12-19) [2] 2020-03-01 8148
837 주현절 영광스러운 미래의 생명 (마 17:1-9) 2020-02-23 7582
836 주현절 "생명을 선택하라!" (신 30:15-20) [8] 2020-02-16 9984
835 주현절 십자가에 못 박힌 이 (고전 2:1-12) [8] 2020-02-10 8313
834 주현절 가난한 사람과 하늘나라 (마 5:1-12) 2020-02-02 12098
833 주현절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 4:12-23 [2] 2020-01-26 7972
832 주현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7] 2020-01-19 8171
831 주현절 하나님의 정의 (사 42:1-9) [9] 2020-01-13 9701
830 성탄절 하나님을 본 사람 (요 1:10-18) 2020-01-05 9842
829 성탄절 환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 (사 63:7-9) [2] 2019-12-29 8740
828 성탄절 영광과 찬송 (눅 2:8-20) 2019-12-25 13138
827 대림절 예수와 임마누엘 (마 1:18-25) [5] 2019-12-22 14559
826 대림절 "파루시아" (약 5:7-10) [5] 2019-12-16 11065
825 대림절 알곡과 쭉정이 (마 3:1-12) [6] 2019-12-08 17586
824 대림절 전쟁 연습, 평화 연습 (사 2:1-5) [7] 2019-12-01 11589
823 창조절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골 1:1-20) [6] 2019-11-24 10540
822 창조절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는 날! (눅 21:6-13) [8] 2019-11-17 9648
821 창조절 두려워 말라! (학 1:15-2:9) 2019-11-10 8262
820 창조절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눅 19:1-10) [9] 2019-11-03 13856
819 창조절 여호와의 날에 구원 얻을 자 (욜 2:23-32) 2019-10-27 10294
818 창조절 갈급한 영혼 (눅 18:1-8) [8] 2019-10-20 12989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 2019-10-14 8257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9683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10842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7920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9854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9740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10643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8127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8114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9879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9628
»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8303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10141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12652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9330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8269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3570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9300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10060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9428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11260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10103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7871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10536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9526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8688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8657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8566
789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8719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8153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8568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9834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8653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7936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3633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11198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9364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13640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9104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8328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1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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