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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nYmdvd3eFW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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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afreecatv.com/nfermata |
성경본문 : | 에베소서 4:25-5:2 |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성령강림 후 12주, 2018년 8월12일
4:25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5:1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초기 기독교인의 덕목
저는 기독교 신앙에서 교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종종 발언했습니다. 이런 발언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삶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믿음만 중요하다는 오해가 그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삶이 중요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실제의 삶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공허한 지식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 지식은 실제로 아는 것도 아닙니다. 간혹 세상 사람들로부터 기독교인들이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은 교회만 열심히 다니지 우리보다 나은 게 전혀 없어. 인간미도 없어. 저렇게 예수 믿을 바에야 믿지 않는 게 낫지. ...’ 여러분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습니까? 각각 다를 겁니다.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다운 품격을 인정받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믿는 자로서의 특징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과 언어습관과 가치관에 머물러 있기에 저들과 구별되는 삶의 내용이 없는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는 기독교인이 추구해야할 덕목들이 나옵니다. 문장의 특징은 부정과 긍정이 교차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마라’와 ‘하라’의 교차입니다. 25절은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합니다. 28절은 도둑질하지 ‘말고’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합니다. 29절은 더러운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선한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31,32절에서는 악독과 노함과 비방 등을 ‘버리고’ 서로 친절하고 불쌍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의 행동은 소극적으로 악에 속한 언행을 멀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에 속한 언행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에도 이와 비슷한 항목들이 나옵니다. 갈 5:19-21절에는 육체의 일이 열거되고, 갈 5:22-23절에는 성령의 열매가 열거됩니다. 육체의 일은 버려야 할 것들이고, 성령의 열매는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기, 분열, 이단, 방탕은 버려야 할 것들이고, 평화, 인내, 자비, 온유 등은 취해야 할 것들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곳곳에 이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윤리적 전통을 중요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좋은 전통은 오늘날에도 유지되고 확산되어야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 중에서 31절과 32절만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버려야 할 내용을 다룬 31절을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 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
여기에 여섯 항목이 나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 해당됩니까? 모질고 악독스러운 말이라는 뜻의 ‘독설’을 평소에 쏟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이런 건 속된 표현으로 뚜껑이 열렸을 때 나옵니다. 어느 정도 인격적으로 훈련이 된 사람에게는 거리가 먼 특징입니다. ‘격정’은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운전하다가 접촉 사고가 났을 때 간혹 격정에 휩싸이는 이들을 볼 수 있긴 하지만 이런 일도 흔하지는 않습니다. ‘분노’는 분해하고 성질을 낸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들은 비교적 흔하게 일어납니다. ‘고함 소리’는 자주 나타납니다. 정치권 인사들도 그렇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욕설’은 조폭 세계의 일상 언어입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 중에서도 평소에 욕을 섞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악의’는 나쁜 마음입니다. 의도적으로 나쁜 마음을 먹는 경우도 있지만 무의식으로 나쁜 마음을 먹는 경우도 잦습니다. 그게 왜 나쁜 마음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 자신은 여기 열거된 항목 중에서 몇 항목이나 관련되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32절에는 적극적으로 취해야 할 항목이 나옵니다. 친절, 불쌍히 여김, 용서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사회가 ‘친절하다’고 느끼십니까? 친절하지 않다고 느끼십니까? 경우에 따라서 다릅니다. 은행이나 백화점에서 일하는 분들은 고객들에게 특히 친절합니다. 공무원들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며칠 전에 제가 살고 있는 북안면의 우체국에 들렸습니다. 국장을 포함해서 세 명이 근무하는 작은 우체국입니다. 제가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그분들은 매우 친절했습니다. 일전에는 ‘커피 한 잔 드릴까요?’라고까지 하더군요. 교회 신자들도 친절한 게 좋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단어를 루터는 ‘헤르츠리히’라고, 즉 ‘진심으로’라고 번역했습니다. 기독교인의 품성에서 진정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말만 그럴듯하게 한다는 비판을 종종 받습니다. ‘형제, 자매’라고 말하지만 진정성이 담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 항목에는 단서가 붙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한 것처럼 다른 이들을 용서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준엄하게 들립니다.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데서 우리가 용서받은 것이 확인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구절이 이에 해당됩니다.
윤리 규범과 실존
멀리 해야 할 항목 여섯 가지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항목 세 가지는 지금 우리 눈에도 우리가 잘 따라야할 규범으로 보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이런 규범들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윤리는 늘 구체적이고 다층적인 상황에서 작동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부부사이라고 해도 좋고, 고부사이라고 해도 좋고, 직장 동교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한쪽은 친절하게 대하는데 다른 쪽에서 친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요즘 말로 저쪽이 ‘갑질’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한쪽이 계속해서 친절하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엡 4:32절은 ‘서로’ 그렇게 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서로’입니다. 한쪽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당신은 왜 성경의 가르침대로 친절하지 않느냐, 용서하지 않느냐?’고 비판당하면 정신적으로 병이 들 수 있습니다. 노예 심리로 떨어집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책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건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이 있다고 합시다. 독재 정권은 시민들의 삶을 일방적으로 부정합니다. 이럴 때 참고 사는 시민들도 있고, 저항하는 시민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독재 권력도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니 저항하지 말라고 하면 기독교 윤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삶에서 우리가 늘 친절하고, 늘 용서를 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윤리는 이처럼 간단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실존적으로 처한 상황에서 자율적이면서도 공동체 지향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성숙한 윤리의식이 필요합니다.
예민한 주제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아직 정확한 대답을 찾지 못한 주제입니다. 안락사 문제가 그것입니다. 존엄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 6개월 시한부 삶을 진단받은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지금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습니다. 진통제로도 그의 고통을 줄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경우의 안락사는 옳을까요, 잘못일까요? 나라마다 다르고, 호주에서는 주마다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입니다. 얼마 전에 연명치료 중단만 합법화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신이 말짱할 때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혀놓는 게 좋습니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의 경우는 판단하기기가 비교적 쉽지만, 정말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는 다음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나 자신이 생각할 때 인간다운 삶이 끝났으니 차라리 의사의 도움으로 편안히 죽고 싶은 경우가 그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 이런 죽음은 자살과 비슷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건 타의이지만 세상을 떠나는 건 자의로 처리하는 게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얼마 전 호주의 백 살 가량 된 교수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들으면서 약물투입으로 죽었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태도를 불신앙적인 것이라면서 무조건 반대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지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위험한 요소가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것이라서 감수할만한 고통을 이유로 생명을 끊을 수도 있고,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주관적이어서 생명 자체가 상대화, 계량화될 수도 있습니다. 젊고 건강하고 활기찬 삶만을 복된 인생이라고 여기는 확신이 만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 문제는 점점 더 깊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가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인간 생명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가 교회 안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안락사 자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삶과 연관된 윤리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해석되고 평가되고 선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짚은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기독교 윤리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그것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고, 바울의 표현을 따르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토대에 놓지 않은 채 온갖 종류의 윤리 규범들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규범을 지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 도덕 철학이나 사회단체에서도 이런 규범들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로마에는 말년에 네로의 스승이 된 세네카(BC 4-AD 64)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과 지혜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 의해서 세련된 도덕규범들이 제시되었습니다. 로마의 도덕규범과 에베소서에 열거된 항목들 중에서 겹치는 대목들이 적지 않습니다. 본문은 멀리해야 할 것들과 붙들어야 할 것들을 열거한 뒤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엡 5:1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는 엡 5:2절은 로마 철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윤리의 초석입니다. 이 사실에서만 기독교 윤리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엡 5: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앞에서 열거된 여러 윤리 항목들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니 당연히 그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역으로 보면 사랑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은 일이 없으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한 기독교인이 이웃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지를 알려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인지를 먼저 봐야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특이합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거나 부부가 사랑하는 차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부모들은 자식을 정성스레 키웁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습니다. 물질도 베풀고 마음도 베풉니다. 자식들은 부모들의 사랑을 통해서 원만한 인격자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희생 제물은 유대교의 제사의식에 관계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자신을 드리는 대신으로 동물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 희생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은 제사를 드린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을 허락하신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인류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 제물이라고 보았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이런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이해가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니 사랑 가운데서 행할 줄 모릅니다. 대신에 그들은 윤리와 도덕문제를 상식적인 선에서, 또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처리할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실제로 그들의 삶을 끌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가 희생 제물로 바쳐졌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해가 일어났으며, 하나님의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혼의 해방입니다. 세상이 강압과 유혹의 방식으로 약속하는 것들은 영혼의 해방과는 거리가 멉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혼의 해방을 허락하십니다. 이걸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더 이상 세상이 요구하는 경쟁과 소유의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충만에 휩싸였기에 부수적인 것에 좌지우지당하지 않습니다. 바둑 고수들은 부분전투에서 손해를 보거나 또는 이익을 내는 것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한판이 진행되는 바둑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이 해방된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잃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웃을 그런 안식과 평화의 빛으로 대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권고가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의 설교 내용에 동의하지만 ‘사랑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실제로는 잘 안된다거나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실감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잘 안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 제시하는 도덕규범들을 문자적으로 고수해야한다는 강박입니다. 이런 강박에 떨어지면 율법주의자가 되고, 율법주의는 우리의 영혼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한 영혼으로는 ‘사랑 가운데서’ 행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희생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문제는 단시일에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무한한 시행착오를 거쳤을 겁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신앙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체념했을지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실제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영혼의 자유를 얻어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오해하여 행한 모든것들이
괴로움으로 되돌아 온것은
삶이 다층적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률적으로
적용하려고 했기 때문이군요.
사랑하기가 따로있고 믿음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예수를 희생제물로 삼으신 하나님 사랑을 알게되어
안식과 평화를 얻은 새로운 존재가 되면
사랑 가운데 행할수 있게 되는군요.
그때서야 친절하고, 불쌍히 여김과 용서를
할수있게 되는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