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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6_UkQendVH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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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afreecatv.com/nfermata |
성경본문 : | 사도행전 8:26-40 |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8년 4월29일
26.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27.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3.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34.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35.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36.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37.(없음) 38.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39.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40.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사도행전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은 물론 바울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이 바울을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초기 기독교를 대표하는 베드로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주도권은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있었으나 그는 사도가 아니기에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아주 특이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오늘 설교 본문에서 주인공으로 활동하는 빌립입니다. 행 8:26절은 빌립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어디로 가야할지를 지시했다고 합니다. 주의 사자가 누군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이거나 빌립의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빌립 스스로 생각한 것을 주의 사자가 알려준 것이라고 표현할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도행전은 문학적으로 수준이 높은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도 문학적으로 해석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걸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은 날개 달린 천사가 빌립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본문에 주의 사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성령(29절)과 주의 영(39절)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빌립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간다게의 고위관료인 내시
빌립이 주의 천사에게서 지시를 받을 때는 지리적으로 중북부에 속한 사마리아에 머물러 있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빌립이 사마리아로 오게 된 이유는 기독교인을 향한 유대교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행 8:1절 이하를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예루살렘에는 열두 사도 외에 나머지 지도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습니다. 그 흩어진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빌립입니다. 빌립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 순교자인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에 속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집사라고 통칭하지만 사실은 지금의 집사라기보다는 사도들 못지않게 권위를 지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반면에 일곱 지도자들은 초기 기독교가 선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표면적으로는 사도들보다 권위가 떨어지지만 실제로는 사도와 비슷한 업무를 감당했습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남쪽으로 내려간 ‘가사’는 유대 쪽에서 볼 때 이집트로 갈 때 횡단해야 할 광야의 출발지입니다. 빌립은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수레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행 8:27절에 따르면 그 사람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가 재정을 책임 진 고급관리’입니다. 지금의 직책으로 바꾸면 국무총리라고 할 수도 있고, 내무장관과 국세청장을 겸한 직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디오피아는 지금의 에티오피아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에디오피아는 지금의 아프리카 수단의 북동쪽에 자리한 ‘누비아’라는 나라입니다. 누비아는 여왕이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집트 왕을 파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그 여왕을 가리켜 ‘간다게’라고 합니다. 여왕 제도인 탓인지 이 사람은 내시입니다. 성지 순례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중입니다. 고급관료이기에 걷지 않고 수레를 탔습니다. 그는 이사야를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에게 다가가서 ‘당신이 지금 읽는 이사야 본문을 이해하시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해석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면서 빌립에게 동승을 권했습니다. 그가 읽던 이사야(53:7,8)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사야의 이 대목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2천 년 전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이 있었던 누비아의 고급관료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묻습니다. ‘이 구절이 이사야 선지자 자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이를 가리키는지 설명해 달라.’ 빌립은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했을 겁니다. 본문은 빌립이 어떻게 말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보도합니다. 빌립이 이사야를 소재로 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저는 앞에서 빌립이 사도들에 비해서 영적인 권위가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약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사도들과 동일한 권위로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이라는 단어를 여러분은 흔히 들었을 겁니다. 신약성경 앞부분에 나오는 네 권의 책을 복음서라고 합니다. 바울의 편지에도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2천년 기독교 영성과 신학은 모두 이 한 가지에 집중됩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구별되는 대목도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간다게의 고급 관리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의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그 복음을 설명해보겠습니다. 누가가 생략한 부분을 복원하려는 것입니다.
세상살이의 원리는 경쟁, 승리, 업적, 성공 등등의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를 두 가지로 줄이면 ‘살아남기’와 ‘이기기’입니다.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까 이 두 단어는 같은 의미입니다. 이게 좋은 뜻으로도 작동되고 나쁘게도 작동됩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살아남는 건 좋은 일입니다. 고대 유인원들은 척박한 환경 가운데서 살아남았습니다. 빙하기에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지 못했으면 지금의 인류도 없습니다. 운동선수들이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런 과정에서 운동 기술이 발전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외국 기업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남북의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정치세력이 그걸 반대하는 정치세력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건 좋은 일입니다. 살아남기와 이기기가 늘 좋게만 나타나지 않는 게 인류 역사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다보니 생명 파괴도 서슴지 않습니다. 교회도 역시 그런 원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종의 성공주의가 우리 삶을 완전히 지배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겸손해져야 하는데 거꾸로 교만해지고 실패한 사람은 열패감에 떨어집니다. 이 문제는 그 어떤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로나 인격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깊이를 경험했습니다.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서 무한 경쟁에 빠져들고, 자신의 성공에 인생을 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의 깊이였습니다. 삶이, 즉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명, 즉 삶은 점수를 많이 받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만족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노력의 대가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나만 알아도 우리의 삶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 열립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지만 이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종의 영적인 공황장애를 앓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고 확신했고 경험했기에 십자가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 죽음을 생명 파괴라고 여겼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이 십자가 처형으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깊이를 뚫어보기는 쉽지 않기도 하고, 안다고 해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수님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운명과 연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제 십자가 죽음과 같은 운명에 떨어진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일종의 구명정입니다. 거기에 올라타기만 하면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명정이 값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예수님 사건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것보다 더 복된 소식은 없습니다. 이 복음을 아는 사람은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빌립의 세례
이사야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빌립에게서 전해들은 간다게의 신하는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행 8:36절이 그 상황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겠다는 말은 정말 통 큰 제안입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일정한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는 개인적으로 베푸는 게 아니라 교인들이 모인 예배에서 베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공적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회 규정보다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만의 세례 의식이 끝나자 빌립은 자기의 길을 가고, 간다게의 내시 역시 기쁘게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후로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은 이 사람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복음 전파에 일익을 감당했을 것으로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빌립이 베푼 세례는 기독교 역사에서 특별합니다. 이 세례 사건으로 인해서 기독교의 선교 방향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에게 세례를 받은 이 사람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프리카 누비아 여왕 간다게의 고급관료입니다.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내시입니다. 유대교 율법에 이런 사람은 배척의 대상입니다. 유대교와의 경쟁 관계에 있던 기독교 입장에서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칫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최초의 이방인 세례입니다. 더구나 이탈리아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푼 베드로(행 10장)보다 빌립이 더 앞서 이런 엄청난 일을 감행했습니다. 빌립의 세례 사건은 기독교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벽을 넘은 최초 사건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복음의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에 대한 인식과 경험의 깊이가 달라졌기에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철옹성 같았던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벽을 넘어서
저는 구체적으로 오늘 한국교회가 복음의 능력에 근거해서 극복해야 할 벽을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산주의라는 벽이 하나입니다. 남북분단 체제가 70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입니다. 우리는 지금 척추에 큰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분단체제를 지속하게 하는 집단 중의 하나는 부끄럽게도 우리가 속한 기독교입니다. 그중에서 개신교회이고, 그 중에서 대형 개신교회입니다. 이들은 북한을 적대시합니다. 전쟁을 치렀으니 그들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라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공산주의를 피해서 남한에 내려온 이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적그리스도로 여깁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정치사상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공산주의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무신론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겠지요.
다른 하나는 동성애라는 벽입니다. 빌립은 이방인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의 동성애자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한국교회, 그중에서 개신교회, 그중에서 대형 개신교회는 동성애자들을 노골적으로 비하하고 적대시합니다. 동성애는 성경이 죄라고 하니 비판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공산주의도 그렇고, 동성애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생명, 즉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방식들은 시대와 민족과 나라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거론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문자적으로 옳은 게 아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다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핵무기가 성경에 없지만 우리는 그것을 악이라고 봐야 합니다.
공산주의의 벽과 동성애라는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좋으나 일단 그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다게의 내시처럼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 하는 입장도 가능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서로 다르다는 사실만 강조하면 복음 전파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공산주의냐 아니면 자본주의냐, 또는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가 아니라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북한 공산당에게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한다고, 공산당이 내려오면 목사를 가장 먼저 처단할 거라고 말하는 분을 만나본 적이 있긴 합니다. 미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북한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구 지역에는 제법 많습니다. 그런 분들의 생각은 9백 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를 증오와 파멸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십자군 전쟁에 단단히 결속된 것이지 복음의 능력과는 거리가 먼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복음 공동체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벽과 차별과 선입견을 넘어서게 하는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그냥 되는 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을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히 채워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설교듣기와 설교 보기는 위 링크 자리에 올렸습니다.
설교보기는 예배실황 아프리카티브이 라이브인데, 이 영상은 한 달 뒤에 사라집니다.
목사님 저 역시 복음의 보편성, 설교의 보편성만큼 고민되지 않는 게 없습니다. 본문을 놓고 빌립과 에디오피아인의 만남과 만남 전후에 대한 보편성을 찾는 게 쉽지 만은 않았습니다. 설교자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제 각각 다르고, 자신이 아는 게 많아서 말하고자 하는 게 다 다르니, '설교와 선동' 사이를 오가며 보편성을 잃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설교자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라는 질문이 필요한 건 아닌지요? 그 질문에 에디오피아 내시와 같은 겸손한 고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특히, 한국 교회에 복음에 대한 이해가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이라는 예쁜 포장지를 씌운 전도를 예수님의 명령이라며, 결국 자기 교회만을 홍보하느라 바쁜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복음의 보편적 '능력'에 위로를 얻습니다.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복음의 장벽을 넘어설 때, 복음에는 누구나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 4.27 판문점의 평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경험한 것 처럼 말이죠. 지금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복음인 남북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한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