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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ZjkiBWYjP8w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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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도행전 19:1-7 |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주현절 후 첫째 주일, 2018년 1월7일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안디옥을 거점으로 삼고 세 번에 걸쳐서 선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기독교가 지금처럼 체계가 잡히기 전이었기에 시행착오도 있었고 기독교 선교사들 사이에 충돌도 종종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에 에베소에 한번 들린 적은 있었으나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3차 선교여행 때에는 본격적으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 설교했으나 큰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자, 유대인 회당을 떠나서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두란노 서원은 에베소를 대표하는 철학자 두란노가 세운 서원입니다. 우리나라의 도산서원과 비슷한 기관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여신 아데미를 섬겼습니다.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만드는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손으로 만든 신을 섬기지 말라는 바울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자 데메드리오라 하는 사업가가 사람들을 모아서 바울을 반대하는 군중집회를 일으켰습니다. 행 19:34절에 따르면 군중들이 두 시간에 걸쳐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치안을 맡은 서기장이 소요를 진정시켜서 겨우 위기를 모면한 바울은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행 19:8절 이하에 나옵니다.
아볼로 이야기
오늘 설교 본문은 이러한 드라마틱한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에베소 교회 내부에서 벌어진 작은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습니다. 행 19:1절은 바울이 에베소에 들러서 교우들을 만났을 때 아볼로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앞 단락인 행 18:24-28절에 나옵니다. 아볼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유대인이지만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 출신답게 이름도 헬라 식으로 지었습니다. 아볼로라는 이름의 원래 발음은 아폴론입니다. 올림포스 12신(神) 중의 하나로서 태양, 음악, 시, 의술 등을 감당하는 신이었습니다. 행 18:24절에 따르면 아볼로는 말을 잘하고 성경 지식이 해박했다고 합니다. 그가 바울처럼 회심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아볼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행 18:25절이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짚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아볼로를 언급하는 이유는 초기 기독교에서 세례 문제가 부각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세례 전통은 세례 요한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세례가 중요한 종교 의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교회에 대거 유입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주장으로 세례 의식을 행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교회 안에서 세례 요한을 따르는 이들과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대립하게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크고 작은 차이로 인해서 이런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수습하면 괜찮지만 못하면 큰 분란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고전 1:10절 이하에 이런 다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고전 1:12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당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여러 지도자들에게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서로 파가 갈렸습니다. 바울은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세례를 베푼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것은 세례를 주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대목에 등장하는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세례를 강조하는 지도자 중의 대표자로 보입니다. 바울의 입장과 다를 수 있기에 그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 행 19:1절은 아볼로를 언급한 것입니다.
성령 세례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령을 받았는가?’ 하고 질문했습니다. 세례를 누구에게서 받았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성령을 받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교인들은 성령을 받지 못했으며,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교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행 19:4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요한의 세례는 기독교 신앙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니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유대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유대 군중들은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파송한 총독이 유대를 통치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유대 민중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제 각각 자기 살길만 찾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고 압박했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마 3:8절이 가리키는 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오늘 본문은 ‘회개 세례’라고 표현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따라서 세례를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이 한 말을 여기서 짚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주목하지 말고 예수를 주목하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마 3:11절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기독교 신앙에서는 회개에 합당한 삶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 세례입니다. 요한은 회개 세례를 베풀었다면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회개 세례는 손에 잡히지만 성령 세례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왜 회개 세례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령 세례를 굳이 고집하는 것일까요? 회개 세례는 도덕적인 변화와 휴머니즘을 가리킵니다. 정의로운 사람과 세상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 문명이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회개 세례입니다. 누가 봐도 옳은 삶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말한 이유는 회개 세례, 즉 도덕적인 변화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것만으로는 영혼의 만족이 불가능합니다. 작년 겨울의 촛불 혁명과 지금의 적폐 청산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일들은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변혁 운동에 연대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정의로운 세상에서 산다고 해서 영혼의 만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최저 시급이 금년에 당장 1만원으로 인상된다고 해도, 그리고 갑을관계가 많이 해소된다고 해도 영혼의 만족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좋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혼의 만족을 완전하게 누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목회 행위에서도 그게 그대로 드러납니다. 목회를 진정성 있게 잘하고 운이 따라서 교회를 크게 키운 목사라고 해서 영혼의 만족이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방언과 예언
성령 세례는 무엇일까요? 바울의 말을 듣고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세례의 의미를 새로운 차원에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또는 당시에 세례가 완전한 종교의식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에 다시 세례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라는 종교의식에 머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6절에 따르면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를 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고, 아울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성령 경험을 주로 방언과 예언에서 확인했습니다. 여기서 방언이 핵심입니다. 사도행전이 성령을 말할 때는 주로 방언 현상을 가리킵니다. 신약성경은 방언에 대해서 자주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정도입니다. 예수님이 방언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방언은 주로 열광적인 신앙행태를 보이는 교회에서 나타납니다. 고린도교회가 대표적입니다. 방언은 두 가지 형태입니다. 하나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소리를 무아지경에서 쏟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어로 말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자신도 방언을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공적인 예배에서는 방언을 절제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낯설게 보이는 방언이 성경에 나왔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무조건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고, 거꾸로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무조건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흑인들의 예배는 우리가 볼 때 어수선합니다. 박수치고 몸을 흔들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요즘의 씨씨엠 집회와 비슷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칩니다. 목사가 그런 상황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유럽의 전통 교회와 유럽 교회의 영향을 받은 교회의 예배는 엄숙합니다. 엄숙하다 못해 어떤 분들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겁니다. 대구샘터교회의 예배와 비슷합니다. 예배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자기표현의 차이는 큽니다. 외국 사람들은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합니다. 남녀 구분하지 않고 인사를 나눌 때 포옹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닙니다. 그런 표현을 절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래 경험에서도 비슷합니다. 노래방에 들어가서 신바람 나게 노래해야 뭔가 즐거웠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고, 조용필 같은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흥겹게 노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즐거움이 밖으로 발산됩니다. 클래식 공연장에서는 반대로 모든 감정이 절제됩니다. 각자의 경험이 다르겠지만 저로서는 예배나 음악연주에서 절제미학이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방언은, 특히 한국교회에서 통성기도 현상과 더불어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은 발산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본문이 성령 현상을 방언과 예언으로 묘사했다고 해서 성령이 반드시 그것을 수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열광적인 종교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라 악령을 통해서도 그런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현상이 옳은지 아닌지는 늘 성찰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 5:22, 23절에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바울의 안수를 받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도덕성과 휴머니즘과 세상살이의 원리에 묶이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은 바로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살리는 힘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구원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회개의 세례는 우리를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게 하겠지만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못합니다. 실제로 그럴까요? 그냥 말뿐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십자가의 죽음까지 받아들일 준비를 갖출 수만 있다면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완성시키려는 모든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자유가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차원에서 부활 생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실제로 믿는다면 죽음의 절망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이런 설명은 여러분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감이 가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한의 전통인 회개 세례에 머뭅니다. 바울로부터 어떤 세례를 받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요한의 세례’라는 에베소 교인들의 대답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왜 여기에만 머물게 될까요? 성령 세례를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거기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특별히 다른 게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좀더 바람직하게 사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생각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만 매달립니다. 교회 운영에서도 이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보다는 교회를 어떻게 바람직하게 운영하는가에만 마음을 둡니다.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겠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겁니다.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조건 돈벌이에만 매달리는 거와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 즉 어떤 방식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그것의 방법론을 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바울로부터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을 받은 에베소 교인들처럼 성령 세례를 자신이 받았는지를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실제로 믿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기쁨과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능력이 신비한 방식으로 저들의 영혼 가운데에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서 확장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2018년 한 해에 여러분들의 일상에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그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에게 믿음의 능력이, 즉 성령 세례 경험이 훨씬 풍요롭고 깊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부스러기 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매 순간 하나님을 닮아가는 게 우리에게 최선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말도 자칫 뻔한 것처럼 느낄 수도 있는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뭔가의 근본적인 깨우침이 필요합니다.
오는 주일에 빌립과 나다나엘 전승(요 1:43-51)을 본문으로 설교합니다.
거기에 '하늘이 열린다.'는 말이 나옵니다.
실제로 하늘이 열린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경험을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는 표현도 구약에 자주 나옵니다.
똑같은 세상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으로 경험되는 거지요.
이런 쪽으로 조금씩이나마 가까이 가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믿음과 삶도 점점 가까워지는 걸 실질적으로 느끼겠지요.
어쨌든지 성경 안에 놀라운 세계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니
마음 푹 놓고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노력해보십시요.
저도 그런 노력을 죽을 때까지 하려고 합니다.
매일 묵상에서 그러셨더군요
구원에 천착하는 목사는 세월이 갈수록 자신이
구원받기 어렵다는 진실을 절감한다...
오늘 여기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며 살기를 희구하지만, 그럴수록 그럴 가능성이 요원함을 통감합니다
믿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믿지 않는거다!!
이 통렬한 선언 앞에서
쓸쓸히 돌아가는 부자청년의 슬픈 뒷모습이
오늘 우리의 자화상으로 오버랩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