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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kAiaBNp9zL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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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태복음 21:33-46 |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마 21:33-46, 창조절 여섯 번째 주일, 2017년 10월8일
33.다른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이르되 그들이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38.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40.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포도원 농부 비유 이야기
예수님은 종종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는 어떤 진리를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다른 것에 빗대서 설명하는 이야기 방식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1:33-46절에 ‘포도원 농부 비유’가 나옵니다. 고대 유대인들이 알아듣기 맞춤한 비유입니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놓은 뒤에 멀리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까지 세운 걸 보면 대규모 농장 식 포도원으로 보입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타국으로 떠나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만 보면 고위 외교관이든지 국제 무역을 하는 사업가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를 놓을 때 농부들과 계약을 맺었겠지요. 농부가 소출의 6할을 갖고 주인은 4할을 갖는 정도의 계약이 가능합니다. 또는 일정한 소작료를 낼 수도 있습니다. 세부적인 계약도 필요합니다. 농사에 필요한 부대비용은 누가 댈 것이며, 자연재해로 농사를 망쳤을 때는 계약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미리 정해야 합니다.
34절에 따르면 포도 수확 철이 되어서 주인은 세를 받기 위해서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야기 진행이 순조롭습니다. 35절부터 상황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흐릅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종들을 붙잡아 구타하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계약 위반일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처벌 대상입니다.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들까지 구타하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농부들이 제 정신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주인이 너무 높은 소작료를 강요한다거나 세를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기 자식들을 종으로 데리고 갔으면 모를까, 다짜고짜로 주인의 종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한다는 것은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입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냅니다. 농부들이 아들을 대하면 마음이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주인의 기대는 여지없이 허물어졌습니다. 38, 39절에 농부들의 꿍꿍이와 만행이 드러납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아름다운 풍경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끔찍하게 변했습니다. 포도원을 새로 만들고 거기서 농부들이 일하는 장면은 목가적입니다.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인간의 삶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포도나무를 심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나무가 생각보다 잘 자라기도 하고 열매도 빨리 맺습니다. 제가 사는 영천에도 포도농사가 많습니다. 우리 동네 원당에도 사람들이 포도나무를 많이 심습니다. 새로 생긴 포도밭 옆을 지날 때마다 저도 땅을 빌려서 포도 농사를 지어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농부들의 마음에 사악한 생각이 끼어들었습니다. 주인의 종들만 아니라 아들까지 죽여서 ‘유산을 차지하자.’는 겁니다. 자기들이 땀 흘려 거둔 수확을 계약 조건에 따라서 주인과 나누기 싫은 거겠지요. 현대사회도 비슷하게 굴러갑니다. 법망만 피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속이거나 파괴하면서까지 자기 이익을 챙기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치닫습니다.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죽였으니 갈 데까지 다 간 겁니다. 농부들이 주인마저 죽여서 모든 재산을 차지하게 될까요? 그들이 주인을 손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질문은 주인의 힘이 모든 농부들을 제압한다는 걸 전제합니다. 대답은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게 책임을 엄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들과 아들을 죽인 죄를 물어 거기에 연루된 농부들을 진멸하고, 계약을 충실하게 지킬 다른 농부를 찾아야 합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 비유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 궁금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정의가 결국 승리했으니 박수를 치고 싶었을까요? 아니면 이 비유가 자신들의 잘못을 까발리려는 음모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까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는 사람
예수님은 42절부터 친절하게 비유를 해설하십니다. 이 해설에는 초기 기독교의 예수님에 대한 신앙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는 초기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다룬 것이라서 공관복음에 다 나옵니다. 막 12:1-12, 눅 20:9-19이 병행구입니다. 각각의 텍스트가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마태복음만 특별하게 언급한 구절이 있습니다. 마 21:43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반면에 초기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는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구절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누가 들어도 분명해보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빼앗길 사람은 폭행과 살인행위를 저지른 농부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될 이들은 비유에서 주인과 새로운 계약을 맺은 농부들입니다. 한 쪽은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양쪽이 선명하게 나뉩니다. 자신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따라서 처지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길 ‘너희’는 마 21:23절과 45절에 따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약간씩 역할을 달리하는 사람들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엘리트집단입니다. 여기에는 율법학자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그들은 주인의 종들을 잡아서 때리고 죽이고 돌로 친 농부들입니다. 주인의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농부들이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죽인 주인의 아들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그들이 유달리 악한 사람들이기 때문일까요? 그들이 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유대교 지도층 인사들이 예수님과 충돌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바로 세워나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나름으로 일리가 있으며,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는 최선일지 모릅니다. 몇 가지 내용만 간추려봅시다. 율법은 성전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오랜 전통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모두 예루살렘 성전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에게 성전은 그 어떤 곳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건물이자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절대화를 거부했습니다. 성전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 그것의 절대화를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속화되는 성전을 완력으로 정화한 적도 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체제이자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안식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수행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침으로써 안식일 규정을 위반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세리나 죄인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어울렸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도 율법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완벽하게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율법 이외의 대안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율법을 상대화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카오스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현실적인 대안도 없이 유대교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더 나가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언행이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로마 체제 아래서 이스라엘처럼 작은 나라는 생존의 위기를 일상으로 느꼈습니다. 이럴 때는 우선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내부 결속이 필요합니다. 내부를 단단하게 묶어내려면 성전과 안식일 등의 절대화하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걸 위태롭게 하는 목수 출신 나사렛 예수라는 젊은이를 그들은 묵과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요주의 인물, 요즘 식으로 블랙리스트 대상으로 올려놓았습니다. 예수 공생애 초창기에 그들은 예수와 가능한 타협해보려고 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고, 결국 예수를 로마정권에 넘겼습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엘리트 집단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체제를 수호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회과학에서는 그것을 ‘status quo’(현실 유지)라고 부릅니다.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에 저항하는 이들은 주로 부자들입니다. 예를 들어서 부유세나 종합부동산세를 거부하는 이들은 다 부자입니다. 자신들에게 불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국제 관계도 비슷하게 굴러갑니다. 지난 금요일에 금년 노벨 평화상이 반핵 단체인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ICAN)에게 주어졌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기구는 ‘핵확산 방지조약’(NPT)와는 다른 기구입니다. 현재 핵무기 강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는 NPT에는 가입했지만 ICAN에는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핵무기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교회 문제로 좁혀서 생각하면 좀더 확실하게 손에 잡힐 겁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말할 때가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일까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의 하나, 제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 사례비 문제입니다. 한국교회 정도로 목사 사례비에 차이가 나는 교회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독일 같은 나라는 주정부에서 목사 연봉을 관리하기 때문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독일교회를 당장 벤치마킹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조금씩이나마 달라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대개가 중대형교회 교역자들입니다. 예수 당시의 대제사장과 장로와 바리새인들이나 오늘 그들이나 현실안주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는 백성
마태복음 기자는 유대교를 대표하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대신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게 될 이 사람들은 유대교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묶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즉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이 멀게 느껴진다면 그것을 정의와 평화의 세계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의와 평화만이 아니라 더 많은 힘으로 나타납니다. 해방과 기쁨과 희망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걸 압축해서 정의와 평화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곧 정의와 평화를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정의와 평화를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과 안식일 제도가 하나님의 통치인 정의와 평화를, 즉 유대 백성들의 삶을 파괴한다고 생각해서 저항했습니다. 예수님은 ‘팔복’에서 이르기를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고(마 5:9),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도 천국에 속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마 5:1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지향한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실제로 사회 변혁 운동에 앞장서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자신의 역량에 따라서 선택하면 됩니다. 노동 운동에서도 앞장 서는 사람이 있고,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세상이 강요하고 유혹하는 체제 유지(status quo)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경우에 그 체제는 돈이 사람보다 더 우월한 세력으로 작동되는 천민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수호하려던 율법 체제가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런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가장 인간다운 삶이 되도록 최선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그래서 성전주의에 저항했고, 안식일 이데올로기에 저항했습니다. 당시의 기득권을 향해서 온 몸으로 저항한 셈입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일이 아무리 귀해도 결국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길을 가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세상에서 실제로 가난하고 핍박받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시달리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뭔가 희생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의 열정을 폄하하지 않습니다만 교회생활의 본질만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서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위해서 많은 걸 제공합니다. 물론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그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렇게 일하는 순간에도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값진 것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언가 엄청난 일을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과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표현이 결국은 생명을 얻는다는 뜻, 즉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 자궁 안에서 태아가 자리를 잡고 자라는 거와 같습니다. 태아라는 열매는 곧 생명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말이나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가르침도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은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생명 구원을 약속으로 받고 지금 그걸 누리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에 저항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어질 것이며, 힘을 더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믿음의 동지로서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