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사순절 조회 수 1758 추천 수 0 2019.03.31 18:34:29
설교듣기 : https://youtu.be/hojwAMsZRus 
설교보기 : http://afreecatv.com/nfermata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5:16-21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사순절 넷째 주일, 2019331

 

16.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화해하라!

오늘 설교 본문에는 화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화목으로 나옵니다. 공동번역은 화해로 표현하고 영어 성경은 reconciliation으로, 루터 성경은 Versöhnung으로 표현합니다. 영어나 독일어 표현은 모두 화목보다는 화해라는 뜻이 강합니다. 화목은 단순히 서로 뜻이 맞고 정답게 지내는 걸 가리키지만 화해는 불화했던 상황이 해결되는 걸 가리킵니다. 본문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여러 번역본을 통합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대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강력하게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간곡한 호소가 현대인들에게는 와 닿지 않을 겁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할 시간도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이 세상의 원리에 따라서 성취하는 데만 마음을 둡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에만 신경을 씁니다. 개인에 따라서, 또는 사회에 따라서 그 현상이 심하게 나타기도 하고 약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달리 강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부동산 재테크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좁은 집에서 살다가 넓은 집으로 옮기려는 마음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노골적으로 투기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진행된 장관후보자 국회 청문회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집값을 안정시켜야 할 국토부장관 후보자가 집을 서너 채나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의 장관 후보자들도 비슷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권력과 재력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확대시키려는 이 시대정신이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부실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국민 일반이 대부분 그런 마인드로 살아가는 게 아닐는지요. 이런 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겁니다. 그런 말은 배부른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일종의 공자 왈()쯤으로 듣겠지요.

바울의 호소인 하나님과의 화해는 인간의 삶이 생명의 근원과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혼의 자리에 속합니다. 그 영혼의 자리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성취한다고 해도 영혼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하고, 종종 다른 사람을 탓하게도 됩니다. 모든 게 못마땅합니다. 불안해집니다. 인간관계가 허물어집니다. 여기 교장과 교사가 있다고 합시다. 교장의 눈에 교사는 게으르고 무책임해보입니다. 교사의 눈에 교장은 너무 권위적이고 학생들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여기 카페 사장과 종업원이 있다고 합시다. 사장의 눈에 종업원은 성실하게 않고 손님에게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종업원에 눈에 사장은 인색하고 종업원을 종 다루듯이 갑질을 합니다. 어느 집단이나 이런 일은 일어납니다. 교회의 담임 목사와 부목사 관계도 비슷할 겁니다. 개인의 차이는 있습니다. 좀더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교양 있게 말을 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심층에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영혼의 깊이에서 사람을 대하고 만족해하는 사람은 도사 수준에 도달한 사람일 겁니다. 우리 일상에서 영혼의 만족이 불가능한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훼손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과의 불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생명과의 불화가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류는 교육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살지 못하는 이유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양의 근대주의가 인간 계몽을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은 지식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도 지식과잉, 교육과잉의 시대를 삽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교육은 세계 탑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지식인과 무식한 사람과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나요? 물론 차이가 있겠으나 그건 교양의 차이입니다. 영혼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지식인은 자기체면을 살피면서 자기 욕망대로 살고, 지식인이 아닌 사람은 노골적으로, 또는 거친 방식으로 자기 욕망에 기울어집니다. 저도 지식인에 속하지만 그것으로 제가 구원받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식인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거나, 잘못 배우지 않고 똑바로 배우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교육과 지식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신학공부가 필수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지식은 생명 사건에서, 즉 구원 문제에서 무능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지식과 교양으로 생명과의 불화가, 즉 하나님과의 대립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지식과 교양으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적인 교만에 떨어질 위험성만 높아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화해, 즉 생명과의 화해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구원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영혼의 해방이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화해를 이루셨다고 사실을 반복했습니다. 18절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우리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오고, 19절에 그리스도 안에서세상과 화목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오며, 21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다른 편지에 자주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즉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실제로 옳은가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으신가요?

저는 설교할 때마다 회중들의 삶이 편안하게 앉아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을 만큼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서 조심스럽습니다. 당장 말썽 피우는 자녀들로 인해서 노심초사하거나 남편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인 위기에 떨어지거나 건강이 극도로 좋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 밖으로 눈을 돌리면 어려운 형편은 더 심각합니다. 이혼이냐 아니냐 할 정도로 부부사이가 나쁜 이들,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학생들, 잠시도 쉬기 힘든 소규모 자영업자들, 가족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간 사람들, 노숙자 등등, 인생살이가 살벌한 이들이 많습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그들에게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제가 설교할 수 있을까요? 제가 인생살이의 모순과 당혹스러움을 알지도 못하면서 공연히 그럴듯한 말만 하는 건 아닐까요? 설교자로서 불안하기는 하지만 성령을 의지해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전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신앙의 선배인 바울의 가르침을 전하는 거라서 다행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중요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다는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존재라는 말을 이해해야만 하나님과의 화해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앞 대목에서 언급했습니다. 17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외워둬야 할 정도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들어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 즉 새로운 존재(new being)라는 말도 당장 우리 마음에 와 닿지 않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새로운 존재라고 하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 밖의 사람과 완전히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스스로도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기쁨과 자유를 누리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많지 않으며,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번의 경험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라는 사실이 점점 희미해집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이전 것은 16절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을 육신을 따라’(카타 사르카) 아는 것입니다. 사르카는 육체를 가리키는 헬라어 사르크스의 변형입니다. 세속적으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판단에 따르면 명성을 얻고 재물을 얻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그게 없으면 불행해집니다. 명성과 재물은 다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명성과 재물을 얻을 수 없기에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개인이나 사회의 삶이 파괴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런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제 끝났다고 봅니다. 새로운 삶의 관점이 열린 것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열린 삶의 관점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이런 새로운 삶으로의 전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이유는 그로 인해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21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죄로 삼으셨다는 말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 문장에 기독교의 가장 원초적인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으로써 그를 믿는 우리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내용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모든 설교는 이 사실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제 설교를 자주 들은 분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이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중학교 한 반이 있다고 합시다. 반 전체 학생들이 어느 날 사고를 쳤습니다. 수업 중인데 단체로 학교 밖으로 빠져나와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습니다. 정학 처분을 받아야 할 상황입니다. 반장이 나섰습니다. 반장은 그날 학생들의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고 오히려 말렸지만 불가항력이었습니다. 반장은 학교 당국의 대책기구 모임에 나가서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자퇴할 테니 나머지 학생들은 구제해달라고 말했습니다. 반장의 행동이 학생들을 엄벌해야겠다는 학교 당국과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학생들을 화해시켰습니다.

 

인생 실패 너머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한 것이라는 말을 실질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이런 말은 종교적으로 가벼운 수사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야말로 인생 실패입니다. 고전 1:23절이 말하듯이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이런 인생에 떨어질까 노심초사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바로 17절이 말하는 이전 것입니다. 이전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오기 전까지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오면 빛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전 것은 빛을 잃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자들과 로마 정치 권력자들은 이전 것에 속합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인생 실패라고 보았던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이제 인생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켜 죄가 용서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인생 실패하기 싫다고 말할 분들이, 말은 하지 않아도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십자가 처형과 같은 찌질 하고 피곤하고 부끄러운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입니다. 제 자식들도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교회 교우들도 인생 실패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두 가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인생 실패와 반대되는 인생 성공을 거두어도 그것 자체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 가장 잘 나가던 두 인물을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유대의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 책임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총독 빌라도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진리를 세우고 정치적인 정의를 실현했다고 큰소리 치고 여기에 가담한 이들과 만찬을 나누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겠지만 오늘날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잘 나가던 다른 사람들도 시간과 더불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시간의 힘 앞에서는 사람들이 판단하는 인생 성공과 실패가 무의미합니다. 모두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2) 사람들이 인생 실패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처형을 감당하셨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는 자기 인생이 실패할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걱정으로 인해서, 그리고 자포자기로 인해서 온갖 악행이 발생합니다. 그 어떤 인생에도 실패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걸 사실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인생이 고달파도 두려워하지 것처럼 예수와 하나 된 사람은 인생 실패를 미리 겁먹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으면 좋고, 실패해도 괜찮은 겁니다. 여기서 실패여부는 악행을 저질러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가 팔복에서 말하는 그런 운명을 가리킵니다. 가난하지 않으면 좋고, 가난해도 괜찮은 겁니다. 그 가난한 삶에 이미 예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가 지옥에 계시다면 자신은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신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고정관념에 묶여서 생명 충만이 무엇인지를 미처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구구절절한 여러분의 인생에 맞춤형의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매주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에 기대서 전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바울의 호소가 여러분의 영혼에 거룩한 여운으로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profile

[레벨:17]부스러기은혜

April 02, 2019
*.229.148.165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선언이 오늘 내 영혼에 경천동지할 울림으로 다가오지 못함은

즐탁동시의 임계량을 채우지 못한 탓일까요?
그걸 채우고자 무던히 애써온 지난날의 신앙적 열심이
별 도움이 되지못함을 갈수록 통감하고 있던 차에
마침 이번 설교에서 '신학공부가 구원에는 무능하다'는 지적 앞에서

새삼 구원이 성경속에, 교회속에, 신학속에 있지 않음을 절감하면서

오늘 이후 가던 길의 향배의 전환을 고민하게 해주시는군요

버림(내려놓음)을 위해선
버려야 할 것과는 비교도 안될
소중한 것의 경험이 선결조건이듯,
내게 허락된 크고 비밀한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해야만 이전 것이 지나갔음을 실감할수 있겠지요.


아.....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목사님 표현으로 실존속에서 리얼리티가 되지않는)
이 구원이
평생 무지개를 잡으려다 백발 노인이 된
어느 소년 이야기를 또 만들어가고 있는건 아닌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기전 까지 위로를 얻을수 없었던 시므온의 심정으로 산다는 우리가

죽기 전까지 시므온의 경험을 하고서야 죽음을 맞이할수 있게 될지...

세월은 그 죽음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데

신앙의 매너리즘에 함몰된채 언제나 제자리인듯 싶은 내 영적인 정체성 앞에서

그 가능성에 점점 회의가 드는군요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95]정용섭

April 02, 2019
*.182.156.135

ㅎㅎ 부스러기 님의 대글이 제 설교보다 한 수 위이고,

다비안들에게도 울림이 클 겁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신앙이 비교적 좋다는 분들은

딱 떨어지는 표현은 아니나 '선무당'의 반열에 가깝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느냐'는 질문을 붙들기는 하지만

결국 실망하고 돌아서는 일이 반복되는 거지요.

다른 뾰족한 길이 보이지도 않으니

주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겟지요.

평안한 봄날 밤이 되기를...

profile

[레벨:11]하늘연어

April 04, 2019
*.86.237.246


부스러기님.

목사님 말씀에  새 힘을 얻으셨네요. 축하해요.

===================================


구도정진은 무슨....,ㅋ

언젠가 부스러기님이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 같은데

(아님 말고..., 정 목사님께선 자주 사용하시니깐)

그 때 제 느낌이 그랬어요. =3=3=3=3=3=3


I saw to haven!

이런 류의 임사체험 관련 책들을 읽어 본 적이 있는데

살아서 진짜 봤다면 구도정진이고 뭐고 GG 아닐까요.ㅎ


전 가끔 '누구는 가고 누구는 못가는 천국이라면 나는 가지 않겠다. '라든지,

'부활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생명으로의 변화'일 것이라는 이런 말씀에,

 

'세속에서의 모든 것이 포맷된 부활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처 자식도 몰라보는 부활이  무슨 으미가 있나...같은..

 깨닫고 배우는 기쁨 속에서의 인간적인 소회 입니다.  

profile

[레벨:16]에스더1

April 05, 2019
*.151.83.22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현대인들이 부와 사회적 지위와 지식과 교양을 추구하지만

영혼의 만족과 참된 행복이 주어지지 않고

한편으로는 가난과 실패에 떨어질까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것은

그것으로 생명을 완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란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삶의 새로운 관점이 열린 그리스도인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부활생명의 세계에서는

인생성공과 실패가 무의미함을 알게되어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걱정을 하지 않게 되니

그것이 하나님과 화해 하는것임을 알게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성경말씀을 어떻게 이해할지 막연한 상태에서

이렇게 해석하여 주시니 말씀이 살아있는듯 기쁜마음이 듭니다.

profile

[레벨:95]정용섭

April 05, 2019
*.182.156.135

'말씀이 살아있는 듯' 하다는 걸 느꼈으니

최선의 설교 듣기가 된 것 같습니다.

다만 설교를 요약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것에 대한 본인의 다른 생각이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이나

앞으로 나아가는 생각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817 창조절 말다툼과 진리의 말씀 (딤후 2:8-15) 2019-10-14 283
816 창조절 믿음과 구원 (눅 17:11-19) 2019-10-06 862
815 창조절 투쟁적인 믿음 (딤전 6:6-16) [4] 2019-09-29 1161
814 창조절 양자택일 (눅 16:1-13) 2019-09-22 996
813 창조절 하나님의 근본 속성 (딤전 1:12-17) [7] 2019-09-15 1285
812 창조절 토기장이의 손 (렘 18:1-11) [1] 2019-09-09 1055
811 창조절 복 있는 삶 (눅 14:7-14) [2] 2019-09-01 1346
810 성령강림절 안식, 해방, 연민 (눅 13:10-17) [6] 2019-08-25 1196
809 성령강림절 "정의" (사 5:1-7) [6] 2019-08-18 1346
808 성령강림절 "믿음" (히 11:1-3, 8-16) 2019-08-11 1151
807 성령강림절 즐거운 인생(?) (눅 12:13-21) 2019-08-04 1294
806 성령강림절 살아계신 하나님 (호 1:2-10) [4] 2019-07-28 1411
805 성령강림절 마르다의 염려와 근심 (눅 10:38-42) [4] 2019-07-21 1455
804 성령강림절 아들과 죄 용서 (골 1:3-14) [6] 2019-07-15 1349
803 성령강림절 예수의 제자 파송 (눅 10:1-11) [2] 2019-07-07 1308
802 성령강림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2, 6-14) [7] 2019-06-30 1380
801 성령강림절 축귀 능력자 예수 (눅 8:26-39) [6] 2019-06-23 1307
800 성령강림절 지혜의 근원 (잠 8:1-4, 22-31) [4] 2019-06-16 1461
799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아들 (롬 8:14-17) [9] 2019-06-10 1564
798 부활절 바울과 실라, 빌립보 감옥에서 (행 16:16-34) [4] 2019-06-02 1923
797 부활절 예수의 평화 (요 14:23-29) [4] 2019-05-26 1632
796 부활절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 (계 21:1-6) 2019-05-19 1228
795 부활절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 (요 10:22-30) [5] 2019-05-13 1518
794 부활절 바울, 부활의 예수를 만나다! (행 9:1-6) [4] 2019-05-05 1460
793 부활절 피와 해방 (계 1:4-8) [4] 2019-04-28 1389
792 부활절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 (사 65:17-25) [2] 2019-04-21 1527
791 사순절 제자도의 위기 (눅 22:24-34) [4] 2019-04-14 1444
790 사순절 마리아와 가룟 유다 (요 12:1-8) [4] 2019-04-07 1547
» 사순절 하나님과의 화해 (고후 5:16-21) [5] 2019-03-31 1758
788 사순절 백척간두의 실존 (눅 13:1-9) [6] 2019-03-24 1709
787 사순절 흑암과 두려움 가운데서 (창 15:1-12, 17-18) [5] 2019-03-17 1530
786 사순절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8-13) [2] 2019-03-10 1623
785 주현절 "빛으로 변화되리라!" (눅 9:28-36) [2] 2019-03-03 1368
784 주현절 하나님, 역사, 삶 [4] 2019-02-24 1813
783 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4] 2019-02-17 1795
782 주현절 예수 부활의 증인들 (고전 15:1-11) [8] 2019-02-12 1997
781 주현절 게네사렛 어부들 이야기 [6] 2019-02-03 2063
780 주현절 구원의 현실화 (눅 4:14-21) [9] 2019-01-27 2214
779 주현절 은사의 다양성과 성령의 동일성 (고전 12:1-11) [6] 2019-01-21 1709
778 주현절 창조주 여호와! (사 43:1-7) [6] 2019-01-13 1889
777 주현절 별을 따라온 사람들 (마 2:1-12) [11] 2019-01-06 1686
776 성탄절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 세 가지 (골 3:12-17) [9] 2018-12-30 2348
775 대림절 평화! (미 5:2-5a) [8] 2018-12-23 1675
774 대림절 '노래하라!' (습 3:14-20) [2] 2018-12-16 1584
773 대림절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눅 3:1-6) 2018-12-10 1686
772 대림절 예수 강림! (살전 3:9-13) [6] 2018-12-02 1809
771 창조절 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2018-11-25 1345
770 창조절 기도하라, 감사하라! (딤전 2:1-7) [5] 2018-11-18 2358
769 창조절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막 12:38-44) [6] 2018-11-12 2617
768 창조절 나오미와 룻 (룻 1:1-18) [10] 2018-11-04 2349
767 창조절 바디매오의 구원 이야기 (막 10:46-52) [4] 2018-10-28 2243
766 창조절 만물의 시원성에 대한 질문 (욥 38:1-7) [20] 2018-10-21 2182
765 창조절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 4:12-16) [2] 2018-10-15 1578
764 창조절 먼저 된 자와 나중 된 자 (막 10:23-31) 2018-10-08 2477
763 창조절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 (민 11:4-15) [6] 2018-09-30 2853
762 창조절 사소한 것들과의 생명 관계 (막 9:30-37) [4] 2018-09-24 1894
761 창조절 종의 노래 Ⅲ (사 50:4-9) [2] 2018-09-16 1543
760 창조절 '힐링'의 원천 (막 7:24-37) [2] 2018-09-10 1963
759 창조절 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4] 2018-09-02 2454
758 성령강림절 예수는 누군가? (요 6:60-69) [6] 2018-08-26 2354
757 성령강림절 솔로몬의 믿음과 좌절 (왕상 2:10-12, 3:3-14) [13] 2018-08-19 2627
756 성령강림절 기독교 윤리와 하나님 사랑 (엡 4:25-5:2) [4] 2018-08-13 2016
755 성령강림절 예수는 생명 충만이다! (요 6:24-35) [2] 2018-08-05 1977
754 성령강림절 예수는 왕인가? (요 6:1-15) [8] 2018-07-29 2103
753 성령강림절 예수의 치유 능력 (막 6:30-34, 53-56) [6] 2018-07-22 2094
752 성령강림절 다윗의 법궤와 예수의 십자가 [4] 2018-07-15 2499
751 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8] 2018-07-09 2469
750 성령강림절 연보도 은혜다! (고후 8:7-15) [6] 2018-07-01 1945
749 성령강림절 두려움의 대상 (막 4:35-41) [4] 2018-06-24 2603
748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와 씨 비유 (막 4:26-34) [5] 2018-06-17 2768
747 성령강림절 하늘의 영원한 집 (고후 4:13-5:1) [10] 2018-06-11 2247
746 성령강림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4] 2018-06-03 2973
745 성령강림절 거듭남과 성령 (요 3:1-13) [2] 2018-05-27 2547
744 성령강림절 성령이 도우시리라! (롬 8:22-27) [4] 2018-05-20 2465
743 부활절 기독교인의 세상살이 (요 17:6-19) [2] 2018-05-14 2469
742 부활절 성령 임재의 증거 (행 10:44-48) 2018-05-06 2387
741 부활절 복음의 보편적 능력 (행 8:26-40) [4] 2018-04-29 2849
740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3:16-24) 2018-04-22 2163
739 부활절 예수의 살과 뼈 (눅 24:36-48) [4] 2018-04-15 2249
738 부활절 오래된 미래 (행 4:32-35) [4] 2018-04-09 2695
737 부활절 예수의 빈 무덤과 막달라 마리아 (요 20:1-18) [8] 2018-04-01 2713
736 사순절 예수의 죽음과 매장 (막 15:33-47) [4] 2018-03-25 2407
735 사순절 예수의 영광과 영원한 생명 (요 12:20-33) [4] 2018-03-18 2294
734 사순절 원망에서 생명으로! (민 21:4-9) 2018-03-11 2853
733 사순절 표적과 지혜를 넘어서! (고전 1:18-25) [8] 2018-03-04 3323
732 사순절 "내 뒤로 물러가라!" (막 8:31-38) [7] 2018-02-25 2928
731 사순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 (벧전 3:18-22) [14] 2018-02-18 3183
730 주현절 엘리야의 승천 이야기 (왕하 2:1-12) [8] 2018-02-12 2226
729 주현절 예수의 회당 전도 (막 1:29-39) [13] 2018-02-04 2637
728 주현절 예수의 축귀 능력 (막 1:21-28) [4] 2018-01-28 2316
727 주현절 하나님의 회심 (욘 3:1-5, 10) [6] 2018-01-21 2486
726 주현절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요 1:43-51) [4] 2018-01-15 2481
725 주현절 회개 세례와 성령 세례 (행 19:1-7) [6] 2018-01-07 3575
724 성탄절 종의 삶과 아들의 삶 (갈 4:4-7) [9] 2018-01-01 2963
723 대림절 구원의 바위 (시 89:1-4, 19-26) [4] 2017-12-24 2439
722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4] 2017-12-17 2311
721 대림절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3] 2017-12-11 3269
720 대림절 "깨어 있으라!" (막 13:24-37 [5] 2017-12-03 3235
719 창조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엡 1:15-23) [9] 2017-11-26 2561
718 창조절 믿음이 구원이다 (눅 17:11-19) [10] 2017-11-19 3278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