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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K7kMO6ZQsA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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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afreecatv.com/nfermata |
성경본문 : | 스바냐 3:14-20 |
노래하라!
습 3:14-20, 대림절 셋째 주일, 2018년 12월16일
14.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15.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16.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8.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그들에게 지워진 짐이 치욕이 되었느니라 19.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 자에게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20.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울증 환자들이 생각보다 많은 거 같습니다. 옛날에도 기질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없지 않았겠지만 요즘은 후천적으로 그런 증상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신경성 소화불량이나 수면장애도 비슷한 정신질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의료의 도움을 받아야합니다. 본격적으로 의료의 도움을 받진 않는다하더라도 평소에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불만스럽게,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세상살이에 스트레스가 쌓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고 생활형편이 좋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순간의 기분에 좌우되고 신경질이 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툭 하면 남 탓을 하고, 정말 중요하지 않은 일로 다투고 약간의 손해도 못견뎌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의사도 아니고 상담가도 아니고 심리학자도 아니기에 모든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학자요 설교자로서, 더 중요하게는 평생 기독교 신앙으로 살면서 이제 충분히 나이가 든 사람으로서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세계만을 조금 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삶의 해답을 찾았고, 여러분도 같은 길을 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스바냐는 기원전 630년경에 유대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당시는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망한지 백년이 지난 때이고, 남유대 역시 40년만 지나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될 때입니다.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분노의 날이고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며 구름과 흑암의 날’입니다(습 1:14f.). 베르디 작곡 <레퀴엠>의 한 대목인 ‘진노의 날’(https://www.youtube.com/watch?v=3mUu2p8b_78)에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집단적인 우울증과 신경증과 불안증을 앓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스바냐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뜬금없이 유대민족을 향해서 노래하라고 외칩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공동번역은 ‘환성을 올려라, 큰소리로 외쳐라, 축제를 베풀어라.’라고 번역했습니다. 유대 민족을 향한 메시지이지만 오늘 우리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삶을 노래하시는지요? 삶을 축제로 받아들이시는지요? 일상에서 그런 경험을 하시는지요? 영혼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즉 영혼의 축제를 펼치는 사람은 삶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우울증이나 신경질환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잠시 힘들어하다가도 곧 벗어납니다. 우울증이나 신경질환에 떨어진 사람은 노래하지 못하고 축제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작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삽니다. ‘노래하라.’는 스바냐의 외침에는 근거가 있을까요? 근거가 없다면 이 사람은 정신이상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인생을 축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미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존재의 기쁨을 알고 있거나.
스바냐는 노래하고 기뻐해야할 이유를 15절 이하에서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1) 여호와가 유대의 형벌을 제거했습니다. 유대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기에 주변의 제국에 의해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스바냐는 하나님이 유대에게 내린 형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형벌로 인해서 유대는 극심한 어려움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 형벌을 하나님 여호와께서 제거하셨으니 당연히 기뻐하고 노래해야합니다. 2) ‘네 원수를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 원수가 앗시리아일 수도 있고, 바벨론일 수도 있고, 블레셋일 수도 있습니다. 원수를 하나님 여호와께서 쫓아내셨다는 사실은 유대민족 모두가 노래할 이유로 충분합니다. 3) ‘이스라엘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여호와가 유대 민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형벌을 제거한다거나 원수를 쫓아낸다는 것은 부수적인 겁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면 그런 것들은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래서 스바냐는 17절에서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문제는 여호와가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즉 하나님의 현존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아빠와 엄마만 옆에 있으면 만족해합니다. 그들은 아빠와 엄마를 실제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형벌을 면해주거나 원수를 쫓아낸다는 것도 이에 대한 완벽한 증거는 아닙니다. 유대민족은 스바냐가 이런 말을 한 뒤에도 반복해서 원수들에게 당했고 나라를 잃었고 심지어 자기들의 언어조차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더니 불치병이 낫다거나 부도 직전의 회사가 기사회생했다는 것을 하나님 현존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해야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게 아닙니다. 요즘 대형교회 안에서 집단적으로 싸우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공교롭게도 장로교를 대표하는 두 교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로회 통합에서는 명성교회의 부자세습 문제로 노회와 총회 차원에서 서로 싸웁니다. 서로 자신들의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장로회 합동을 대표하는 사랑의 교회도 담임 목사의 자격 문제로 싸웁니다. 심지어 민사재판까지 갔습니다. 얼마 전에는 위임 목사 자격이 없다는 판결이 고등번원에서 내려졌습니다. 사랑의 교회 주류 쪽에 속한 이들은 재판 결과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나오게 해달라는 기도회를 꾸준하게 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기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조건 믿으면 될까요? 성경을 많이 읽으면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님의 현존을 실감하고 있으신가요? 어떤 기독교인들은 실감이 가지 않으니까 아예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에 매달립니다. 이런 상태에서 신앙의 성숙은 일어날 수 없고, 시간이 갈수록 신앙은 점점 왜소해지고 메말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메말라간다는 것은 인생살이가 겉으로만 그럴듯하지 실제로는 초라해진다는 뜻입니다. 이건 불행한 일입니다. 17절 말씀을 읽을 테니 마음의 문을 열고 귀기울여보십시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스바냐 선지자에 따르면 하나님이 ‘너의 가운데에’ 계시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현존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곧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는 뜻인데, 그게 곧 하나님의 현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세상의 생명체와 사물들이 다양하듯이 다양하게 경험됩니다. 형벌이 끝나고 원수들이 쫓겨 가고, 어려운 일이 해결되는 것만 하나님의 구원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서 발생합니다.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고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이 있고, 어렴풋이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을 대면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자기를 비하하거나 거꾸로 자기를 높이는 방식으로만 삶을 대하니까 결국 노래와 기쁨을 놓치게 됩니다.
여기에 매스컴의 영향이 큽니다. 대부분의 뉴스가 선정적입니다. 남녀 배우들을 등장시키고, 평범한 옷을 입었는데도 외모가 빛난다고 추켜세웁니다. 프로 운동선수들의 연봉이 수십억, 수백억이라는 뉴스도 심심치 않습니다. 경제지는 부동산 투기를 부추깁니다. 그런 방식으로 돈을 벌지 않으면 인생에서 처지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요즘 서울 아파트 값이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만시지탄이나 정부가 정책을 바르게 추진한 건데도, 매스컴은 이런 부분을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방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 설교 방송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차지합니다. 많은 기자들과 피디들은 언론의 공적인 기능보다는 시청률 제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뉴스를 상품처럼 다룹니다. 우리나라 언론만 보면 나라가 당장 몇 번이라도 망해야만합니다. 이런 언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일반 시민들은 자신만 인생 낙오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떨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 지수와 출산율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삶이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행복하겠으며, 어떻게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구원의 실체
스바냐가 말한 하나님의 구원은 과연 실체가 있는 걸까요? 실체가 없는데도 저렇게 말했다면 스바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말합니다. 많은 창조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창조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니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선합니다. 그 사실을 안다면 화를 당할까 하는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한 구원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잘 풀리지 않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선한 구원을 생각할 수 있느냐, 하는 반론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투정과 같습니다.
좀더 실제적인 예를 들라고 하면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여기 결혼한 사람도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생 해로하는 분들도 있고,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이혼한 사람도 있습니다. 자식들이 잘 된 가정도 있고, 잘 안 된 가정도 있습니다. 연봉이 1억 원인 사람도 있고, 2천만 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하나님의 구원이 빛납니다. 베드로처럼 결혼한 사람은 결혼한 것으로, 바울처럼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삶이 빛납니다. 각각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 빛처럼 임합니다. 그걸 절감하는 분들이 있고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못하는 분들의 문제는 세상이 제공한 기준에 따라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데에 길들여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방식이라면 평생 불평불만, 짜증, 불안, 자포자기, 일희일비로 살게 됩니다. 조금 잘 풀리면 그것으로 잘난 척하고 싶어집니다. 그것도 착각입니다.
일반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재앙 수준에 이르는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기뻐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이나 자식이 불치병에 걸리거나 심각한 신체장애를 입었다고 합시다. 이런 불행을 미리 생각하면 끔직한 일이지만 닥치면 버틸 힘이 생깁니다. 병원에서도 기쁨이 가능하며 교도소에서도 환희와 찬양이 가능합니다. 겨울철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과 그 햇살에 반짝이는 꽃이나 먼지만으로 무한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물 한 모금이 기쁨의 절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심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통증이 물러가는 한 순간이 닥칩니다. 그때의 희열은 돈을 주고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시 찾아오는 통증은 물론 버텨내야 합니다.
서울샘터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사업으로 3년 전 대구샘터교회 수요모임에서 공부한 ‘욥기 강독’을 『욥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출판했습니다. 욥의 운명은 절망의 끝자락입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재앙의 원인이 죄라거나 큰 신앙을 허락하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친구들의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던 욥은 나중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받아들인 겁니다. 욥의 생각이 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이유가 욥기에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의 논리가 하나님의 창조 능력 앞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 대답이라면 대답입니다. 창조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전능을 가리킵니다. 스바냐도 그 사실을 짚었습니다. ‘당신들 가운데에 계신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닫는다면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고, 설령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당장은 힘들어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거기서 벗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구원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실감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너를 잠잠히 사랑하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현존을 실감하면서 살아야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스바냐 선지자의 이런 메시지가 여러분에게 실감나게 들리는지요.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말이 여전히 멀리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저는 여기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현존을 자신의 운명 전체로 나타내신 분을 알려드리는 것으로 설교를 마쳐야겠습니다. 2천 년 전 직업이 목수였던 청년 요셉에게 이상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요셉과 법적인 부부사이이지만 아직 동거하지 않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입니다. 파혼할 준비를 하는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사 7:14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운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죄와 죽음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생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받아들임으로서 생명이 완성된다는 의미입니다. 대림절 셋째 주일, 성탄을 앞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의 깊은 중심에서 여러분의 삶을 기뻐하십시오.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유대가 망하기 40년전의 불안한 시기에 오히려
스바냐 선지자는 여호와가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선포한 것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시에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 받은 운명으로 밖에 알지 못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의 현존 하심으로 받아 들였군요.
이제 기독교인인 우리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으로 자신의 삶을 판단 하던것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므로 선한것으로 알게되어
불안과 두려움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현존으로 삶을 기뻐하며 노래하게 되네요.
올해 성탄절은 진정한 예수오심의 날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