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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창조절 조회 수 12598 추천 수 0 2017.11.05 19:13:31
설교듣기 : https://youtu.be/O3a8hx6NxBY 
성경본문 : 마태복음 23:1-12 

낮춤과 높임의 역설

23:1-12, 창조절 열 번째 주일, 2017115

 

1.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장은 전체 28장 가운데서 유별납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도 이런 대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이 아주 격한 어조로 어떤 이들을 비판합니다. 이것만 따로 떼어서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특히 13절부터 화가 있으라.’는 저주가 눈길을 끕니다.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표현은 마 5:3절 이하에 나오는 소위 팔복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팔복에서는 복이 나오고, 여기 마 23장에서는 화가 나옵니다. 팔복에서는 어떤 이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당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23장이 훨씬 강한 표현입니다. 그 중에 두 대목만 확인하겠습니다. 13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을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이고, 25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입니다. 예수님은 33절에서 거의 막말 수준의 말씀을 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도저히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말씀이 23장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여기서 예수님에 의해서 지목당한 이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서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자, 대학 교수, 판사와 변호사 등입니다. 그들은 종교와 사회의 규범을 세워가는 일을 했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특별히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다수가 문맹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글자를 마음대로 다룰 줄 아는 서기관은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실제의 삶에서 실천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가 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콕 집어서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는 어색하게 보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예수님은 웬만해서 다른 이들을 비판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을 부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면서 사귀는 일만 해도 바쁘기에 다른 사람을 굳이 비판하는 일은 예수님에게 별로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두 이런 가혹한 비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서도 반듯하게 율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모두가 인격 파탄자인 것처럼 비판하신 걸까요?


이 문제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살던 시대를 배경으로 읽어야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원후 30년 즈음에 끝났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과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활 생명으로 경험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대다수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대교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유대와 로마의 전쟁은 기원후 70년에 끝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어 율법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어중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유대 기독교를 향해서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유대 기독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율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들과 결별하고 자신들만의 독자 노선을 걸을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입장은 1517년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 호출당한 루터가 당신의 책과 주장을 철회할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하라.’는 종교재판관의 요구 앞에 선 것과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 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태도는 우리의 길이 아니라고 선포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기에 그걸 반대하는 그동안 펼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똑 부러지게 주장한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결별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무턱대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한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그들의 문제는 대략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실천이 없습니다(3b). 이게 율법 전문가들의 한계입니다. 율법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대로 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도 그런 자조 섞인 말을 자주 합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다고 말입니다. 선생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자기는 별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남에게만 맡기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4). 그들도 물론 짐을 지려는 시늉은 할 겁니다. 또는 다른 이들이 볼 때 짐을 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름으로 진정성 있게 시작할지 몰라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사는데 타성에 젖으면 무거운 짐은 아래 사람에게 맡기는 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목사들에게 이런 위험성이 높습니다. 천국에는 목사의 입만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게 하는 일에 매달립니다. 이게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입니다. 그 내용이 5-7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합니다. 경문 띠는 성구를 넣은 상자이고 옷 술은 옷단에 다는 술입니다. 이런 복장은 어디를 가든지 눈에 확 드러납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리는 걸 좋아합니다. 한 마디로 위선적이라는 겁니다.

 

신앙과 위선

신앙생활이 위선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던 사람들이 교회의 신자가 되기도 하고, 일반 신자들 중에서도 종교적 위선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걸 마태복음 기자도 알고 있습니다. 8절부터 자기가 속한 교회 신자들에게 말을 합니다.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8). 왜냐하면 랍비, 즉 선생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9).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혈육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스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10). 랍비, 아버지, 지도자는 모두 다른 이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회 지도층 인사들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일단 이런 말들은 높아지려는 우리의 본성에 거스르는 겁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게 세상살이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세상살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그러려니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니 기억하고 있어야겠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왈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이 가르침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 자체가 힘들기는 합니다. 그래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성서가 가리키는 새로운 세상살이가 눈에 들어올 겁니다. 본문 11,12절을 다시 선입관 없이 들어보십시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설득력이 있을까요?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기는 싫다고 생각할 겁니다. 여기 두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한 여자는 돈이 많아서 집안일을 파출부에게 맡깁니다. 다른 한 여자는 형편이 어려워서 파출부로 삽니다. 주인 여자는 파출부에게 집안일을 맡겨놓고 동창 모임에 나가서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파출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주인 여자의 집에 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반찬을 만듭니다. 어느 쪽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기 두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큰 교회의 담임 목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교회의 부목사입니다. 목사들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세속이든지 교회이든지 가릴 것 없이 큰 자가 되려고 하고 높은 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걸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늘 이런 관점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공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영혼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는 지식이 많고 적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전혀 상관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주어집니다. 거기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인 10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혼이 자유로워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에게 다른 것들은 사소해졌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권력이 가장 높았던 교황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영혼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낮은 자리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감으로써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르는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수치의 대상이었던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그 예수님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의 비천한 몸으로 오셨다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셨다는 사실로부터 기독교 신앙은 시작됩니다. 루터는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자신도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감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세상의 방식으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느냐 하는 것에 자신의 삶을 다 소진시킵니다.


이 문제를 좀더 실질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시작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위선은 속과 겉이 다른 겁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속과 겉이 달라야 합니다. 실제로는 선생 능력이 없는데도 일단 선생 노릇을 해야 하니 위선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목사로서의 내공이 없는데도 일단 목사가 되었으니 위선적으로 목사 노릇을 해야 합니다. 위선은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남을 속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속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는 이처럼 우리를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누가 선생이 될 수 있으며, 누가 목사가 될 수 있으며, 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으며, 누가 의사와 변호사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목사로서 저는 목사 자격과 능력이 저에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는 것마저 신자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할 자신도 없고, 여러 가지 삶의 태도에서도 목사로서 부끄러운 게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랍비가 될 생각을 말라고, 아버지가 될 생각을 말라고, 지도자가 될 생각을 말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높이는 일에 마음을 쏟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불편해합니다. 그게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입니다. 결국 영혼이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고, 정치를 하고, 목회를 감당하고, 재판을 하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마땅히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누군가 감당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여러분들이 사회의 좋은 위치에서 일하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자기를 높이려는 태도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최선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점점 더 위선으로 떨어집니다.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노심초사 합니다. 본문에서 묘사되었듯이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하는 일에 마음을 씁니다. 하나님의 통치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불행한 거지요. 거꾸로 자신이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순전히 겸손하게 섬기는 데에 집중하면 영혼이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이 가리키는 삶의 역설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게 잘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할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저 높은 데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분열이 계속됩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알게 모르게 자신 안에서 크고 작은 위선을 목도하게 될 겁니다. 우리 내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부활 생명으로 변화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최선입니다.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경험이 깊어지면, 즉 믿음이 깊어지면 자신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것이 사소해지기 때문에 저절로 자신을 낮추게 될 것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평화와 안식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낮아져도, 아니 낮아져야만 결국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높아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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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November 05, 2017
*.81.137.191

목사님, 오늘 말씀은 한마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씀이었습니다. 마태기자의 시대적 입장을 언급해 주신 것과 마지막 부분 낮춤의 영성을 통해 비로소 높아진다는 것은 오늘 우리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게 잘 안된다는 것을 몸소 인정하신 목사님께 낮춤의 영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올 해 마태복음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어 참 좋습니다. 왜 마태복음이 신약성경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지 알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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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5, 2017
*.182.156.251

낙평리 사관님,

저는 설교 준비를 하고, 또 설교를 실행하면서

종종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 순간에 경험하는 겁니다.

특히 이번에는 '위선' 개념을 새롭게 느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특별히 이상해서가 아니라

인간 실존 자체가 위선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알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모르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겠지요.

전업 설교자로 사는 것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보입니다.

저의 설교를 꼼꼼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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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순복

November 06, 2017
*.223.48.134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경험이 깊어진다는 것은 . . .매일 끊임 없이 무언가를 선택해야하고 강요당하는 삶 속에서 막상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는 구절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또 듣는데도 제게는 어렵게 느껴지네요.
제 삶이 어려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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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6, 2017
*.182.156.23

순복 님의 대글을 낮에 읽고 여러번 생각했습니다.

솔직하고 갈급한 마음이 전달되었습니다.

저의 설교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에서는

자칫 겉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더 했습니다.

그 부분을 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예수와 함께 죽고 산다는 기초 교리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현실에 일일이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설교자들은 무리하게

실제로 사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사는 이야기도 실질적이라기보다는 예화 중심이라는 거지요.

순복 님이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이 현실과 분리되어서는 물론 안 되지만

현실 적용의 차원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건 율법이 됩니다.

설교는 영혼의 울림을 목표로 합니다.

영혼의 울림이 깊어지면 거기서 삶을 지탱해나갈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랑이 긴박한 삶에 적용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사람의 영혼에 양식이 되어서 삶을 헤쳐나갈 수 있는 거지요.

순복 님이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는 말씀은 아니었지요?

그건 세례 받을 때 첫 문답에 나오는 질문일 겁니다.

오늘 제 답글의 요지는

설교를 삶에 적용시키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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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순복

November 07, 2017
*.223.48.134

오늘 아침 차를 몰고 가다가 15년 무사고 운전 경력에 앞차를 들이받는 어이없는 실수를 했지요. 제차는 앞 범퍼가 완전히 찌그러져 견인되었고 수리비가 많이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사고의 순간은 다시 온다해도 또 다시 피할 수없는 도저히 브레이크를 밟아도 말을 듣지 않았던 긴박하고도 절박한 한계를 느낄수 있었던 찰나였어요. 율법 앞에서도 그것을 다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한 한계를 느끼며 그렇기에 주님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하라! 와 하지마라! 로 구분되는 주님의 수많은 말씀과 계명들을 어떻게 삶으로 살아내야하는가를 고민하고 또 무력해지고를 반복하며 답답함에 글을 올렸는데 목사님께서.. .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같아요. 너무 애쓰지 마라고요. . . .오늘당한 사고에도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 . .그래서 때론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원의 시간 속에서는 찰나임을. . . 그저 나는 그분과의 깊은 사귐 속으로 매일 걸어가는 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날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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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7
*.182.156.39

아이쿠 순복 님이 오늘 어려운 일을 당하셨군요.

잘 극복하실 거로 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아도 믿지 않은 사람들의 운명과 똑같이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그런 걸로 인해서 삶 자체가 위축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마치 북소리에 가까이 가는 것처럼 영혼의 떨림을 느낀답니다.

그런 경험을 토대로 삼아

구체적인 일들은 자신이 판단하고 감수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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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홍새로

November 06, 2017
*.151.83.22

태어날때 부터 상대적이고 경쟁적인 세상을 배워왔기 때문에,
높은자리에 오르지 말라는 예수님말씀은 본성에
거스르는것이다 라고 생각했었지요.
세상살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할수 없는것이라고요.
이제 주인여자와 파출부로 일하는 여자의 삶은
궁극적으로는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것을 조금 알겠습니다.
돈이 많은 주인여자도 하나님과의 일치가 없으면
그의 영혼이 자유할수 없겠고,
하나님나라를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지식과 재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자유와 해방으로 살수있다는 것을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때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욕을하고 화를 내어도 그것을 참아내는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나의 존재가
달라지는것이 아니다는것을 믿기에 흔들림이 점점
없어지더군요.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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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7
*.182.156.39

설교의 핵심을 정확하게 잡고 있군요.

좋습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높임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경험하면

삶이 전혀 다른 빛으로 다가오게 될 겁니다.

이런 것은 마치 시인을 꿈꾸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언어가 말을 거는...' 경험을 하는 것과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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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하늘연어

November 07, 2017
*.86.233.125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는 율법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는 율법의 순기능에서 에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라는  그리스도인의 삶 앞에서 통곡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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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7
*.182.156.39

율법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희망을 거쳐서

하늘연어 님의 영혼이 통곡하는 데까지 이르렀군요.

깊이 있는 경험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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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은나라

November 07, 2017
*.105.196.251

인간의 본성인 높아지려는 마음이 끊임없이 드는것을 예수님이 스스로 낮추시는 십자가 영성으로 예수를 믿는자로서 자기를 억지로 낮추는 일에 열심을 냈었습니다.
그렇게 적용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고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낮추고 낮추어도 낮아지진 않더라는 겁니다.
도리어 낮추려고 하는것이 어떤면에서는 또다른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를 높이는 결과라는 것이지요.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제마음이 커다란 울림이 있었습니다.
''낮아져야만 결국 거기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될것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높아진다는게 무슨뜻인지 알게 될것입니다.''
여기서 높아진다는게..평화와 안식임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억지로 낮아질려고 애를 썼는데도 안 낮아지고 도리어 낮아지려고 한 그노력이 높아지는거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낮아짐의 자리에서 높아진다는
뜻을 알게 된다는.. 이것이 무슨뜻일까?
또한 그리스도와 일치된다는것은 무엇일까?
나름 생각해 보았는데요.
자기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면..
그분을 알아가는 삶에 모든 관심을 돌리면..
저절로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낮아지는 삶, 그분과의
일치를 경험하고 자유와 안식을 누림으로 높은자가 무슨뜻인지까지 알게 될거 같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봄으로 적용하는것에만 급급했던.. 저를, 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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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07, 2017
*.182.156.39

'높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교에서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는데,

일종의 여운으로 남겨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은나라 님이 '평화와 안식'이라는 답을 찾았군요.

대단하신데요?

예수 외에 다른 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경지가

가장 높은 자리이기에

거기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말이 되는 거지요.

높은 곳은 다른 방식으로도 말할 수 있어요.

예수가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시겠다 했으니

하나님의 아들과 친구가 된다면 더 이상 높은 곳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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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부스러기 은혜

November 10, 2017
*.240.61.32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위시하여, 영혼의 심연에 내재된 허무, 두려움, 갈등....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으로서 여지없이 그것들에 갇혀 살던 우리가 그 죄의 힘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음을

믿고 고백하거늘,  우린 왜 구원을 얻은 자답게  분열된 마음으로부터 자유하기는 커녕,  여전히 예수를  믿기 전과 다름없이 높아지려는 마음에 붙들려 살까요?

 

간헐적으로 자유를 맛보기는 하지만,  대부분 분열된 마음에 사로잡혀 사느라

 '이러고도 예수를 믿는다고 할수 있는가?" 

그런 내 영혼의 민낯을 누구에게 들킬까봐 경건의 모양으로 무장하지만, 그럴수록 영혼의 곤고함은 여전하기만 하니,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고백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평화( 분열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같은 이들에겐  이생에서는 그저  그림의 떡이기만 한것인가요?

 

매일 롬 5장 앞에서  죄로부터의 자유를 기어코 얻어낸듯 보이는 바울의 믿음을 접할때면,

'나도 도전해보리라...  '   입술을 깨물게 하기보단 ,   도저히 범접못할  언감생심의 벽으로 여겨지게 하더니만,

롬 7장에 와서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  추락하고 만것으로 보이니,   우리 안에서 무시로 높아지고자 하는 분열된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는, 결국 위대한 바울조차도 이루어 내지 못하고만 , 그저  평생의 푯대로만 여기고 믿어야 할 잡히지 않는 무지개가 아닐런지요

 

신앙의 푯대와 내 한계, 그 둘 사이의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이 오히려 자유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것만 같으니,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영혼의 자유를 간헐적으로 맛볼수 있긴 하겠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는 그저 우리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신학적 지식에 불과할뿐,  이 땅에서의 매일의 실존은 그저 높아지려는 본성과의 끊임없는 갈등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를 되풀이하기만 하면서 평생에 걸쳐 암중모색의 길만 가다가 끝내는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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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November 10, 2017
*.182.156.94

기러기 님의 영적인 곤혹스러움이 잘 전달되었습니다.

'솔라 피데'에 이르기 전 루터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하겠지요.

어떤 순간이 저기서 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1) 바울의 확신도 24시간, 한평생 계속되는 게 아닙니다.

그도 역시 푯대를 향해서 달려갈 뿐이지 붙잡은 게 결코 아니니

그런 영웅들의 고백 앞에서 주눅들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이라 생각하고 배우기만 하면 충분합니다.

2) 신앙의 진보는 한걸음씩만 이루어지는 거니까,

그래서 그게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겠지만,

너무 먼 곳만 바라보지 말고 

지금은 한걸음만 잘 딛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당장에 페더러처럼 테니스를 칠 수는 없습니다.

페더러를 보고 주눅들어서 테니스 연습을 게을리 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포스트록, 백스트록, 발리, 스메싱, 서브 등을 연습해야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페더러 수준에 이르지 못해도

테니스를 알기만 하면 테니스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앙까지도 하나님에 이르기를 길일 수 있어요.

엔도 슈사쿠의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은>(성바오로출판사)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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