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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Cpa83eAY3Z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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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데살로니가전서 5:16-24 |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살전 5:16-24, 대림절 셋째 주일, 2017년 12월17일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예수 재림 이야기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는 설교 제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자 생각이 다를 겁니다. 1) 이 사실을 문자적으로 믿는 분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이 정한 때가 오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또는 공중 부양의 형태로 2천 년 전의 모습을 한 예수가 지상에 내려온다는 겁니다. 2) 정반대로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재림에 대한 이야기는 신화적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상상력에 불과하니 첨단 과학의 시대인 21세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3) 양 극단을 제외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나온 이야기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믿을 수도 없어서 입장 곤란하게 생각합니다. 가능한 이런 이야기는 피하고 싶어 합니다. 일반 신자들만이 아니라 설교자들 중에서 이런 분들이 제법 많습니다. 대림절을 네 주간 보내면서 예수 재림에 대해서 한 번도 설교하지 않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직무 유기입니다. 자신이 잘 몰라도 일단 신자들에게 말할 거는 말해야 합니다. 4)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좀더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은 예수 재림 이야기를 알고 싶어 합니다. 여기저기 이에 관한 문헌도 찾아봅니다. 쉽게 답을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대충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재림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필수적인 거라서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조인 사도신경에도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가 세상을 심판하러 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고전 16:2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마지막 문장인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는 아람어 ‘마라나타’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아람어를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루터 성경도 ‘마라나타’라고 표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인 아람어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려두는 번역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22:20절과 초기 기독교 역사를 기술하는 사도행전 1:11절에도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이 실린 데살로니가전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기원후 50년경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복음서보다도 최소한 20년 이상 일찍 집필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원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예수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습니다. 1:10, 2:19, 3:13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4장16절과 17절에는 가장 노골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5장에도 다시 예수 강림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었습니다. 살전 5:1절 이하에는 재림의 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오늘 설교 본문의 한 구절인 살전 5:23절에도 다시 예수 강림이 나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총체적으로 예수 재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좋습니다.
진지하고 솔직하게, 그리고 마음을 열어놓고 예수 재림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가 강림한다는 말은 예수가 지금은 다른 곳에 계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 다른 곳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부활의 예수님이 가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그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있다가 때가 되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겁니다. 재림은 곧 승천과 연결되는 것이고, 승천은 곧 부활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부활한 분으로 경험했다는 사실로부터 재림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예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예수 재림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게 붙인 중요한 칭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1)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 메시야는 구원자입니다. 구원자는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기에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할 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전혀 새롭게 정초하셨습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말씀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인식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낯선 개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호 휘호스 투 데우: 마 16:17, 마 27:54)이라고 믿었습니다.
2)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우리말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인자’(호 휘호스 투 안트로푸: 막 13:26, 14:62,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번역의 일관성이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말로, 인자(人子)는 한자로 번역한 겁니다. 한자로 일치시키려면 하나님의 아들도 신자(神子)로 번역했었어야만 합니다. 어쨌든지 인자는 유대인들이 세상 마지막 때 심판주로 세상에 올 이로 생각한 이름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가 마 24,25장에 나옵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을 심판할 사람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두 가지 용어가 가리키는 것은 구원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를 하나님이 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도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이들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제국의 황제들입니다. 제국과 황제들은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다스셨습니다. 태평성세를 약속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지금까지 반복됩니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정치인들과 기업가들과 선생들과 과학자들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수많은 제국과 황제를 거치면서 그들을 메시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완벽한 군사력과 법질서를 세운다고 해도 세상과 거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니 세상을 악과 불의가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언젠가는 세상을 심판하여 구원할 메시야를 보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인자,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운명에서 생명이 완성되었다고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예수 탄생에 관계된 이야기 중에서 목자들 이야기가(눅 2:8이하) 있습니다. 목자들은 밤에 양떼를 지키다가 천사들에게서 예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 순간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천군과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야말로 세상의 평화를 가져올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오늘 제 3독서인 요 1:6-8, 19-28절에는 세례 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인 세례 요한을 메시야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광야에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치는 자에 불과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주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바로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설교와 행위와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전체 운명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메시아에 대한 증거?
예수님을 메시아로, 즉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한다면 세상이 뭔가 달라졌어야 하는데, 예수 이후에서 세상은 전혀 변한 게 없으니 예수를 메시아라는 사실이 증명될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수 이후에도 세상은 메시아가 왔다는 증거가 별로 없습니다. 세상은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여전히 불의하게 작동됩니다. 교만한 사람은 여전히 교만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불행이 여러 사람들에게 졸지에 들이닥칩니다. 예수 당시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타락했고, 로마 정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포악스러웠고, 개인적으로 온갖 불행에 떨어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의 반론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게 아닙니다. 궁극적인 것은 비밀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도록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노자가 말하는 도(道)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도가도비상도’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노자를 향해서 도를 증명해보이라고 한다면 그는 노자의 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노자가 가리키는 도는 사람들이 증명하는 순간에 이미 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도 이와 비슷한 비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 포도주 소믈리에가 포도주 동호회원들에게 수십 가지의 포도주를 시음하면서 설명한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소믈리에는 아주 작은 차이의 맛까지 잡아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차이를 화학방정식으로 증명해보라고 한다면 그는 포도주 맛의 비밀스러운 깊이를 모르는 겁니다. 이 사람이 포도주 맛의 깊이로 들어가면 소믈리에의 설명에 동의할 겁니다. 예수 제자들은 영적인 소믈리에와 같습니다. 그들의 설명을 새겨듣고 반복해서 시음을 하면서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을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그 단계에 까지 이르면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고, 그게 안 되면 기독교인으로 살지 못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교회 형식을 따른다고 해도 실제로는 겉돌게 될 겁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어필하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이것이 기독교인 개인의 실존에서도 매우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믿지만 우리가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한계를 드러냅니다. 여전히 말과 행동에서 실수도 하고, 판단 착오도 일어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혼이 늘 만족스럽지만도 않습니다. 심지어 신앙의 회의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믿음이 좋은 신자들이 모인 교회에서도 크고 작은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분란에 싸이거나 신자들이 시험에 들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게 전혀 없어 보입니다. 내가 과연 예수를 믿는 게 분명한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듭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정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예수 재림 때에는, 즉 종말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분명할 것이라고(고전 13:13) 말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실존입니다. 이미 구원을 얻었으나 그것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아직 기다려야 합니다. 마틴 루터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의인이나 여전히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으로 살아갑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치우치면 구원파가 되고,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치우치면 냉소주의자가 됩니다. 정통 기독교는 불편하더라도 이 긴장을 영적 실존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게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림신앙과 삶
이제 이런 영적 실존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바울은 본문 16-22절에서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제가 풀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항상 기뻐하십시오. 매 순간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모든 일을 감사의 차원에서 관계를 맺으십시오. 이런 삶의 태도는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진리의 영이고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활동을 외면하지 말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무시하지 말며, 어떤 일에서든지 옳고 좋은 것을 분별해서 선택하고, 악과 타협하지 말고 저항하십시오.’
예수 재림 신앙은 공중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자 능력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울의 이러한 권면대로 살고 싶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똑같은 심정일 겁니다. 이런 삶은 억지로 애를 쓴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 지성으로 고상하고 신앙적인 삶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그 삶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말하는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려는 분들에게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고 평생 목회를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생각한 것이기도 하고 기독교 영성의 중심에 놓인 것이기도 합니다. 첫째, 세상 사람들의 세련된 모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본받을만한 교양입니다. 사람이 교양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겉으로 아무리 세련된 것처럼 보이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면은 공허합니다. 노벨상을 받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런 삶을 무시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둘째,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에 깊이 몰입하십시오. 바울이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인이면서 신앙의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세상의 교훈과 교양과 처세술에 떨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앙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집 우물의 물맛을 모르고 남의 집 우물을 기웃거리는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저의 설교를 듣고 옳기는 하지만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재림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오늘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설교를 들으면 ‘이게 뭐지?’ 하고 당혹스러워하거나 실제 삶에서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듣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삶을 어느 정도로 생명 충만하게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제가 직접 도와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의 세계를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전할 뿐입니다. 바울의 심정을 담아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전하고 흠 없게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부스러기 님의 대글에 오히려 설교자인 제가 은혜를 받는군요.
결정적인 순간은 와야만 실감할 수 있어서
현재 실감하는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죽음을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실감하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팔복이 가리키듯이
가난하고 울고 소외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지 회중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닦달당하는지를,
그래서 자칫 제 설교가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제가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야겠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몇몇 교우들과 대화하는 중에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가 얼마나 비열하고 비인간적인지를,
그래서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지를
다시 한번 더 깊이 느꼈습니다.
대림절의 평화가...
목사님, '예수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이 말씀을 이제는
구름타고 오신다는 성경의 묘사대로 믿지 않게 되었고,
예수재림 이야기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이시니
이땅에 하나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날이 온다는 말씀이군요.
하나님 통치는 유대인에게나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비밀한 방식으로 시작되었군요.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수있는것이네요.
종교적 권위가 무너져버린 현대의 무신론적 비판은
허무와 무의미로 이끌어가므로,
대림절신앙을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설교말씀, 감사합니다.
예수가 다시 여기에 오신다는 신앙 명제는
완료된 것이 아니라 종말로 열려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경험을 이해하면서
오늘 여기서 무슨 뜻인지를 부단히 풀어가야겠지요.
재림 신앙에서 관건은 때와 장소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초기 기독교인들이야
자기들이 살고 있던 장소를 생각했겠지만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답일까요? 모르지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지금 우리의 삶을 완성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복잡한 재림 신앙에서 핵심은
지금 여기 우리가 참여하는 '순간'에 이미
하나님의 생명이 비밀스럽게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자유와 해방과 평화의 힘으로!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서... 이거나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하는 한가한 부류가 아니요
눈 먼자, 포로된자, 벌거벗은 자들이 학수고대함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매일의 실존은 신앙을 동원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눈 먼자 부류를 면하려 하고 있으니... 재림은 언제나 12월의 교회 안에서만 울려대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렸겠죠
세상은 철저히 하나님과 무관한채 세상의 씨스템으로 작동되어 가는것 같고, 재림 신앙은 늘 관념과 추상적인 교리안에서만 머물러 있어, 이 거대한 불신앙의 세상을 거슬러 살려는 안간힘의 추동력이 되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신앙 따로 삶 따로'의 교묘한 자기기만의 종교생활을 고착화시켜 주는듯 하니
세모에 재림을 주제로 계속되는 목사님의 외침이 격화소양이 되기만 하는것 같군요
죽음을 늘 기억하며 또
재림에 집중하여 살기에는
세상은 너무나 보암직하고 먹음직한것들 투성이이고,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언제나 화급하기만 하고...
올곧은 믿음을 견지하는게 기적이기만한 작금의 일상속에서, 구할 기도라곤 우리가 얼마나 깊은 어둠 가운데 갇혀있는지 꿰뚫을수 있는 상한 심령을 주십사는것 뿐인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