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등에 관한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겠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등과 비슷한 어떤 것에 대한 일상에서의 경험이다. 칠십이 넘은 지금도 나는 사시사철 일주일에 격일로 세 번씩 테니스장에 나간다. 시니어 동호회원들과 함께 뛰고 라켓을 휘두르면서 공을 따라다니다 보면 한겨울철에도 몸이 따뜻해지고 땀이 흐른다. 몸의 균형을 잡고 뛰면서 공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사람과 가장 닮았다는 침팬지도 비슷한 몸동작을 훈련할 수는 있으나 그 훈련의 성과에서 사람과 비교할 수 없다. 사람만 수백만 년의 진화를 통해서 특별한 능력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문화 활동 전체가 다 그런 능력이다. 침팬지나 오랑우탄이 고릴라는 아무리 잘 가르쳐도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연주할 수 없으며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노래할 수 없고, 피카소처럼 그림을 그릴 수 없고, 한강 소설가처럼 이야기를 만들 줄 모른다. 물론 포도주를 담글 줄 모르고, 에스프레소 커피를 내릴 줄 모른다. 설거지를 비롯한 마당 눈 쓸기와 낙엽 태우기와 꽃밭과 텃밭 가꾸기를 못한다. 어설프게 흉내를 낼 수는 있으나 사람 수준에서 실행하지 못한다. 양쪽에는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영장류 그들과 사람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만 일상에 은폐된 창조와 진화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서 누릴 줄 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만난다. 그들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보석처럼 대하고 보살피면서 누린다. 그림자부터 시작해서 구름 한 점과 시장 바닥의 소음까지 모든 일상은 그들에게 생명의 신비로 경험된다. 이런 일상의 깊이와 신비로 들어간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병들어서 힘들고 외로워도 일상을 황홀하게 살아낼 것이다. 그런 경험이 곧 하나님의 등을 본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