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게 아니다. 상식적으로도 인생은 한 번이면 충분하지 두세 번 반복이면 지루하지 않겠는가. 신구약 성경에서 시간과 역사는 환원이 아니라 종말을 향한 직진이다. 영원회귀가 아니라 열린 종말을 향한 동력이다. 우리 개인도 앞으로 나아갈 뿐이지 뒷걸음치지 않는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기는 한다. 그들은 실제로 죽은 게 아니다. 일종의 임사체험이다. 임사체험과는 다른 특별한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다시 죽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하는 사건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부활이 예수의 운명에서 선취(先取, Prolepse, anticipation)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궁극적인 미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리 당겨서 실현된 것이다. 신학에서만 이런 선취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물리학도 마찬가지다. 뉴턴의 중력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나 호킹의 블랙홀 이론 등등은 먼 미래에 밝혀질 궁극적인 물리 세계가 앞당겨져서 부분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그 먼 미래와 지금의 물리 세계가 이런 위대한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연결된다.
물리학과 달리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 학문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 신학적인 접근으로만 그것의 진리성이 드러날 수 있다. 우리의 진리성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그만큼 고유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학과 신앙이 반(反)과학주의는 절대 아니다. 우리의 해명이 진리의 차원에서 정당하다면 비록 자연과학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으로부터 배척되지도 않는다. 언젠가 자연과학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 순간이 오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하며, 그런 순간이 올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예수의 재림이 아니겠는가.
제자들은 예수의 운명에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종말에 발생할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서 선취되었다고, 즉 궁극적인 현실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일까? 그 경험의 깊이로 나도 들어가고 싶다. 그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이기에 바울도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한 게 아닌가. 제자들의 부활 경험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 인생도 완성될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삶의 허무와 자기 집착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글로 어떻게 궁극적인 세계를 구체화할 수 있겠는가(不立文字). 그래도 교회 구원을 말하겠다고 그럴듯한 포즈를 취하고 나선 마당이니 내가 이해하거나 경험한 수준까지는 밀고 나가야겠다. 제자들의 부활 경험의 실체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우시기를 바라고, 대한민국 교회가 이 경험에 집중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금도 제 주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을 그저 죽었다 살아난 것으로 단순히 믿습니다. 교회 구원의 핵심이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해주신 부활 경험의 실체에 달려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지난 10여 년, 부활에 대한 인식 전환이 저에게는 가장 큰 (신학적) 변화였습니다. 늘 부활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넓혀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활을 그저 죽었다 살았다는 것으로만 설명하면 너무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문자주의에서 언제쯤 헤어나올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매년 일 년에 단 한 번 '예수 부활하셨네'로 끝나는 부활절 연합예배 설교는 이제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부활 생명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이끌어 주신 목사님께 큰 은혜를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