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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듣기 : | https://youtu.be/2BlugR8TxH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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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누가복음 24:13-34 |
눈이 열리다!
눅 24:13-34, 부활절 셋째 주일, 2017년 4월30일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이 어땠는지를 상상해보십시오. 기독교는 당시에 신흥종교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는 매력적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 부활을 전하는 기독교인들이 이상한 집단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를 훌륭한 스승으로 살다가 억울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인물로만 전했으면 괜찮았겠지요.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일상의 경험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 예수 부활을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선포했습니다. 부활 없이는 기독교 신앙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딜레마였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조건이 특A라 할 수 있는 여자가 조건이 C나 D에 불과한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옆에서 볼 때 두 사람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습니다. 부모들도 반대하고, 친구들도 반대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선은 자기가 왜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흔들림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태도가 그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 3독서로 읽은 눅 24:13-34절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런 태도로 예수 부활을 전한 이야기 중의 하나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 두 사람
12제자에 속하지 않은 제자 두 사람이 안식일 다음날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이유는 본문에 설명이 안 나옵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십자가 처형 이후에 모든 꿈이 무너졌다는 생각으로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엠마오를 거쳐서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었을지 모릅니다. 두 사람은 길을 가면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것에 대해서 너무 억울하다는 말을 서로 했을 겁니다. 자신들이 그걸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했겠지요. 더 이상한 소문도 들었습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에 사형이 집행된 관계로 장례 절차를 제대로 밟지 못한 탓에 장례 절차를 밟기 위해서 예수의 시신이 묻힌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를 찾아갔던 여자들이 예수의 시체는 찾지 못하고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 역시 깜짝 놀라 무덤을 찾아갔지만 무덤이 빈 것만 보았을 뿐입니다. 무덤에 묻힌 예수의 시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이런 말을 서로 나누면서 엠마오를 향해서 터벅터벅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 곁으로 부활의 예수님이 다가왔습니다. 두 제자는 자신들과 동행이 된 한 남자가 예수님인 줄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변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분간이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들이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요. 예수님은 모른 척하면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무슨 말을 나누고 있었습니까?” 두 제자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인 글로바라는 이름 하는 제자가 나서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했습니다. 글로바는 요 19:25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 인물입니다. 거기에 글로바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아닌 다른 마리아의 남편으로 나옵니다. 글로바가 전한 내용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바로 그것입니다. 1)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선지자였다. 2) 유대교 권력자들이 예수를 로마 총독에게 넘겨서 십자가 처형을 받게 했다. 3) 우리는 예수를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4) 예수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이미 삼일이 되었다. 4) 여자들과 제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시체를 보지 못하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말만 들었다. 이처럼 아주 간략한 이야기 외에 더 이상 말할 게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 자체를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제자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에 영광에 이른다는 사실이, 즉 부활한다는 사실이 이미 모세의 글과 선지자들의 글에 다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명했는지를 일일이 거론하지 않지만 엠마오에 가까이 갈 때까지 많은 말씀을 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다면 2시간 정도 말씀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된 것 같습니다. 엠마오에 이르렀을 때 이들과 헤어져 더 길을 가려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붙들고 그곳에서 하룻밤 함께 묵자고 제안했고, 예수님도 그 제안에 동의하셨습니다.
저녁밥을 먹을 때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들고 축사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모양이 앞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눌 때 행한 것과 똑같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교회에서 집전되는 성만찬을 염두에 두고 이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순간에 제자들은 눈이 밝아져서 빵을 떼어주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제 예수님에게서 자세한 내막을 전해 듣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예수님은 다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과 길을 걸으면서 말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웠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즉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열한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듣고 본 바를 보고했습니다.
눈이 열리는 순간
여러분은 지금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 현현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길고 가장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편의 동화처럼 문학적으로도 앞뒤가 꽉 짜인 이야기입니다. 어떤 대목이 여러분에게 가장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까? 저는 두 제자들이 떡을 받아드는 순간에 예수님을 알아봤다는 대목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눅 24:3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부활의 예수님은 그냥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 뒤에 빌라도 총독에게 나타나서 ‘내가 바로 당신이 십자가형을 선고했던 예수요.’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이나 가야바 대제사장이나 예루살렘의 여러 사람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만난다고 해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눈이 열린 사람에게만 그게 가능합니다. 하나님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경험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새로운 시각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근본은 눈이 열려야 눈에 들어옵니다. 겉으로는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간단하게만 설명하겠습니다. 동굴 안에서만 살던 종족 중에서 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동굴 밖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동굴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빛이 있고, 색깔이 있고, 향기가 있고, 여러 종류의 생명 현상이 가득했습니다. 동굴 안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굴 안의 동족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고, 동굴 세계는 다시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곰팡이가 슬고, 박쥐만 날아다니고, 습기가 가득하고, 어둠침침한 동굴 안의 세계를 리얼리티로 받아들인 채 살아갔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일단 동굴이라는 세계에 길들여지면 동굴 밖의 세계를 아무리 옆에서 설명해줘도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 동굴 안에 갇혀서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밖으로 나와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을까요?
이런 말을 어떤 분들은 불편하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 말은 철학이나 인문학, 또는 영성에서만 타당한 것이지 실제 인생살이에서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실제 삶을 분리해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보다는 세상의 작동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세상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살이 칼에 베이면 피가 나고 아픕니다. 돈이 없으면 사는 게 고달픕니다.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한 조건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압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보려고 합니다. 아무도 그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저도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만약 세상의 작동 원리에 충실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여러분에게 필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들처럼 눈이 밝아져서 부활의 예수를 알아보는 데서만 기독교 신앙은 성립됩니다. 문제는 당시나 지금이나 이 부활 경험을 실증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어렵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믿어지지가 않으니 포기하고 삽니다. 아무래도 세상의 언어로 보충해야겠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양미자 역할을 맡은 분은 윤정희입니다. 거기에 엑스트라로 김용택 시인이 등장합니다. ‘시 쓰기’시민교양강좌의 강사로 온 김용택 시인은 시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시는 억지로 쓰는 게 아니라 시가 오는 걸 받아쓰면 된다고 말합니다. 양미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시가 오는 걸 경험할 수 없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김용택은 사과를 들고 설명을 계속합니다. 사과를 먹어봤냐고, 그 맛이 어땠냐고 묻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상투적인 대답을 합니다. 김용택은 실제로 사과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봄에 핀 사과나무 꽃,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 작은 사과 알맹이, 태양빛, 달빛, 비, 안개 등이 다 사과와 연결되는 생명 현상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의 사물에 불과한 사과에서 우리는 세상과 우주의 시원(始原)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슈퍼마켓에 가서 사과를 카트에 담아 와서 식구들과 사과를 깎아 먹으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사과 값과 품질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런 사람은 사과를 경험한 게 아닙니다. 사과의 시원성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경험은 곧 생명의 시원성 경험입니다. 그건 사과의 달빛처럼 숨어 있어서 눈이 밝아지기 전에는 보이지도 않고 경험되지도 않습니다. 무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영혼의 눈뜸과 신앙공부
엠마오로 가는 중에 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들었습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공부했다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기자가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것은 부활 경험에서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으로 25-28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가 어려우냐? 그리스도는 영광을 차지하기 전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며 모세의 율법서와 모든 예언서를 비롯하여 성서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기사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은 두 제자를 책망했습니다. 당신들은 어리석은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모세 오경과 선지자들의 글과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했습니다. 엠마오 두 제자가 부활의 예수를 인식하게 된 데에는 이런 설명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두 제자만이 아니라 초기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성경공부는 부활 경험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성경공부를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 것은 시간이 남아돌거나 열광적인 신앙을 찾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성경공부는 단순히 성경의 정보를 아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공부입니다. 공부라기보다는 구도와 수행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인 내공이 깊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눈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 ‘매일 묵상’에 게재했던 글을 모아서 이번에 새물결플러스 출판사를 통해 『목사 공부』라는 책을 냈습니다. 목사나 목사 후보생들만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반 기독교인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구샘터교회 예배 순서와 그에 대한 설명도 그 책에 나옵니다. 목사 공부는 목사가 되는 기술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로서의 영적인 내공에 대한 것입니다. 책의 시작은 목사로서의 ‘소명’이고, 마지막은 목사의 구원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공부는 사유와 직관의 깊이로 들어가는 구도적 삶의 태도와 실천이라는 사실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목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들처럼 눈이 열리는 경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즉 영적인 눈이 밝아지면 부활의 예수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걸 실제로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시나요? 이에 관해서 별 생각 없이 살아가는 건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을 심리적으로 불편하게 하려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런 질문에 직면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깊어지지 않으며, 깊어지지 않으면 영적인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무런 불편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세상에서 배운 경험과 교양만으로도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저의 설교는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반면에 삶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대구성서아카데미를 통해서 제 설교를 듣고 있는 어떤 분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의 설교에 큰 위로와 자극을 받는다고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더 깊이 아는 공부에 대한 길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부족한 거 없이 살아가는 분이지만 제가 보기에 영혼의 만족을 절실하게 구하는 사람입니다. 눈이 더 열리기를 바라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영혼이 뜨거워지는 경험, 영혼의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설교를 하는 사람이고, 간혹 제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그 중에는 관록(?)이 있으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과연 내 설교가 정말로 설교였던가 생각하면 '아니올시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겸손은 아닙니다.
이 '아니올시다'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제가 행하는 설교의 정체는 교단 전통의 무게에 억눌린 설교이며, 상황에 민감한 설교이며,
설교이니까 의당 그렇게 전해야 된다는 명분에 더 치우친 설교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문맥을 연구하고 원어와 영어해석을 연구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는 성도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은 제가 보기에 약장수와 같은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의 행위에 대해 생각이 분명해집니다.
다비안을 알고 정목사님의 글을 알게된 것,
주님의 은혜입니다.
새로운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이지요.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