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200
노자, 리더십에 반(反, 또는 叛)하다.
<’반하다’는 말을 혹시 오해할지 몰라 한자를 덧붙입니다. 이 때의 ‘반’은 反, 또는 叛 입니다.>
8. 공자 빙자한 리더십 이론은 사상누각
우리나라에서 나온 <논어> 관련 책은 크게 세 종류이다.
첫째는 고전으로서의 <논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고,
둘째는 <논어>에 대한 연구서 혹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한 책이고,
셋째는 <논어>의 특정 구절을 경영이나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새롭게 응용한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비단 <논어>에 국한할 것이 아니다. 사서 삼경을 비롯한 모든 고전 – 동서양을 막론하고 - 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위의 세 종류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첫번째 분류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나머지 두 가지 종류의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즉 어떤 고전이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그에 대한 해설적 연구나 응용연구가 나올 수 있다. 고전에 속하는 책들은 대개 오래 전에 쓰였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뜻이 불분명해지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러므로 각 고전에 대한 철저한 고증적 연구를 통해 그 고전이 본래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후속 연구는 사상누각처럼 위험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그다지 빛이 나지 않고, 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며, 특히 학문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고전 번역이나 연구 수준은 아직 크게 미흡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프레시안>에 게재된 김갑수의 <지피지기 백전백승…손자병법은 실용서가 아니다!>를 참고, 또는 인용한 것임.)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그렇게 미흡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현재 시점의 고전에 기대어 세 번째 분류의 책들은 실로 다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를 빙자한 리더십 책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공자, 노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목하 진행중인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논어 위정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등장한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온고이지신이면 가이위사의니라)
이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렇게 번역한다.
(번역 -1)
“공자 말씀하시길, 옛 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 하셨다.’
주희도 마찬가지이다.
(번역 -2)
“공자가 말했다. 옛 것을 연구하여 새로운 것을 알아내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여기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은 남의 스승이 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남’의 스승 – 곧 리더- 이 되려면 배우고 익혀야 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옛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배우라 한다. 배우는 것은 그래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충실을 위해 하였으나, 지금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한다.”>(논어, 憲問 -25, 김학주 역)
그러므로 리더십 주창자들은 공자의 이 발언 역시 리더에게 향하는, 리더를 위한 발언으로 간주한다. 리더의 덕목으로 그렇게 옛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한다.
그런데 살펴본 것과 같은 번역- 1과 번역 -2는 만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올바른 번역일까? 그래서 공자의 뜻을 제대로 우리에게 옮겨 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런 번역은 이제 그야말로 옛 번역이 되어 버렸다. 그런 번역은 이제 다른 번역이 아니라 틀린 번역으로 취급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다만 리더십 주창자들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요즈음 진척되고 있는 연구결과, 새로운 번역은 그들의 해석과 다르다.
(번역 – 3)
“옛 것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스승을 삼을 수 있다” (새번역 논어, 이 수태, 43쪽)
(번역 – 4)
“옛 것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 것, 그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 (논어는 진보다, 박민영, 45쪽)
따라서 이 구절은 옛 것을 배우고 새것을 익히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까지 옛 번역에 의지해 리더십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그 말이 표피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주장에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공자 노자의 말씀을 더 천착하여 확실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염불보다 젯밥에 더 마음이 있기에 그렇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그들은 남에게 뭐 하라 말하기 전에, 표피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공자의 말씀 –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배우라 – 을 전혀 따르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세번 째 부류의 책인 리더십 책을 쓰려면 자기들이 기대고 있는 공자의 말씀이 요즈음 어떻게 연구되고 있는지 ‘새로운 것’을 배워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옛것에 기대어 리더십을 주장하고 있으니, 김갑수가 위의 글에서 ‘사상누각처럼 위험하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2013.11.03 21:36:09
옛것을 익히며, 새것을 알아가는 과정, 그 앎의 길(道).
내게 능히 스승이 된다는 것.....이란 라라님의 해석 경로가
정말 독창적이네요.
이수태의 새번역 논어와 논어는 진보다, 라는 책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논어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라라님의 그러한 해석 과정에는 가지 못하는 듯 합니다.
결론은 같지만 그 과정이, 라라님의 것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제가 오늘 한 수 배웠습니다.
이러한 동양고전을 주제로 한 세째 부류의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우리 성경의 해석과 그에 따른 리더십등 응용활용이 어쩌면
그리 똑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지, 놀랄 뿐입니다.
올바른 해석에 노력하기 보다는 문자적인 해석에 머무르면서도
그것을 가지고 사골국물 우려 먹듯이 하는 모습, 그래서 오히려 바른 해석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행태
똑 같습니다.
노자 강의(기세춘)는 저도 읽고 있는 책인데, 도덕경 편제인 장을 따르지 않아
참고할 때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 그것이 한가지 아쉬운 점입니다.
도덕경 자체가 어려운 것을, 기세춘 선생도 우리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해설해 주면 좋을텐데
읽어도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듯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집니다. 건강하시길,..
내게 능히 스승이 된다는 것.....이란 라라님의 해석 경로가
정말 독창적이네요.
이수태의 새번역 논어와 논어는 진보다, 라는 책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논어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라라님의 그러한 해석 과정에는 가지 못하는 듯 합니다.
결론은 같지만 그 과정이, 라라님의 것이 훨씬 이해가 쉽습니다.
제가 오늘 한 수 배웠습니다.
이러한 동양고전을 주제로 한 세째 부류의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우리 성경의 해석과 그에 따른 리더십등 응용활용이 어쩌면
그리 똑같은 과정을 밟고 있는지, 놀랄 뿐입니다.
올바른 해석에 노력하기 보다는 문자적인 해석에 머무르면서도
그것을 가지고 사골국물 우려 먹듯이 하는 모습, 그래서 오히려 바른 해석이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행태
똑 같습니다.
노자 강의(기세춘)는 저도 읽고 있는 책인데, 도덕경 편제인 장을 따르지 않아
참고할 때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 그것이 한가지 아쉬운 점입니다.
도덕경 자체가 어려운 것을, 기세춘 선생도 우리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해설해 주면 좋을텐데
읽어도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듯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집니다. 건강하시길,..
2013.11.05 17:27:15
오목사님,
아무래도 제 댓글에 대해
쪼매 부연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어요.^^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를 옛것을 익히며 새것을 알아가는 과정, 그 앎의 길,
자체가 스승이 될 수 있다. 라고 풀이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師를 君子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공자사상으로 비추어볼때 그게 더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나,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된다" 는 식의 기존해석으로는
師=君子를 끌어내기는 좀 무리이지 않을까 싶어서 제가 그 과정을 생각해 본거여요.
말하자면 溫故而知新의 歷史를 말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지식,정보로 아는 옛것, 새것이 아니라 그 故와新이라는 문자에 함축된
깊은 뜻을 헤아려보고자 한 것이고요. 그것이 또한 공자의 뜻일거라 생각되서요.
그리고, 君子야말로 진정한 영적리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잖아요?
제 생각엔 그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언어, 문자를 선택했다면 우리도 최대한 그 뜻을 존중해 줘야 하지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원래의 뜻(극상품포도로 비유해 볼까요?^^)
을 저버리고 찌질한 들포도를 맺는 일에 진짜 신중해야 할 것 같고요.
아무래도 제 댓글에 대해
쪼매 부연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어요.^^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를 옛것을 익히며 새것을 알아가는 과정, 그 앎의 길,
자체가 스승이 될 수 있다. 라고 풀이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師를 君子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공자사상으로 비추어볼때 그게 더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나,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된다" 는 식의 기존해석으로는
師=君子를 끌어내기는 좀 무리이지 않을까 싶어서 제가 그 과정을 생각해 본거여요.
말하자면 溫故而知新의 歷史를 말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지식,정보로 아는 옛것, 새것이 아니라 그 故와新이라는 문자에 함축된
깊은 뜻을 헤아려보고자 한 것이고요. 그것이 또한 공자의 뜻일거라 생각되서요.
그리고, 君子야말로 진정한 영적리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잖아요?
제 생각엔 그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언어, 문자를 선택했다면 우리도 최대한 그 뜻을 존중해 줘야 하지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원래의 뜻(극상품포도로 비유해 볼까요?^^)
을 저버리고 찌질한 들포도를 맺는 일에 진짜 신중해야 할 것 같고요.
2013.11.05 22:21:03
논어를 읽으면,저절로 군자란 말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 군자란 개념을 학자들 모두다 개성있게 해석해 놓아서, 그것 또한 연구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라라님의 추론 그리고 영적 리더라는 결론 또한 무시못할 학설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제 글에 참고 하겠습니다.
특히나 온고이지신 가이위사.....라는 대목에서, 라라님의 해석처럼 師 = 君子로 읽으면
저절로 해석이 되는군요.
타인의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군자가 되는데 옛것과 새것을 알고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석함미 더 좋게 여겨집니다.
오늘 한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라님의 논어강의에 저는 all ears 입니다.
그 군자란 개념을 학자들 모두다 개성있게 해석해 놓아서, 그것 또한 연구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라라님의 추론 그리고 영적 리더라는 결론 또한 무시못할 학설의 하나로 생각됩니다.
제 글에 참고 하겠습니다.
특히나 온고이지신 가이위사.....라는 대목에서, 라라님의 해석처럼 師 = 君子로 읽으면
저절로 해석이 되는군요.
타인의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군자가 되는데 옛것과 새것을 알고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석함미 더 좋게 여겨집니다.
오늘 한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라님의 논어강의에 저는 all ears 입니다.
오목사님,
올려주신 말씀들 쭉 읽다보니
이런 성경구절이 생각나네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5:2)
예수님 말씀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어쩌다 지나가는 눈길로라도
동서양의 고전을 대하다보면
그 심오한 지혜의 세계에
입이 다물어질 뿐입니다.
(내가 알았다고 하는 것)이 '다 없어진 셈이다'
라고나 할까요?
제 좁은 소견으로도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는
옛것을 배우고 익히며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자체가 스승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네요.
여태껏 제가 알기로는
옛것과 새것이 대립개념이었어요.
새것을 알려면 옛것을 알아야 가능하다고요.
그런데 이렇게 해석을 해 놓고 보니
溫故, 知新이 서로 협조를 하네요. ^^
옛 것을 익히며 새 것을 알아가는 과정, 그 앎의 길(道),
내게 능히 스승이 된다는 거지요?
목사님, 이게 맞다면..^^
제가 오늘 아주 큰 것을 배웠습니다.
목사님,
<노자강의/기세춘> 댑따 두꺼운 책 빌려다 놓고
쪽수 못 넘기고 헤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