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리더십에 반(反, 또는 叛)하다.
 
<’반하다’는 말을 혹시 오해할지 몰라 한자를 덧붙입니다. 이 때의 ‘반’은 反, 또는 叛 입니다.>
 
8. 공자 빙자한 리더십 이론은 사상누각
 
우리나라에서 나온 <논어> 관련 책은 크게 세 종류이다.
첫째는 고전으로서의 <논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고,
둘째는 <논어>에 대한 연구서 혹은 이해를 돕기 위해 해설한 책이고,
셋째는 <논어>의 특정 구절을 경영이나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새롭게 응용한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비단 <논어>에 국한할 것이 아니다. 사서 삼경을 비롯한 모든 고전 – 동서양을 막론하고 - 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위의 세 종류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물론 첫번째 분류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그런 책들은 나머지 두 가지 종류의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즉 어떤 고전이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그에 대한 해설적 연구나 응용연구가 나올 수 있다. 고전에 속하는 책들은 대개 오래 전에 쓰였고,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뜻이 불분명해지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그러므로 각 고전에 대한 철저한 고증적 연구를 통해 그 고전이 본래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지 않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후속 연구는 사상누각처럼 위험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그다지 빛이 나지 않고, 또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며, 특히 학문적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의 고전 번역이나 연구 수준은 아직 크게 미흡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프레시안>에 게재된 김갑수의 <지피지기 백전백승…손자병법은 실용서가 아니다!>를 참고, 또는 인용한 것임.)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그렇게 미흡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현재 시점의 고전에 기대어 세 번째 분류의 책들은 실로 다 살펴볼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를 빙자한 리더십 책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공자, 노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목하 진행중인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논어 위정에 다음과 같은 글이 등장한다.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온고이지신이면 가이위사의니라)
 
이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렇게 번역한다.
(번역 -1)
“공자 말씀하시길, 옛 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 하셨다.’
 
주희도 마찬가지이다.
(번역 -2)
“공자가 말했다. 옛 것을 연구하여 새로운 것을 알아내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여기에서 배우고 익히는 것은 남의 스승이 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남’의 스승 – 곧 리더- 이 되려면 배우고 익혀야 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옛 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배우라 한다. 배우는 것은 그래서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충실을 위해 하였으나, 지금의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한다.”>(논어, 憲問 -25, 김학주 역)
 
그러므로 리더십 주창자들은 공자의 이 발언 역시 리더에게 향하는, 리더를 위한  발언으로 간주한다. 리더의 덕목으로 그렇게 옛 것을 배우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한다.
 
그런데 살펴본 것과 같은 번역- 1과 번역 -2는 만인의 칭송을 받고 있는 올바른 번역일까? 그래서 공자의 뜻을 제대로 우리에게 옮겨 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런 번역은 이제 그야말로 옛 번역이 되어 버렸다. 그런 번역은 이제 다른 번역이 아니라 틀린 번역으로 취급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다만 리더십 주창자들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요즈음 진척되고 있는 연구결과, 새로운 번역은 그들의 해석과 다르다.  
(번역 – 3)
“옛 것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스승을 삼을 수 있다” (새번역 논어, 이 수태, 43쪽)
 
(번역 – 4)
“옛 것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 것, 그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 (논어는 진보다, 박민영, 45쪽)
 
따라서 이 구절은 옛 것을 배우고 새것을 익히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까지 옛 번역에 의지해 리더십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그 말이 표피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주장에 근거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공자 노자의 말씀을 더 천착하여 확실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염불보다 젯밥에 더 마음이 있기에 그렇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그들은 남에게 뭐 하라 말하기 전에, 표피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공자의 말씀 –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배우라 – 을 전혀 따르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세번 째 부류의 책인 리더십 책을 쓰려면 자기들이 기대고 있는 공자의 말씀이 요즈음 어떻게 연구되고 있는지 ‘새로운 것’을 배워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옛것에 기대어 리더십을 주장하고 있으니, 김갑수가 위의 글에서 ‘사상누각처럼 위험하다’고 말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