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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Lz0t1huQB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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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한복음 2:1-11 |
혼례와 포도주 이야기
요 2-11, 주현절 후 2주, 2025년 1월 19일
가나 혼례 잔치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나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왕복 하루면 가능한 거리입니다. 가나에서 혼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혼례에 예수와 제자들만이 아니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함께했습니다. 잔칫집은 예수님의 친족으로 추정됩니다. 아버지 요셉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서른 살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출가를 미룬 까닭은 일찌감치 미망인이 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례는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인척과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입니다. 예수께서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서 흥겹고 즐겁게 지내고 있었겠지요.
한 하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잔치 중간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손님들이 의외로 많았는가 봅니다. 지금이야 술이 떨어지면 대형 상점이나 편의점에서 사 오면 되지만, 2천 년 전 가나 지역에서는 상황이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그런 형편을 전합니다. 어떤 특별한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혼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거겠지요. 예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의 이 대답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이 문장을 직역하면 ‘여자여, 나와 당신에게 무엇이 있습니까?’입니다. ‘여자여’라는 호칭도 그렇고, 그 내용도 냉정하게 들립니다. 당시 어법으로 볼 때 이런 표현은 그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생각의 강조라고 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라는 표현이 나오는 막 3:31-35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일상에 일일이 개입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내 때’(ἡ ὥρα μου)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눈치챈 마리아는 자기가 무안당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혼례의 심부름꾼들에게 예수의 말을 따르라고 이릅니다. 이 혼례의 진행에서 마리아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이야기는 6절부터 두 번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혼례를 치르는 이 집에는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정결 예식에 필요한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돌항아리에 물을 넣어두었다가 손님들이 오면 손발을 씻을 수 있게 해줍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정결 의식이 유달리 분명했습니다. 그게 위생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을 거고요. 돌항아리의 용량은 보통 50리터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 개입하지 않겠다 하던 예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합니다. 물이 채워지자 이를 떠서 혼례 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에게 가져가라고 이릅니다. 연회장은 신랑의 친구나 혼주의 친구가 맡았겠지요. 연회장이 포도주 맛을 보았습니다. 포도주 맛이 좋았는지 그는 신랑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9절입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당시 혼례 자리에서 벌어지는 재미있는 관행으로 보입니다. 하객들이 술에 취하면 술맛을 잘 모른 채 술기운으로 마시니까 잔치 후반부에는 질 낮은 포도주를 내왔는가 봅니다. 손님들에게 정품 양주를 제공하다가 그들이 취하면 가짜 양주를 내오는 야간 유흥업소의 행태와 비슷합니다. 어쨌든지 포도주 건으로 자칫하면 혼례 분위기가 깨질 뻔했으나 예수로 인해서 마지막까지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혼례로서의 메타포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먼저 듭니까? 정말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본문은 그런 마술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명시적으로 보도하지는 않습니다.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한 다음에 그 돌항아리에 들어 있는 것을 떠다 주라고 했을 뿐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추정할 수는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는 본문에서 핵심이 아닙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은 마술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객관적인 팩트로 읽지 말고 종교적 징표로 읽어야 합니다.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두 가지 징표, 또는 메타포가 나옵니다.
첫째 메타포는 혼례입니다. 결혼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람들에게 가장 멋진 축제입니다. 생명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메타포로 혼례만 한 것은 없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뜻만이 아니라 이제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인류가 존속하려면 아기를 낳아야만 합니다. 결혼을 멋진 축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오늘 첫째 말씀인 사 62:1-5절에도 하나님의 때를 가리켜서 청년과 처녀의 결혼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종종 혼례를 예로 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마 25장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라는 말로 시작하는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천하에 몹쓸 둘째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게 곧 하늘나라와 같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에 일어날 생명 충만한 세상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9:9) 모두가 함께 웃고 먹고 마시고 축하해주는 혼인 잔치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가 혼례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런 사실을 몸과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삶과 일상을 환희와 기쁨이 가득한 축제로 경험합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용서할 마음이 생기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겠지요. 삶이 가벼워지겠지요. 싸울 때 싸우더라도 축제에 참여한 사람처럼 즐겁게 싸웁니다. 예수를 신랑으로 삼는 신부로서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작은 차이로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삶에서는 예수가 아니라 돈이 더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야 인생을 잔치처럼 흥겹고 멋지게 살아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건강도 행복한 삶에서 중요합니다. 본인이나 가족이 지병을 앓고 있으면, 친구나 연인에게 배신당하면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듯합니다. 이런 인생은 혼례의 축제가 아니라 장례의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만이 아니라 다른 복음서와 신약성경 전체는 예수가 우리 삶을 축제로 만드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 선포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예수로 인해서 여러분의 삶이 축제가 되었다고 다른 이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으신가요?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여전히 생명 충만하게 살아가십니까? 이 사실을 실질적으로 느끼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는 빌 1:20절과 21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지병으로 힘들어했고, 열두 사도에 속하지 않았기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빌 4:4-5절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혼을 앞둔 사람처럼 모든 이들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힘든 상황을 초월하는 힘을 얻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성숙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동양식 어법으로 고승이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절감하는 사람은 지금 당하는 어려움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말씀의 의미를, 사랑의 능력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구원에 가까이 간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도 이런 점에서는 여전히 부족하고 부끄럽습니다. 다만 그 방향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런 내공이 깊어지면 어떤 형편에 떨어져도 삶이 혼례의 축제로 경험될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축제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이기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죽음이라는 운명까지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과연 죽음까지도 삶의 축제로, 또는 인생의 완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포도주로서의 메타포
둘째 메타포는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첫 번 메타포인 혼례나 축제와 연관됩니다. 잔치와 축제에는 늘 술이 따라옵니다. 술은 사람을 술기운에 취하게 만듭니다. 술에 취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기를 초월합니다. 부끄러움을 초월합니다. 평소에 말이 없던 사람도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집니다. 평소에 인색하던 사람도 술에 취하면 넉넉해집니다. 그래서 잔치에는 늘 술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마틴 루터는 늦은 나이로 수녀와 결혼한 뒤에 매일 2리터 분량의 맥주를 마셨다고 합니다. 젊은 시절 수도사였을 때는 깡마른 체구였는데, 훗날 뚱뚱해진 이유가 맥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꾸로 술에 취하면 더 난폭해지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그런 사람은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이겠지요.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은 현상적으로 비슷합니다. 행 2장에는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서 일어난 어떤 특별한 현상이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라고 보통 말합니다. 제자들이 모였던 다락방에 성령이 바람과 불꽃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모국어인 아람어가 아니라 다른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 제자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포도주의 기운이 온몸을 채우듯이 성령이 우리의 실존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경험이야말로 우리 삶이 천국 잔치의 차원으로 올라서는 지름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주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충만한 삶에 대한 징표이자 메타포입니다. 11절이 이 사건을 가리켜서 ‘표적’(sign)이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구약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기적 이야기도 기본으로는 표적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기적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눈에 기적처럼 보이는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말하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한마디로 기적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신앙입니다. 위 11절도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삶이 축제가 되고 술 취함처럼 거룩한 영에 취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경험이 무엇인지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람 연구가입니다. 매일 바람을 찾아다닙니다. 바람이 이는 걸 보면 황홀감을 느낍니다. 바람에 자기 온몸을 맡기기도 하고, 바람이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바람을 타고 활공하는 독수리를 봅니다. 그걸 느낄 때마다 그의 영혼은 어떤 기운으로 충만해집니다. 높은 연봉을 받는 친구들이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인터넷 쇼핑에 빠져서 매일 새로운 옷과 물건을 사들이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고급 맛집을 찾아갈 생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바람만 있으면 만족스럽기에 돈도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눈만 돌리면 어디서나 바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바람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흙을 그렇게 좋아하면 그는 흙의 기운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시와 노래와 그림으로 충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충만해졌습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도 부러워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베스도 총독에게 심문을 받으면서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행 26:24)라는 말을 들었겠습니까.
물에서 포도주로
저는 앞에서 두 가지 사실을, 즉 혼례라는 징표는 우리 삶이 축제라는 사실과 포도주라는 징표는 영혼이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이제 이 두 가지 사실이 함축하는 근본 메시지를 짚어야겠습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분명히 변화됩니다.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평면적이던 일상이 입체적인 일상으로, 밋밋한 맛의 물에서 고유한 맛과 능력을 보이는 포도주로 변화되는 겁니다. 보물을 발견한 사람들이니까요. 저는 그런 변화를 단순히 도덕적인 변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변화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포도주로의 변화는 존재 자체의 변화입니다. 종에서 아들과 딸로의 신분 변화입니다. 자기 성취에서 은혜로의 전환입니다. 자기애(愛)로부터 생명 사랑으로의 변화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모호하게 들리고, 관념적으로 들릴 겁니다. 당연합니다. 앞에서 짚은 ‘그의 영광을 나타냈다.’라는 문장도 관념적이니까요. 궁극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메타포는 관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영광’에, 그 생명의 빛에 휩싸이는 것이 그리스도교 복음이 말하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동굴 속에서 살다가 동굴 밖으로 나와야 빛을 경험하듯이 말입니다. 동굴 속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태양 빛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의 빛이 예수에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구원의 빛입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것을 경험했기에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나 율법이나 체제에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온전히 사로잡힌 사람은 남을 부러워하지 않듯이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완성해야 한다는 강요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와 평화를 얻었습니다. 삶에 관한 생각 자체가 변화된 것입니다. 포도주를 직접 마셔보지 못한 사람은 남의 말만 듣고 포도주 맛과 그 충만함의 실체를 모르듯이 예수에게 나타난 생명의 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모르고 외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삶을 흉내 내면서 그들과 똑같이 경쟁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포도주의 고유한 맛과 그 능력을 따라가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목사님. 말씀듣고 전에 알던 것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덮기만하면 따뜻하다던 담요를 받았는데 아무리 오래 덮어도 그냥 뜨뜻 미지근하기만 하기에 담요를 버렸습니다. 그 담요가 나쁜 담요는 아니지만 정말 따뜻한 담요가 있는데 꼭 그 담요를 덮고 있으면서 따뜻한 담요를 그위에 덮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혼인잔치, 포도주, 하나님의 영광을 새롭게 배우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변화, 점진적인 변화의 작은 트리거가 연초부터 발사되었습니다. 늘 보던 말씀들이 저에게 새롭게 큰 울림을 주고 변화를 주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변한다는 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정말 진한 드라마를 숨죽이고 보는 느낌과 같네요. 그러한 느낌을 찾으려고 많이들 시간을 들이는데 좀 안타까운 방향에서 찾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