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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주현절 조회 수 6825 추천 수 0 2024.01.07 23:22:52
설교보기 : https://youtu.be/Awpoq7wHQbw 
성경본문 : 사도행전 19:1-7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19:1-7, 주현절 후 1, 202417

 

 

에베소 교회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성지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입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님의 3년간 공생애가 주로 이곳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바울이 왕성하게 선교 활동을 펼친 소아시아, 그러니까 지금의 투르키예 중서부와 그리스 지역에도 성지라 일컬어질 만한 장소는 많습니다. 교부 시대로 넓히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과 이스탄불이 중요하겠지요. 저는 요한계시록에 거론된 소아시아 일곱교회가 있었던 튀르키예를 가보고 싶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배경인 에베소(에페소스)는 튀르키예의 남서쪽에 자리합니다. 에베소 왼편으로는 지중해가 있고, 아래로는 밀레도가 있습니다. 밀레도(밀레토스)는 고대 서양 철학의 발생지입니다. 탈레스가 바로 이곳 출신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마칠 때 에베소에 잠시 들렸습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못하여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예루살렘을 거쳐서 처음 출발지인 시리아 안디옥으로 갔다가 3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면서 에베소에 다시 들립니다. 3차 선교는 대부분 에베소에서 이뤄졌습니다. ‘두란노서원이 바로 에베소에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민중 폭동으로 인해서 에베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게해 건너편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교우들을 살펴본 다음 되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마게도냐에서의 활동이 끝난 뒤에 밀레도로 내려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에베소에 들르고 싶었으나 오순절 안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했기에 에베소 바로 아래 도시인 밀레도로 갔습니다. 교통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밀레도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에베소에 보내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들 앞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자기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 자세한 내용이 행 20장에 나오는데, 그중에서 행 20:22-25절만 읽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관계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에 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죽을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해서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유언하듯이 말하는 걸 보면 그 관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에베소 교회에 관심이 큰 걸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베소가 선교 전략적으로 거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주도였습니다.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입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두 번째 도시라 할 알렉산드리아 못지않은 국제도시였습니다. 밀레도가 가까이 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철학 등등에서 다시 가장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국제도시에 교회를 반듯하게 세운다면 세계 선교를 추진하는 데서 상당한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바울이 생각했겠지요.

다른 하나는 에베소 회당을 다양한 분파가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유대교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당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인과 그리스도인의 차이도 서로 배척할 정도로 크지 않았습니다. 이게 지금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는 자연스러웠습니다. 에베소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는 바리새파도 있었고, 사두개파도 있었고, 에세네파도 있었고, 세례 요한 추종자들도 있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구분되지도 않았습니다. 바래새파이면서도 세례 요한의 제자일 수 있고, 세례 요한의 제자이면서 그리스도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큰 틀에서 회당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즉 복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일이 바울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그런 정체성이 희미해지면 그리스도교는 자칫 유대교의 아류로 떨어지고 말 테니까요. 당시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아볼로

이런 역사적 배경을 전제하고 오늘 설교 본문을 따라가 봅시다. 바울은 드디어 에베소에 왔습니다. 재미있게도 본문은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어떤 제자들을(그리스도인 일반을 가리키는지,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을 가리키는 정확하지 않은데) 만나서 성령을 받았느냐(19:1-2)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고 대답합니다. 바울이 다시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합니다. 요한의 세례만으로 신앙생활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이 크게 잘못도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중에도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세례 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문제인지는 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우선 요한의 세례 전통이 당시 교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는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해야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도 서로 다른 세례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분파를 형성되었습니다. 요즘 장로교와 감리교와 성결교가 교파를 형성하듯이 말입니다. 사실은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지 않았기에 그리스도파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에게 속하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그리스도파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네 분파의 하나인 아볼로 파가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의 세례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18:24-25절에 따르면 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율법 학자입니다. 그도 바울처럼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요한의 세례 전통을 전파한 사람은 아니었을까요? 위에서 인용한 고린도 교회의 여러 분파 현상과 요한의 세례만 알던 에베소 제자들 현상을 놓고 본다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 추종자들을 대표하고 바울은 예수 추종자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미묘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불편한 진실이고,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친족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출가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영향을 받아서 출가했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선포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이 메시지는 요한이 먼저 선포한 것입니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진술하는 복음서는 마태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단순하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요한이 전파했다고 말하지만, 마태복음만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3:2)라고 전파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짚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말도 사실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요한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세상 개혁을 외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참수형을 당했고, 예수께서는 뒤를 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삼십 대 초반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훗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때로는 경쟁 관계를, 때로는 협조 관계를 맺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 안에서 왜 이렇게 오랫동안 세례 요한의 전통이 영향을 끼친 것일까요? 세례 요한의 가르침과 삶이 매우 강력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를 총칭해서 물세례라고 이름 붙여도 됩니다. 물세례의 내용은 세례 요한의 설교에 다 들어있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변화하는 겁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그것을 자세하게 전합니다. 한 마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3:8)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3:12) 요즘 말로 개혁적인 삶,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목사들을 판단할 때도 이런 기준이 작용합니다. 아무개 목사님은 정말 정의롭게 살았다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았다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칭찬합니다. 그런 도덕주의 설교가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례 요한의 물세례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빚진 게 많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복음의 본질이 크게 약화하거나 훼손되었을지 모르니까요.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을 종종 바꾸기도 합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안다는 대답을 듣고, 4절에서 세례 요한도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5절에 따르면 바울의 설득으로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전통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전통으로 돌아섰다는 의미입니다.

 

성령세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물세례라고 한다면 예수의 세례는 성령세례입니다. 물세례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손에 잡히는데 성령세례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따르면 성령세례는 방언과 예언으로 나타납니다. 방언과 예언은 성령 은사입니다. 은사에는 방언과 예언만 있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일과 설교하는 일과 각종 봉사가 다 포함됩니다. 방언과 예언은 아주 특별한 현상이라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은사를 강조하는 교파를 가리켜서 오순절파라고 합니다. 유대교의 오순절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대표적으로 속칭 순복음교회가 그 교파입니다. 저는 오늘 방언과 예언 현상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성령세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힌다는 차원에서 방언과 예언의 본래 의미만을 설명하겠습니다.

1) 방언은 언어 존재론에 해당합니다. 이전에 알던 언어와 다른 새로운 언어를 알면 세상이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세계를 알면 언어도 달라집니다. 언어가 바로 그 사람의 존재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젖을 주는 대상을 엄마라는 단어로 인식합니다. 수 없는 반복을 통해서 그 아이에게 엄마의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만약 그 아이가 청각장애를 겪는다면 엄마라는 언어를 경험하지 못하겠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방식으로 엄마를 경험하긴 하겠으나 그것이 제한적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그 아이와 엄마는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언어는 모두 기본적으로 방언입니다. 설교도 방언입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 믿음으로 의로워짐,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깨어서 기도하고, 예수 재림을 기다리라, 등등이 모두 방언 아니면 무엇인가요?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에 부른 상투스찬송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양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 찬양이 방언으로 들립니다. 아는 사람은 신앙과 삶의 새로운 깊이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교회 다니고 예수 믿어도 그리스도교 신앙과 삶을 새롭게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영적인 청각장애를 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2)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족집게 점쟁이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어떤 것쯤으로 말입니다. 옛날에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분들이 태아의 성을 맞춰주기도 했습니다. 그 확률은 50%쯤 되겠지요. 예언은 주술적으로 미래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 안에서 삶을 종말론적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영적 태도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하는 문장이 바로 예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바울의 문장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현재의 우리는 연약합니다. 시험도 받습니다. 실수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속사람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됩니다. 그런 종말론적 미래를 희망하면서 삽니다. 그런 희망 가운데서 나오는 말이 곧 예언입니다.

언어의 존재론적 깊이를 가리키는 방언과 미래지향적인 삶을 가리키는 예언을 삶의 중심으로 삶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사춘기와 청소년기와 장년기를 거치면서 세속 원리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속 원리의 핵심은 자기애입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자기에게 몰입하게 합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짜증이 나고 불안하고, 거꾸로 잘난 척하고 싶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분 좋은 일만 찾습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 않기도 하고, 잘 굴러간다고 해도 만족이 안 되니까 마치 앞만 볼 수 있는 안대를 낀 경주마처럼 전력 질주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일단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하니까요.

지금 당장 삶이 피곤하기에 회개라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방언과 예언은 배부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배고픈 사람에게는 거리가 멀다,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분발하시라고, 은총을 구하라 말 외에 맞춤형 대답을 저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이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그리스도인은 요한의 세례인 물세례 수준으로 만족할 겁니다. 그런 정도로 살아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사는 분들을 저는 칭찬하고 싶습니다. 위선이 아니라 진정한 바리새인으로 사는 거니까요.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저는 여러분이 이왕 그리스도교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면 요한의 세례에 머물지 말고 예수의 세례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시라고 말입니다. 단순히 행위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2024년 한 해가 이제 시작했습니다. 한 해를 다 보내고 12월 마지막 주일에 우리 모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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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김사관

January 08, 2024
*.42.197.253

목사님의 이 설교를 어제 눈 앞에서 들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물세례에 만족하며 머물러 있는 한국 교회가 적어도 '방언'과 '예언'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만이라도 꼭 알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올 한해 성령세례의 충만한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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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8, 2024
*.182.156.241

지난 일년 동안 서울샘터에서 한번씩 김사관님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제 구세군 목회 현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시니 자주 만나지는 못해서

온라인상에서나마 만났으면 합니다.

복된 2024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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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소유와존재

January 08, 2024
*.254.11.100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도다 만군의 주 하나님/ 하늘과 땅에 가득한 그 영광/ 높은 데에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양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나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은 이 찬양이 방언으로 들립니다. 아는 사람은 신앙과 삶의 새로운 깊이로 들어갑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서는 존재론적이라는 언어가 아른 거립니다.


주변을 볼 때 그 존재론적 깊이로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깊이를 알고 또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제 생각엔 그 깊이를 저렇게 가볍게? 취급해도 되나 싶을 정도입니다.

대구 성서 아카데미를 통해서 진짜 조금이나마 더 맛을 보고 살아본

저의 시각으로는 교만함?이 아니라 뭔가 확신에 찬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게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존재론적 깊이 속으로 함께 구도정진 할 수 있는 도반들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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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January 08, 2024
*.182.156.241

소유존재님이 말하는 그 '존재론적 깊이' 말입니다.

그걸 reality로 경험하지 못하면 말장난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걷습니다.

한 사람은 피곤하거나 다른 할일이 많다는 핑계로 걷기를 빨리 끝내려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걷기 자체에서 황홀할 정도의 기쁨을 느낍니다.

후자가 바로 걷기의 존재론적 깊이를 아는 사람이겠지요.

중력을 몸으로 느끼고, 바람을 느끼고, 풍경을 느끼니까

자기가 온전히 걷는 행위 안에 들어가버린 겁니다.

중력과 바람과 풍경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자기는 점점 더 가벼워지겠지요.

2024년 하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이 한없이 가벼워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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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소유와존재

January 09, 2024
*.254.11.100

그걸 리얼리티로 경험하지 못하면 말장난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이 말씀에 깜짝 놀랐습니다.

존재론적 깊이라는 말을 그동안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봅니다...

2024년 하나님 안에서 한없이 가벼워지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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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7053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6951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7409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6801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7250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7369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7357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7370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7276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7426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6983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7369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7353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7381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7373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7364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7381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7381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7370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7095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7406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7731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7864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7411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7540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7394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8496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7824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7619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8036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7997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7896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8945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8295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8039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7928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8996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9190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9255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10984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10481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10953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846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8149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8081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8947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8068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9573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9000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8115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899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8803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901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8613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9330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9121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7845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9025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9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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