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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부활절 조회 수 5490 추천 수 0 2024.04.14 19:20:19
설교보기 : https://youtu.be/QLzo3xZR8Lk 
성경본문 : 누가복음 24:36(후)-48 

죽은 자 가운데서

24:36()-48, 부활절 3, 2024414

 

 

오늘 설교 본문인 눅 24:36()-48절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와 몇몇 추종자들이 모인 자리에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믿어지시는지, 믿어지지 않는지요. 부활이 뭘까,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게 뭘까, 궁금한 생각이 들겠지요.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릴까 생각합니다.

 

부활 경험의 역사성

24:37절에 따르면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께서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다.’라고 합니다. 이게 제자들이 예수 부활 앞에서 보인 첫 번째 반응입니다. 예수 부활은 그렇게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족이나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는데, 어느 날 그가 여러분 앞에 나타났다고 하면 꿈을 꾸거나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하겠지요. 우리의 세상 경험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복음서가 예수 부활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짤막하게 말하며, 그 내용 전개도 단편적이면서 두서가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와 관련해서 특이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자 베드로는 원래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겠다고 동료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고향인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다가 어느 날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요 21장에 아주 길게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요? 제자들의 예수 부활에 관한 경험과 믿음은 훗날 천천히 형성된 겁니다. 그들이 예수님 부활을 처음부터 경험하고 믿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일어날 수 없겠지요. 비유적으로 성악가가 되려는 사람들의 발성 경험이 그렇습니다. 목에 힘을 빼고 성대를 열고 복식호흡을 통해서 소리를 낸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처음 배울 때는 그런 발성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기도 하나 뭐가 뭔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훗날 완전히 공명한 소리를 내는 단계에 진입하면 그는 소리를 자유자재로 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부활 경험은 처음에 이게 뭐지.’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훗날 분명해지면서 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부활에 관한 인식과 경험 과정에서 중요했던 요인의 하나가 구약성경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전반부는 자기들도 다 이해할 수 없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그 부활이 구약성경에서 이미 언급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4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실현될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입니다. 46절이 이를 정형화된 문장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

 

구약성경의 어떤 구절이 이 문장과 직접 관련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관련된다는 뜻일 겁니다. ‘독일성서공회해설이 달린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에는 다음과 같은 몇몇 구약성경 구절이 예수 고난 및 부활과 연관해서 참조용으로 나옵니다. 52:13-53:12, 6:2, 9:9, 2:7, 16:8-11.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내용입니다. 부활에 관한 구절은 호 6:2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십자가 처형

본문 눅 24:46절 문장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 늘 따라오는 표현은 제삼일죽은 자 가운데서입니다. 사도신경에도 장사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제삼일은 위에서 인용한 호 6:2절을 근거로 한 것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는 신약성경의 고유한 표현입니다. 부활은 당연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니까 굳이 죽은 자라는 표현이 없어도 될 텐데 이를 빠뜨리지 않고 언급했다는 말은 구약성경보다 신약성경이 죽음 문제를 더 진지하게 다뤘다는 뜻입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얼마나 처절했는지에 대한 직접 경험이 작용했겠지요.

십자가 처형은 로마법이 만든 가장 잔인한 사형법입니다. 너무 잔인한 방법이라서 로마 시민권자들에게는 집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형수를 십자가 기둥에 눕힌 다음 양 손바닥에 대못을 박고 십자가를 세웁니다. 사형수의 몸무게는 양 손바닥에 실립니다. 피가 흐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헛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그렇게 죽을 때까지 십자가 기둥에 매달아 둡니다. 건강한 남자는 숨이 끊어지기까지 일주일 이상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죽은 다음에도 시신은 곧 수습하지 않고 짐승들이 뜯어먹도록 버려둡니다. 이런 과정이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반로마 반역자의 운명이 어떤지를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극한의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목적입니다. 예수께서는 체력적으로 고갈된 상태라서 숨이 곧 끊어졌고, 그의 시신은 지역 유지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청을 넣어서 즉시 매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지 제자들은 자기들 스승이 가장 저주스럽고 잔인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마다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짚었습니다. 그 이후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그 구절이 반복되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는 그리스어 성경 κ νεκρν의 번역입니다. 전치사 κ는 영어로 from이지 in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어 사도신경은 from the dead라고 했고, 독일어 사도신경도 von den Toten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 죽은 자 가운데서는 마치 in the dead처럼 들립니다. 그리스어와 영어 및 독일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리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생명의 세계로 옮기셨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in이라는 전치사는 정적인 뉘앙스가 있으나 from은 동적인 뉘앙스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종말론적인 삶까지 역동적으로 이어지는 총체적인 생명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사실에만 머물면 부활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라는 우리말을 들을 때 단편적이거나 정적인 게 아니라 총체적이고 동적인 생명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역시 부활 생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다만 지금 우리의 삶에는 부활 생명이 은폐의 방식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씨앗 속에 꽃이 은폐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 땅에서의 세상살이를 부활의 삶으로 살아낼 것입니다. 이는 오늘 여기서 벌어지는 죽음 지향적 문화를 거부하고 생명 지향적 문화를 향해서 투쟁하듯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오늘 대한민국은 죽음의 문화가 강한가요, 생명의 문화가 강한가요? 이전 설교에서도 한번 짚었듯이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가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는 통계가 자살률이고, 압도적으로 하위를 달리는 통계가 출산율입니다. 모두 죽음의 문화와 연계된 통계입니다. 인생 주기로 볼 때 봄철과 같은 시기를 보내야 할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입시 지옥에 떨어져서 행복하지 못합니다. 전교 1등만 특별 대우를 받는 세상입니다. 거기에다가 정치인들은 전쟁처럼 정치합니다. 죽음의 문화가 대한민국을 총체적으로 지배한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죽음의 문화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은 10년 전 2014416일에 발생했던 세월호 참사입니다. 당시 기억이 저에게도 생생합니다. 인천항을 떠나서 제주도를 향해서 항해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 중이라는 속보를 이른 아침에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태평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세월호가 웬만해서는 흔들림도 없는 대형 여객선이기에 완전히 바다에 가라앉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설령 배가 완전히 침몰하더라도 승객은 모두 구조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비슷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 뒤로 벌어진 이야기는 저의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승객 476명 중에서 304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사망자와 실종자 대다수는 당시 단체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과 교사들이었습니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데다가, 자동차와 선박과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등, 온갖 현대 첨단 기술에서 세계 선두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만한, 아니 후진국에서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는 건 불가사의입니다.

<창작과 비평> 2024년 봄호에 세월호 참사 10주년과 관련해서 두 꼭지의 글이 실렸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최선교 평론가의 갱신하는 말, 다시 쓰는 미래-세월호 참사 10주년과 새로운 시적 시도들입니다. 글 앞쪽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하나는 정확한 침몰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고, 다른 하나는 해경과 청와대 등 주요 기관이 왜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이런 대형 참사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분석입니다. 이미 원인이 다 밝혀졌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사회 구성원이 동의하는 사회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유가족들은 지금도 그 문제가 속 시원하게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그들에게는 참된 위로이자 힐링일 테니까요.

당시 티브이 화면에는 세월호 침몰 과정이 특급 재난 영화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이 중계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세월호 선체 안에 아들과 딸을 둔 부모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말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그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사회적 분석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으로 유가족을 충분할 정도로 위로했었어야만 합니다. 그들의 입으로 이젠 됐어요.’라고 할 때까지 나라를 대표한 정부가 그들과 함께 슬픔을 나눴어야만 합니다.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고, 당시 정부는 마지못해서 위로하는 시늉만 했습니다. 우리는 늘 미봉책으로 재난을 처리하곤 했습니다.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때 겪은 부모의 슬픔을 참척(참혹할 , 근심할 )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입니다. 박완서의 수필집 <한 말씀만 하소서>는 전공의 과정에 있었던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어미의 심정을 써 내려간 글입니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먹혀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 내가 슬퍼하며 스올(지옥)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37:35)라고 통곡합니다. 세월호 참사 때 17세 아들과 딸을 잃은 당시 젊은 아빠 엄마의 심정이 이와 같았겠지요. 현 정부가 그 문제를 다시 거론하기 싫어도 국가 차원에서 이번 416일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추모 행사를 개최하거나, 그게 안 된다면 4.16재단이 개최하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억식에 대통령이 참석하면 세월이 흘러서 대부분 50대 중반이 되었을 그 유가족 엄마와 아빠들이 조금이라도 더 위로를 받지는 않을까요?

 

죄 사함과 부활

저는 앞에서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의 문화를 거부하고 생명 지향적 삶을 살아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더 분명하게 밝히라거나 유가족을 더 위로하라는 요구와 실천은 이런 생명 지향적 삶에 속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일반 사람들도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들과 당연히 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근본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46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이어지는 47절에서는 약간 결이 다른 말을 합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의로운 사람들이 참여하게 될 미래의 생명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면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라고 표현했습니다. 죄 사함과 회개라는 말이 교리적인 표현으로 들려서 확 닿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가 같습니다. 여러분의 걱정과 염려는 대개 자기와 자기 가족에 관련된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이는 곧 자기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기 염려에서 벗어나니까 죄에서 벗어난 겁니다. 성경은 죄가 바로 죽음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죄에서 벗어나면 죽음과 그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죄로 인한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미래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절인 48절을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게 된 것을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본문이 독자들에게 정작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그리스어 μάρτυς는 증인만이 아니라 순교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를 통해서 일어난 고난과 부활과 회개와 죄 사함입니다. 생명 지향적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더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 않도록 증인으로 살고 순교자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걸 어떻게 실천하느냐는 여러분의 판단과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드러나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각각의 형편상 나서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다만 이 엄청나고 거룩한 소명에 이끌려서 사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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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좋은나무

April 18, 2024
*.222.228.129

"자기 연민이, 자기에 대한 염려가 죄와 사망이다...."  목사님의 설교는 텍스트 중심이면서 적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 같지만 사실은 면밀히 듣고 읽다 보면, 저는 오히려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교리나 개념을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적실하게 매우 실존적으로 '번역'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신학개념도 사람들에게, 세상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어진 거라는, 자기가 스스로를 완성시킬 필요가 없어진 자유하게 된 거라는 가르침도 저에게나 현대인들에게 와 닿는 번역이고 설명입니다. 이번 설교도 깊이를 다 따라가진 못했지만...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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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April 18, 2024
*.181.143.52

좋은나무 님이 저의 설교관을 정확하게 짚으셨군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2천년전 성경 언어를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분들이 실감하도록

'번역'이나 '변증'하는 작업을 설교라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애를 쓰기는 하는데, 어딘가 2%가 부족해서 생각만큼 반응은 없네요.

좋은나무 목사님이 알아봐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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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6477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688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7205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7435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6932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7017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6897
996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7902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7299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7156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7585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7529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7482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8456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7693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754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7474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8390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8508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8664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10028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9611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10047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7970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7651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7628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8331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7617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9082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8378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7610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8457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8238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847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8155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8810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8667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7409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8554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8579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963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9324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7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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