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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성령강림절 조회 수 1443 추천 수 0 2023.06.11 18:36:17
설교보기 : https://youtu.be/Y27TaIpc3M4 
성경본문 : 창세기 12:1~9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12:1~9, 성령강림후 둘째 주일, 2023611

 

 

하나님의 부르심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족장 시대를 연 아브라함은 유일신 종교라 일컬어지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신앙인의 표상으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75세에 하란에서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았고 175세에 가나안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소명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창 12:1절 이하에 나옵니다. 첫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름을 바꾸기 이전이라서 아직은 아브람으로 불리지만, 우리는 편의상 그냥 아브라함으로 부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아브라함은 이미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지명)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로 알려진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위치하고, 하란은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 중간에는 그 유명한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부산과 대구와 안동이 똑같이 낙동강을 끼고 있듯이 세 도시가 유프라테스강을 끼고 있습니다. 데라가 아브라함을 비롯한 몇몇 가족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까지 온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대목에 압축적으로 나옵니다. 데라의 가계도는 조금 복잡합니다.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나홀, 하란(인명)입니다. 나홀은 자기 동생인 하란의 딸, 즉 조카 밀가와 결혼했습니다. 하란은 밀가를 비롯한 이스가와 롯을 낳고 젊어서 죽었습니다. 데라는 아들 아브라함과 며느리 사라, 손자 롯만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205세에 죽었다고 합니다. 데라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창 12장부터는 아브라함의 서사가 파노라마처럼 25장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들은 순간에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까 무조건 순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갈대아 우르는 매력이 넘치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지금의 뉴욕이나 런던이나 베를린이나 서울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런 도시는 물적 토대도 단단하고 교육과 문화 영역에서도 선두를 달리기에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볼거리도 많아지고 먹을거리도 다양해지며 취미활동의 기회도 많아집니다. 요즘 대도시에 카페, 고급 식당, 병원, 대형마트, 미장원, 안마시술소, 사우나, 헬스장, 무도장, 술집, 연극과 영화관 등등이 즐비하듯이 말입니다. 갈대아 우르도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삶을 즐길 수 있는 매력이 차고 넘치는 문명 도시였습니다.

문명화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일종의 종교 현상에 가깝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표면적으로 종교라고 하지 않으나 삶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종교적입니다. 일례로 대형마트나 초현대식 백화점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건물은 대형 교회당과 비슷한 기능을 감당합니다. 고객은 거기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실컷 구경하고 손에 넣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도 있고, 무료하거나 허무한 삶에서 해방될 수도 있습니다. 일 년에 오천만 원 이상을 구매하는 부자 고객만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를 여는 백화점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행위가 일종의 구원입니다. 자기가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는다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요.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말씀은 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에서 보듯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이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말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대하게라는 말이 아주 솔깃하게 들립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서사를 보면 그가 가나안에서 상당한 재력을 자랑하는 토호(土豪)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거 같습니다. 개인 병사를 318(14:14)이나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더구나 역사가 흘러서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똑같이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으니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합니다. 미국에 이민 간 교포가 사업에 성공하거나 정치에 성공해서 ‘TIME’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여 표지 사진에 올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이 창대하게 되었다거나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물은 어디에나 흔합니다. 성경은 그런 인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스라엘 역사에서 최초로 경험하고 그 부르심에 최초로 응답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소명 경험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그 명령을,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 본문은 그것에 관한 설명이 일절 없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12:4)라는 표현만 나옵니다. 성경은 늘 소명 경험을 간략하게 보도합니다. 모세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소명 경험에 관한 이야기도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소명 경험이 갑작스러운 거라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기 이전에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소명 경험이 과연 옳은지 아닌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예수 제자들과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명 경험은 우리 귀로 직접 어떤 소리를 듣거나 길을 가다가 갑자기 산 복권이 1등 당첨되는 사건과는 차원이 다르니까요.

아브라함의 소명과 시기적으로도 그렇고 형식에서도 가장 가까운 소명 이야기는 모세의 소명입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 이어지는 출애굽기 초반에 나옵니다. 애굽 왕자로 살던 모세는 동족 히브리인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가 망명자가 됩니다. 나이 마흔에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미디안 토속 종교 제사장인 이드로의 데릴사위가 되어 양을 키우면서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사십 년 동안 모세의 영혼이 얼마나 갈급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어느 날 그는 미디안 토속 종교의 성지인 호렙산 근처로 양을 몰고 갔다가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덤불 현상을 보고 큰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선승들이 대나무 바람 소리를 듣거나 기왓장이 떨어져서 깨지는 소리를 듣고 큰 깨우침을 얻는 거와 비슷합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힌 듯이 답답했던 영혼이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경험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첫 지도자였다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입니다. 아브라함은 달을 섬기는 갈대아 우르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가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서 그곳을 떠나서 같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인 하란까지 와서 지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미국과 러시아 연해주나 중국 만주로, 일본과 유럽 각지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거기서 돈을 잘 벌어서 편안히 사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의 편안한 삶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영혼이 답답한 겁니다. 영혼이 답답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이 뭔지를 아는 사람만 물을 찾는 거와 같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답답하다는 말은 영혼이 간절하다는 뜻입니다. 돈이 간절한 사람은 돈을 찾고, 친구가 간절한 사람은 친구를 찾습니다. 영혼이 간절해야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영혼이 간절하다는 말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모든 일이 사람의 재밋거리 중심으로 작동하는 오늘날에는 더 그렇습니다. 세상살이가 재미있으니까 더는 의미 있는 어떤 것을 찾지 않는 겁니다. 오늘날 그 재미가 무언지를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온종일 재미있게 놀 수 있습니다. GPT를 활용할 줄 알면 재미가 더해질 겁니다. 영화를 실컷 보고, 음악도 실컷 듣고, SNS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일상생활도 기웃거립니다. 유튜브에는 온갖 볼거리가 차고 넘칩니다. 그것이 현대인들에게는 삶의 리얼리티입니다. 그런 문명이기(利器)를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힌 젊은이들은 영혼의 간절함이 무엇인지 절감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이 간절하다는 말은 삶의 근본을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인 예를 들어도 이해를 바랍니다. 저는 평생 신학자와 목사와 글 쓰는 이로 살았습니다. 평생 교회에서 설교했고, 상당한 기간 신학대학에서 강의했고, 상당한 분량의 책을 쓰고 번역했습니다. 제가 쓴 책 중에는 소위 말하는 기독교계에서 베스트셀러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 칠십 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영혼이 간절합니다. 삶의 가장 핵심 영역인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은 인간적 업적을 성취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하거나 신앙적인 교양을 쌓는다고 해서, 그리고 교회를 초대형교회로 키운다고 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에 집착할수록 하나님에게서 오히려 더 멀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바울이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을 거론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두 가지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모세의 율법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전통이 그들 신앙의 토대였습니다. 자랑할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근거는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믿음이라고 변증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관해서는 이미 롬 2~3장에서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그 대목에서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귀한 명령이지만 사람은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기에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피력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 충만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믿음을 확실하게 드러낸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영혼의 자유

교회 밖에 있는 현대 지성인들은 이런 설명을 불편하게 여기거나 냉소적으로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삶의 핵심이 어디 따로 있냐고, 영혼이 실재하느냐고, 모두가 이유도 모른 채 세상에 태어나서 늙어 병들고 고생하다가 죽어서 아득한 미궁의 세계로 빠져드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 대충 여기서 재미있는 삶으로 만족해야지 공연히 영혼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그런 영혼의 간절함은 삶의 실체를 왜곡하거나 외면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분들에게 저는 할 말이 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각각 밭을 샀거나 소를 샀거나 결혼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14:15 이하) 마지막 절인 2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기쁨이, 즉 영혼의 만족이 무엇인지 모르면 다른 바쁜 일을 핑계로 초대를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살이에서 경제적인 생산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주일 공동예배에 억지로는 참여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결국에는 각자 선택해야 합니다. 소명에 응하든지 외면하든지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그냥 머물 수도 있었으나 그곳을 떠나서 약속의 땅으로 갔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만이 우리 영혼이 풍요로워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믿어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영혼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실제로 느껴보셨는지요. 다른 말로는 영혼의 자유입니다. 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영혼 구원입니다. 바울이 롬 4장에서 역설한 의로움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유나 고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한 이유는 모두 한결같이 바로 영혼의 자유를 향한 갈망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영혼의 자유와 풍요로움을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자유와 풍요로움이 우리에게 늘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도 있고 밑으로 뚝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맞나, 하는 불안감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자유와 풍요로움이 무엇인지는,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느낍니다. 한밤중 폭풍우에 흔들리는 항해 중에도 멀리서 깜빡이는 등대 불빛을 보듯이요. 우리에게 숙제는 우리의 영혼이 더 풍요로워지고, 더 예민해지는 것, 즉 등대 불빛이 더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을 가리킵니다.

그 숙제를 풀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을 바로 내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입니다. 그 경험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삶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의 소명 이야기는 삶의 본질에 닿아있기에 우리의 영적인 눈높이에 따라서 늘 새롭게 경험될 겁니다. 그 소명 경험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떠남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를 향한 회심입니다. 떠남과 나아감은 동시적 사건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편안하게 해줄 듯한 돈에서 떠나야겠지요. 친척과 아버지의 집에서도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떠남은 돈과 가족과 친구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는다는 게 아니라, 즉 출가자가 된다는 게 아니라 그들과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돈과의 관계도 새로워지고, 친구와의 관계도 새로워지고, 교우들과의 관계로 새로워지는 것이 곧 떠남의 영성입니다.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관계는 먼저 새로운 차원을 경험해야만 가능합니다.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차원에 들어간 수준만큼 일상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남녀관계도 그렇습니다. 사랑의 밀당차원만 아는 남자나 여자는 상대방과 밀당 관계만 맺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을 지배하려고만 하겠지요.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세상은 우리를 온통 그런 밀당 관계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행한 거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새로운 차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면, 그 사랑을 경험할 때만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이를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이가 충분히 들었는데도 그런 차원을 갈망할 뿐이지 아직도 거리가 멉니다. 날이 저물어가는데 아직 갈 길이 한참이나 남은 어떤 늙은 나그네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이 저와 여러분에게 날이 갈수록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profile

[레벨:18]부스러기은혜

June 12, 2023
*.253.57.26

칠순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영혼이 갈하다는 목사님의 자기고백이 짠하게 와닿습니다.

목회적 성과나 욕망의 성취등 일상의 표면에 집착할수록 

일상의 심연과는 멀어진다는 말씀도 그러하고요.

우르에서 하란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세상의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영혼의 갈함의 임계량이 채워져갈 즈음에 그 분의 음성이 들리었겠죠?

갈함이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그래서 더 타들어 가는 영혼의 헛헛함을 부여안고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오늘이란 시간은

흡사 세상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어 늘 군중속의 고독자 심정으로 살았을

아브라함과 모세가 갈함을 움켜쥐고 보냈던 그 시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감격이 평생을 갈수없듯이

열대지방의 한낮 스콜(Squall)처럼 맛보기로 잠깐씩 채워주시는 은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더 사모하게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손에 잡힐듯 말듯한 구원의 외로운 여정속에서 목사님의 진솔한 고백이 위로가 되어줍니다.

고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June 12, 2023
*.104.32.110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간절함이 

늙은 나이에도 (나름으로) 생동감 있게 살아가게 하는 거룩한 동력입니다.

칼 라너의 <기도의 절실함과 그 축복에 대하여> 78쪽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영혼의 모든 힘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분께 흘러들어가고,

사랑 안에서 우리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중심이 되시는 그분,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신 그분께 밀려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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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2569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2468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2327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3287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2346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2456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2427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2971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2861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2601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3829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3437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3837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2849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2459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2419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3108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2526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4004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3146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2672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3351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3136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3350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3251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3795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3433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2361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3580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3494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447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4100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2769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3339
959 성령강림절 하나님 나라의 미래 지향성 (눅 9:57~62) [2] 2022-06-26 2610
958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왕상 19:1~4, 8~15a) [2] 2022-06-20 3305
957 성령강림절 성령이여, 오소서! (요 16:12~15) [2] 2022-06-12 3366
956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영과 양자의 영 (롬 8:14~17) [4] 2022-06-05 4651
955 부활절 의로운 자의 기쁨 (시 97:1~12) [2] 2022-05-29 3825
954 부활절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행 16:9~15) [4] 2022-05-22 4427
953 부활절 새로운 계명 '사랑' (요 13:31~35) [2] 2022-05-15 2781
952 부활절 영생과 하나님 (요 10:22~30) [2] 2022-05-08 3541
951 부활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의 삶 (계 5:11~14) [1] 2022-05-01 2665
950 부활절 예수를 '믿는 자' (요 20:19~31) [1] 2022-04-24 4527
949 부활절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행 10:34~43) [1] 2022-04-17 2598
948 사순절 유월절 마지막 식사 (눅 22:14~23) [2] 2022-04-10 3045
947 사순절 하나님의 새로운 일 (사 43:16~21) [4] 2022-04-03 4037
946 사순절 예수의 하나님 (눅 15:1~3, 11b~32) [5] 2022-03-27 2963
945 사순절 목마름의 실체 (사 55:1~9) [4] 2022-03-20 3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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