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lassic Style
- Zine Style
- Gallery Style
- Studio Style
- Blog Style
설교보기 : | https://youtu.be/0XkzBNY6JRo |
---|---|
성경본문 : | 마태복음 28:16-20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성령강림후 첫째 주일, 2023년 6월 4일
의심하는 사람들
마태복음을 쓴 사람은 예수 출생부터 시작하여 출가와 하나님 나라 선포와 여러 가르침과 치병과 치유, 그리고 여러 유형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긴 여정을 28장에 이르는 분량으로 정리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마 28:16~20절은 승천 직전의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런 대목에서는 희망적인 이야기로 끝내는 게 글쓰기의 순리입니다. 17절에 예상외의 진술이 나옵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마태가 복음서를 쓴 기원후 80년 어간의 그리스도인 중에서 신앙이 흔들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진술입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대목인 마 28:11~15절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마태복음의 독자 전승이 나옵니다. 예수의 시신이 안치된 동굴 무덤을 찾아왔다가 ‘살아나셨다.’라는 천사의 말을 전해 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본 경비병들이 대제사장에게 보고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경비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퍼뜨리라고 매수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예수 시신을 훔쳐 갔다고 말입니다. 경비병들은 많은 돈에 매수되었습니다. 마 28:15(후)절은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본문은 유대인이라고 지칭했으나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마태복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1세대 제자들보다 2~3세대가 흐른 뒤에 살던 사람들이라는 점을 참작해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이 그들에게는 별로 생생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 시신을 빼돌렸다는 소문이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고, 더구나 부활의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게 상식의 차원에서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집필을 마치면서 ‘의심하는 사람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교인들을 향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호소하는 내용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입니다. 오늘 21세기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의심하던 사람들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18~20절까지 나옵니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직전에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주신 말씀을 1차 유언이라고 한다면 승천 직전에 하신 이 말씀은 2차 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세 가지 명령을 제자들에게 내리셨습니다. 첫째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고, 셋째는 예수의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말씀은 서로 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고, 세례를 받는다면 예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세례를 언급하면서 아주 특이한 표현을 곁들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표현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복음서가 아닌 서신 고후 13:13절에 나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개념과 연결되는 구절들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으나 이 개념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훨씬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에 로마 가톨릭, 정교회, 프로테스탄트에 속한 정통 그리스도교는 모두 삼위일체를 받아들입니다. 이를 거부하는 일부 그리스도교 교파도 있습니다. 모르몬교, 여호와의 증인, 유니테리언 등등입니다.
삼위일체 개념
삼위일체 하나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교파의 생각도 이해는 됩니다.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니까요. 하나님이 결국은 셋이라는 말이냐, 유일신론을 삼신론으로 만드는 것이냐, 하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나님은 한 분이나 그 기능과 형태가 셋이라는 양태론(modalism)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어떤 사람이 집에서는 아버지로, 회사에서는 직장인으로, 동호인 산악회에서는 회원으로 활동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양태론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으로 단죄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개념에 손상을 입히는 단일군주론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양태론에 의해서 예수의 정체성(인성)이 모호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의 초점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즉 예수가 실제로 신이냐, 인간이냐, 신과 인간의 중간이냐, 하는 논쟁입니다.
이 문제가 교회 역사에서 일단락된 것은 기원후 325년 6월에 열린 니케아 공회였습니다. 당시 두 대표적인 신학자가 대립했습니다. 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였던 아리우스(250~336)입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한마디로 규정하면 종속론입니다. 로고스이신 예수는 창조된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처럼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피조된 인간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는 하나 실제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예수는 완전한 신이 아니라 일종의 반신(半神, half-god)입니다. 폴 틸리히는 아리우스의 이런 관점을 가리켜서 ‘고대 세계의 영웅 숭배와 비슷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그리스도교 사상사』 136쪽)
아리우스 사상을 격퇴한 신학자는 아리우스와 똑같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대주교로 활동한 아타나시우스(296~373)입니다. 그는 로고스이신 예수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했습니다. 피조물이라면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님보다는 열등한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지지를 얻어서 니케아 공회에서 반(反)아리우스적인 신조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신조의 예수 항목에서 핵심은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것(homoousios)입니다. 마침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니케아신조를 고백하는 6월 첫 주일입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은 모든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외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빛에서 나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으로서 지음 받지 않고 나셨으며, 성부와 본질이 같으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지음을 받았습니다.
‘호모우시오스’ 개념을 담은 니케아신조가 정통 교리로 결정된 이후로 아리우스 신학은 배격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단의 출몰 가운데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갈 수 있게 한 동력이 된 것입니다. 폴 틸리히는 같은 책에서 만일 아리우스가 승리했다면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와 병행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종교’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예수를 자기들이 섬기는 여러 신 중의 하나로 인정해주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런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교회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만이 그리스도이고, 퀴리오스(주)이고,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로마 제국과 오랜 세월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충돌이 피하려고 그들과 타협했다면 교회는 틸리히가 짚었듯이 ‘원 오브 뎀’(one of them)에 머물렀겠지요.
세례
다시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표현을 쓴 마태복음 기자는 삼위일체 논쟁이 격하게 벌어져서 이단으로 몰린 아리우스의 책이 불살라진 4세기의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마태는 스스로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하나님의 존재 신비를 저런 형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느 산골짝에서 시작한 옹달샘이 골짜기를 흘러내리면서 강을 이루다가 결국에는 바다에 이르러 큰물을 이루듯이 그리스도교 교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대되고 깊어지면서 풍성해졌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표현으로 말하려 했던 그 하나님 존재 신비가 무엇인지를 알면 그 이후로 이어졌던 삼위일체 논쟁의 실체를 조금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이 표현은 ‘세례’와 관련됩니다. 세례는 구원 문제에 해당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사는 겁니다. 세례받은 사람은 더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의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는 이제 죄의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제 의의 아들과 딸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인정받을 걱정이나 욕망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능한 한 많은 연봉을 받으려는 이유는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얻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연봉으로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몰두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평화와 기쁨과 자유를 얻었으니까 거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죄에서 벗어난 겁니다. 이게 맞는 말인가요? 비유적으로 여기 마라톤 달리기 시합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시다. 독특한 시합입니다. 상금 지급 기준은 비밀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비밀을 압니다. 일등과 꼴찌가 똑같은 상금을 받는 시합입니다. 비밀을 안다면 굳이 일등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을 겁니다. 시합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는 이미 상금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마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17절이 가리키듯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의심하면 구원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심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의심하는 사람들에 속합니다. 자신들의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즉 시체가 무덤 안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사건, 그리고 성령의 생명 활동과 깊이 연결된 구원 사건이라는 사실을 변증하려고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표현을 여기서 사용했습니다. 그 표현에 동의하든 않든 일단은 그 의미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봅시다.
아버지, 아들, 성령
여기서 ‘아버지’는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전권으로 창조하셨고, 자기 백성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를 알아야 부활도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존재의 신비이고 생명의 신비이듯이 부활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은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을 맺으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 새로워졌습니다. 비유적으로, 가부장적인 아버지상에서 민주적인 아버지상으로 바뀐 겁니다.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역사적으로 실행된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 개념에서 아들로서의 하나님인 예수는 성육신(몸을 입으신)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사 초월적인 존재가 역사 내재적인 존재로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수준이 하늘에서 땅 아래로 격하되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구체적인 역사에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도 물론 우리의 역사에 들어오십니다.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아들로서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친구처럼 구체적인 삶의 중심에 들어오신 겁니다. 비유적으로 온라인 예배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현장 예배는 아들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은 구체적인 역사와 일상에서 구원을 경험하게 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에 이어서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이 성령의 차원까지 확장된 겁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입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기운입니다. 전쟁의 영이 아니라 평화의 영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의 영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와 그리스어 ‘프뉴마’는 아주 포괄적인 차원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영입니다. 바람이나 기운이나 숨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마태복음 기자는 부활의 주님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무덤 안의 시신을 확인하는 차원에만 머물지 말고 이 세상에서 생명의 영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의 일들이 일어나는 걸 경험한다면, 그것의 압축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부활의 현실성(reality)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너무 관념적이고 현학적이어서 신학자들에게나 관심거리이지 일반 신자들의 삶과 신앙생활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와 개념이 실감 나지 않는 겁니다. 그럴 수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양자역학이 일상생활에서 실감 나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정말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세상의 최고 원리나 자연 원리로 보는 게 아니라 우리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맺으시는 분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저 먼 우주 공간 어딘가에 고고히 앉아서 세상을 관망하는 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함께, 그리고 의존적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일하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창조주 하나님과 성령과 함께, 그리고 의존적으로 구원 사역을 감당하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단순히 진화론이나 양자역학이나 사회과학처럼 사물과 세상을 기계적으로 끌어가는 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인격적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의존적으로 생명을 발현하고 완성하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라는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에 가깝게, 그리고 깊이 참여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비유적으로 같은 회사에 다니던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됨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지듯이 삼위일체 개념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과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 겁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주신 약속을 실감할 겁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언급된 임마누엘 신앙이 마지막 단락에서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으로 임마누엘 신앙이 성립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여러분과 어떻게 함께하시는지 ‘깨어서’ 살펴보십시오.
어느 산골짝에서 시작한 옹달샘이 골짜기를 흘러내리면서 강을 이루다가 결국에는 바다에 이르러 큰물을 이루듯이
이것은 남상(濫觴)이라는 단어의 설명인데 공자가 자로라는 제자에게 한 말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술잔을 띄울 정도의 적은 물입니다. 배를 띄울 정도의 큰 강물도 그 근원은 술잔을 띄울 정도의 적은 물이었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의 시발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 이름의 첫 두 자가 이 단어이므로 고교, 대학 때의 제 별명이기도 하고 제가 호로 쓰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설교에서 보니 참 놀랍기도 하고 반가운 단어입니다.
참고로 제 호는 남상(濫觴), 반진(返眞), 상용(商容), 동경(銅鏡), 개석(介石), 일충(一充) 등이 있습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삼위일체 주일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어 기쁜 하루였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본문으로 '삼위일체'를 언급하신 한국 교회의 다른 강단의 설교도 듣게 된 하루였죠. 마태 공동체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믿음의 고백들이 오늘 한국 교회에도 풍성해지길 기대해 봅니다. 고대 도시 '니케아'의 위대한 신앙선포가 느슨해진 저의 영성을 깨운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