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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 https://youtu.be/ZNckhDjV_B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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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가복음 6:1-13 |
제자들의 축귀 능력
막 6:1-13, 성령강림 후 7주, 2024년 7월 7일
오늘 설교 본문 첫째 단락인 막 6:1-6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인근에서 활동하다가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몇 년 만에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동행했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경건한 유대인들이 늘 그렇듯이 예수님 일행은 회당을 찾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바꾸면 고향을 떠났던 어떤 목사가 오랜만에 고향 교회 예배에 참석한 겁니다. 예수께서는 랍비처럼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놀라워했습니다. 이미 예수에 관한 소문을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겠지요. 그들의 반응이 예상외입니다. 예수님을 반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3절이 이 사실을 이렇게 전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자기들과 똑같이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예수가 완전히 비범한 인물이 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요. 고향 사람들만이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의 지도층 인사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요 1:43절 이하를 따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아주 특별한 분을 만났다고 자랑하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발언에서 당시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 파송
오늘 설교 본문 둘째 단락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 이야기입니다. 막 6:7절에 따르면 열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 권능은 앞서 고향 사람들이 한 말에도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놀라면서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냐.’(2절)라고 했고, 예수께서는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5절) 없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권능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뒤나미스(δύναμις)인데, 보통 miracle(기적)을 뜻합니다. 7절에 나오는 권능은 그리스어 ἐξουσία(엑수시아)의 번역입니다. 엑수시아(authority, supernatural power)도 뒤나미스와 비슷한 뜻입니다. 어쨌든지 사람들은 그런 일에 호기심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벌어졌을 때 군중들이 수천 명씩 예수님께 몰려들었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악령이 함께하는 증거라고 비판할 수도 있었습니다. 눅 11:14절 이하를 따르면 사람들이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지팡이 외에는 양식, 배낭, 돈을 준비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만 신고 옷은 여벌을 준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해도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마당에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는 말씀은 비현실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제자로 살려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주기도’에도 오직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기도가 포함된 산상설교에는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이런 가르침은 오늘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와는 어긋나 보입니다. 세심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사회에서 도태될지 모르니까요. 그러나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성만은 옳습니다. 이 순간, 오늘 바로 여기서 생명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에서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들지 못할까 불안해하지만 않는다면 지팡이와 일용할 양식과 오늘 하루만으로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길을 떠나야 합니다. 자기들끼리만 재미있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여러 마을로 흩어져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12, 13절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보도합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이 행한 일은 세 가지입니다. 회개하라는 선포, 귀신 축출, 병자 고침입니다. 이를 더 정확하게 분류하면 회개 선포가 한 묶음이고, 귀신 축출과 병자 고침이 다른 한 묶음입니다. 회개 선포는 일종의 설교입니다. 예수께서도 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으니까 제자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도 바로 회개 선포라는 건 당연합니다. 제자들은 회개하라는 말만 하지 않고 그 말에 걸맞은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귀신 축출과 병자 고침입니다. 귀신 축출은 병든 정신을 고치는 일이고, 병자 고침은 병든 육체를 고치는 일입니다. 정신과 육체는 구분되기는 하나 분리되지 않기에 귀신 축출이나 병자 치료는 같은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모든 불행에는 귀신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귀신을 축출할 수만 있다면 육체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한 대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할 때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7절에 나온 귀신이라는 단어와 13절에 나오는 귀신이라는 단어가 그리스어로는 다릅니다. 7절에는 πνεῦμα(spirit)로 나옵니다. 프뉴마에 ἀκαθαρτος(unclean)라는 형용사가 붙습니다. 13절에는 δαίμων(demon, evil spirit)으로 나옵니다. 7절이 말하는 ‘깨끗하지 못한 영’이나 13절이 말하는 ‘악령’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과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영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을 제어하는 것이라고, 즉 축귀라고, 그게 제자 공동체인 교회의 출발이라고, 그리고 축귀가 가능하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21세기 첨단 문명 한가운데서 사는 현대인들은 이런 말씀을 실감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성경 시대 사람들은 과학과는 거리가 먼 시대에 살았기에 악령과 귀신을 말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의 세계관은 미숙할 수 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별이 돈다고 생각했습니다. 화산폭발과 지진과 해일 등은 신의 현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오늘 우리보다 삶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뚫어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의 수준이 훨씬 못 미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으로서의 실존은 변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밥을 먹고 배설해야 합니다.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도 하나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타적인 사람도 있고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옛날 사람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산다고 해도 여전히 잔인합니다. 대량 살상은 더 많이 벌어집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지금 세계 테니스 대회 중에서 역사적 전통이 가장 오래된 영국 윔블던 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어떤 전문가의 설명에 따르면 그 대회에서 우승 후보 1순위는 이탈리아 선수 야닉 시너이고, 2순위는 스페인의 알카라스이고, 3순위는 세르비아 노박 조코비치라고 합니다. 영천 테니스 동호회원들의 테니스 실력은 이런 세계적 선수들과 비교할 때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는 무한하게 깊고 아득하기에 지금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안다고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20억 년 후에도 인류가 생존해있다면 그들도 지금 우리와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현대의 자연과학을 기준으로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세상에 관한 생각이 깊지 못한 겁니다.
성경이 더러운 귀신이나 악령이라고 짚은 세력을 오늘 우리도 똑같이 경험합니다. 귀신은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게 무엇인지는 우리가 대충 압니다.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지금도 전쟁이 이어집니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옵니다. 어린아이와 부녀자들과 노인들도 죽습니다. 인간 외에 자기 종족을 이렇게 죽이는 동물이 있을까요?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남북한 사이에 전쟁이 내일 일어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노인과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유난히 높습니다. 젊은이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 곧 귀신이고 악령입니다. 의대 신입생 증원 문제로 몇 달 동안 나라가 시끄럽고,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이 문제 역시 돈 때문이 아닐까요? 돈이 목적이 되었고 사람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돈은 물론 필요했으나 지금처럼 돈이 완전히 그 외의 것을 압도하는 시대는 처음입니다. 인간의 도구화 현상이 귀신 작용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사회 현상을 일일이 거론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문제는 여러분의 생각에 맡기고 귀신 들렸다는 말이 인간의 존엄에 속한 자유의 상실이라는 사실만 설명하겠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합니다. 알코올이나 마약이 인터넷 게임에 중독되듯이 사람의 고유한 자유를 상실하는 겁니다. 겉으로는 자신이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말도 합니다만 실제로는 전혀 이성적이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똑똑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피조물이라 말하고,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낮춰보려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본질을 정확하게 뚫어본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하셨겠습니까. 겉으로는 회를 칠해서 깨끗해 보이나 속에는 시체가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유달리 나쁜 사람들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쉽게 귀신에, 또는 나쁜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유를 상실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자신을 보더라도 말은 그럴듯하게 하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저를 지배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롭지 못하다면 귀신 들린 거지요. 저를 비롯한 21세기 현대인 모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에서는 귀신 들린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축귀(逐鬼) 능력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었을까요? 이미 앞에서 귀신을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라고 말씀드렸으니까 제자들의 축귀 능력을 영화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신부의 구마(驅魔) 능력으로 여길 분들은 없을 겁니다. 제자들이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세력을 제압했다면 세상을 무언가 새롭게 만들만한 능력이 있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역사에서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였습니다. 소수파 중의 소수파였습니다. 유대교도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했고, 로마제국도 그리스도인들은 조롱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도 고전 1:2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이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제자들이 많은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은 별로 근거가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저는 제자들의 축귀 능력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바로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세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입니다. 고향 사람들 이야기에서 마지막 문장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6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파송 명령을 받았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정의롭게 바꿀만한 정치 지도자도 아니고 돈으로 세상을 새롭게 할만한 재벌도 아니었으나 예수를 제대로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들이 선포한 ‘회개하라.’라는 말은 곧 ‘예수님을 믿으시라.’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온전하고 유일한 삶의 공동 근거이자 사실상 자랑거리입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우리 신앙의 선배였던 바울의 발언을 소개하겠습니다. 빌 3:8-9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나는 율법에서 생기는 나 스스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 곧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에게서 오는 의를 얻으려고 합니다.
바울이 고백하는 이런 믿음이 있기에 악한 귀신과 악령이 좀비처럼 곳곳에서 출몰하는 21세기 오늘날에도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을 어딘가 이상하게 여기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겁니다. 믿음이 무슨 요술방망이라도 되나, 세상에서 인기를 끌고 잘났다는 인정을 받고 사는 게 중요하지 믿음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인기를 얻으려고 그들은 일상에서 약간씩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위선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우 여러분도 남이 부러워할 멋진 인생을 성취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과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만은 알아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기사가 딸린 벤츠를 타고 가면서 온갖 잡동사니 같은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한 사람이 있고,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존재의 기쁨 자체로 마음이 가벼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누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으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은 그 외의 모든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는 데에 있겠지요. 이를 어떻게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음악의 본질에 가까이 가야 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옳다는 인정을 받아서 인간 고유의 자유를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이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는 더러운 영을 제어할 권능이, 즉 제정신을 차리고 살아갈 수 있는 축귀 능력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아멘.
저는 턱걸이를 한 개도 하지 못합니다.
어느날 기분에 턱걸이를 할 수 있겠다 싶은 날이 있었습니다.
자신있게 철봉에 매달려 팔을 당겼습니다.
결과는... 꽝!
어 이상하다. 분명히 될 꺼야 라고 다시 당겨 보지만
결과는 역시... 꽝!
세상에는 아무리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성서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실상이 아니라
엄중한 실존을 보게 됩니다.
내 의지와 다른 실상을 보게 됩니다.
또한 많은 것들, 아니 거의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