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9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사순절 조회 수 7621 추천 수 0 2023.03.12 23:38:37
설교보기 : https://youtu.be/-RSQq2KN9v8 
성경본문 : 출애굽기 17:1~7 

르비딤광야에서

17:1~7, 사순절 셋째 주일, 2023312

 

 

지금도 몽골, 시베리아, 아프리카 등등, 세계 여러 곳에서 유목민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처럼 첨단 문명사회에 깊숙이 들어간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삶은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을 펑펑 쓰지만, 그들은 씻을 물은 물론이고 마실 물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축에게 먹일 풀과 물을 찾아서 수시로 이동합니다. 자연생태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살기에 문명사회가 제공하는 안전망이 크게 부실합니다. 태양광으로 전기를 사용하는 이들도 간혹 있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이렇다 할 연봉이나 연금이 없고, 병원이나 사우나나 편의점이나 맛집이나 영화관도 없습니다. 하루 24시간을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쏟아붓습니다. 그들의 삶은 불행할까요? 그들과 비교할 때 왕처럼 사는 우리는 그들보다 열 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두 배 정도는 더 행복할까요?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르비딤에서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목민으로 떠돌이 생활을 했던 광야 시절을 유대교 신앙의 실제적인 시원으로 여깁니다. 출애굽과 만나와 율법이 다 이 광야 시절과 연관됩니다. 오늘 설교 본문(17:1~7)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 광야까지 왔습니다.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 이전에 이미 물 문제가 그들에게 일어났었습니다. 15:22절 이하를 따르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갔으나 물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금 더 가서 마라에 이르자 오아시스 같은 샘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써서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길 안내를 왜 이렇게 못하느냐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서 그곳에서 자라는 나무의 가지를 꺾어 물에 던지니까 물이 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뭇가지가 정화작용을 했나 봅니다. 그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지 얼마나 지났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오늘 본문에서 다시 물 문제가 벌어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3절입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이 한 문장에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의식이 드러납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21세기 현대인의 생각도 거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출애굽을 문제 삼았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출애굽이야말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간절하게 기다리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충만하게 느낄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잘 먹고 잘살던 자신들을 공연히 끌어내서 이 고생을 시키냐고 따집니다. 그들의 주장이 무조건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들이 애굽 제국 안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던 지역은 나일강 유역 곡창 지대인 고센입니다. 애굽에서 소수민족 억압정책이 종종 시행되었다고 해도 먹고사는 데는 크게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설득으로 출애굽을 감행했고, 가나안에 들어갈 부푼 꿈을 안고 있었으나 지금 그들은 애굽에서 상상조차 못 했던 생존의 위기에 떨어졌습니다. 애굽에 넘쳐나던 먹을거리가 크게 부족했고, 마실 물도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출 16장에는 그 유명한 만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식물의 일종) 같이 희고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16:31)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식물을 주식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만나라도 먹고 광야 시절을 버텨보자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수르 광야의 마라에서 겪었던 물 문제가 여기 르비딤에서 다시 벌어진 겁니다. 나일강물을 펑펑 쓰던 그들이 더는 참기 힘들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인 출애굽 사건 자체를 부정하게 된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비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물론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주기도>에서 부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죄인과 세리 같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지내셨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찬식을 통해서 먹고 마시는 문제를 예배 의식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식탁공동체로 표상하곤 했습니다. 이런 성경 전통을 아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하고 투쟁해야겠지요. 문제는 그런 어려움이 있다 해서 출애굽,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해방과 자유와 평화와 안식이라는 삶의 본질을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는 백성들의 하소연은 처절하게 들립니다. 그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까지야 누가 뭐랍니까. 그건 우리가 함께 걱정하고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이들과 다른 이의 자식과 다른 이의 가축이 마실 물까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다투고 모세를 원망했다는 것 아닙니까. 살다 보면 다툴 때는 다퉈야 하고, 책임을 물을 때는 물어야 하고, 원망할 때는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백성들보다 모세가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가 감당했어야 할 지도자로서의 무게는 상상 이상입니다. 40년 동안 모세는 계속해서 백성들의 그런 원망을 들었습니다. 급기야 마지막 모압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건너지 못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건너지 않은 건지 모릅니다. 자기의 책임은 여기 40년으로 충분하니까 가나안 땅에서의 일은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말입니다.

 

호렙산 반석에서

오늘 본문의 병행구인 민 20:1~13절에는 오늘 이야기가 조금 더 노골적인 어투로 나옵니다. 물이 떨어진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합니다. 그게 실제로 그들의 현실이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자 물이 흘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형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그 샘물을 므리바’(20:13) 샘물이라고 해설했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 7절에도 똑같은 내용의 해설이 붙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진행을 다시 따라갑시다. 모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17:4) 모세의 카리스마는 그의 후광으로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직접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이기는 했으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하게 압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백성들 사이에 내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넋두리 비슷한 말을 쏟아낸 모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모세가 문제 해결의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들고 호렙산에 있는 반석 앞으로 갔습니다. 장로들은 오피니언 리더들입니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보다 모세의 말과 행동을 더 잘 알아듣기도 했겠지만, 그들이 든든하게 서 있어야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에 관한 상징입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맛사, 또는 므리바에서 물이 터졌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런 기적을 행하셨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기적을 행해달라고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그게 바로 표적 신앙입니다. 예수를 향해서 표적을 보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런 관점으로 보는 건 초점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보겠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양을 키우는 양치기로 40년을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광야의 지리에 관해서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지역에 샘물이 있고 어디에 풀이 자라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샘물이라고 해서 늘 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찾아갔다가 허탕을 칠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몇 군데 돌아다니다가 호렙산 반석 틈에서 나오는 특별한 샘물을 드디어 찾은 겁니다. 이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무슨 말인가요? 이스라엘 백성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을 겁니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반석에서 물을 쏟아지게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신들의 계획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신경질적인 반응에 대한 경고입니다. 마지막 구절인 7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우리가 예배 중에 함께 읽은 시편 95편도 바로 이 므리바 사건을 언급했습니다.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8, 9) 구약성경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과 원망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런 삶의 태도가 이해는 갑니다. 가나안 땅까지 갈 길이 멉니다. 자칫 전염병이 돌면 민족 전체가 전멸할지도 모릅니다. 이들의 갈 길을 막는 다른 민족들도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데다가 먹을거리와 마실 물마저 자주 떨어집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인도해주신다는 모세의 말에 자신들이 세뇌당했거나 선동당한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과거에 애굽에서 일어난 열 가지 재앙과 홍해 사건과 만나 사건만으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기적과 표적이 지금 여기서 다시 멋지게 반복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기적과 표적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불안하니까 서로 다투고 책임을 묻고,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일상에서의 기적과 표적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툼과 원망과 하나님 시험에 떨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이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르비딤 광야 이야기가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의 표적과 기적을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만나 사건은 원래 있었던 광야의 먹을거리에 새로운 눈을 뜬 겁니다. 마실 물도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온통 기적과 표적이 널려 있습니다. 보통 때는 다른 것에 눈이 팔려서 못보다가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면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매튜 폭스는 원복(original blessi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직립 보행이 그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사람은 이 직립 보행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지 모릅니다. 유인원 중에서 호모 에렉투스(직립인)로 진화한 이들이 바로 우리 인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지구에 사는 많은 포유류 중에서 인간만 직립으로 걷습니다. 이게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봄비를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이것도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꽃 한 송이도 기적이고 표적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함께 예배한다는 사실도 표적이자 기적입니다. 밥 한 끼도 기적이자 표적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하실 겁니다. 우리의 삶에 표적과 기적 아닌 것은 없습니다. 만물이 신비라는 뜻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벼락부자가 되는 그런 표적과 기적을 찾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2) 일상에서 표적과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은, 즉 삶의 신비를 경험하는 사람은 내적인 충만감을 느끼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의 표징입니다. 내적인 충만감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마실 물이 크게 부족해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나, 나를 사랑하는 게 맞나, 하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케이(K) 문화다 뭐다 해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많이 떨쳤는데도 말도 많고 원망도 많고 다툼도 많은 걸 보면 내적 충만감이 전혀 없이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르비딤에서 물이 떨어질 때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경질적인 태도와 오늘 대한민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오버랩됩니다. 그들에게 제가 하나님 안에서의 내적 충만감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하면 당신, 설교하고 있네.’라는 비아냥을 듣기 좋습니다. 이런 시대에 설교자는 무기력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아주 직설적으로 질문하고 싶습니다. 내적 충만감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 정도로 자기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재산의 반을 잃었을지 모릅니다. 친구가 다 떠나서 외로운가요? 노동현장에서 땀 흘리며 고생해도 집을 장만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남편이나 아내와 사별한 분이 계신지요. 늙어서 힘이 빠지고 큰 병에 걸려서 걱정이 태산인가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다투고 원망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으신가요? 내 인생 망했으니 물려줘, 하고 말입니다. 그런 분들이 감당해야 할 인생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충분히 공감됩니다. 공감된다고 해서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삶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삶이 바로 옆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명확하게 알고 경험한다면, 그리고 안으로 한 걸음씩 깊이 들어간다면 생존이 위기를 느낄 정도로 마실 물이 떨어져도 삶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버틸 수 있도록 성령께서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믿기 힘든가요? 아직 바닥으로 내려간 실제적인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찍이 억울하게 삶의 바닥으로 내려간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밑바닥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profile

[레벨:3]거북도사

March 13, 2023
*.110.114.59

"비밀글입니다."

: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3, 2023
*.157.223.56

거북도사 님이 여고 교목으로 활동하게 되었군요.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찌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영혼이 가장 맑고 역동적인 나이의 학생들이기에 

성경의 놀라운 세계를 제대로 알려준다면 

새로운 세계에 분명히 눈을 쓰는 기쁨이 그들에게 있을 겁니다.

그런 일을 하시는 거북도사 님이 부럽군요. 


profile

[레벨:17]김사관

March 13, 2023
*.196.228.81

어제 목사님 설교를 눈 앞에서 직접 들으며, 목사님의 '내적 충만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지금 제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불만 불평하지 않고 '내적 충만감'을 느끼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점심에 지인 분과의 대화 중에,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1층으로 떨어졌을 때의 심정이 다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1층 아래에 지하 1층, 지하 2층, 아니 그 보다 더 깊은 나락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비로소 눈이 떠지더군요. 그런 곳에서도 오히려 '재미'를 찾을 수 있다는 목사님 말씀에 비로소 공감이 되고 더불어 동의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3, 2023
*.157.223.56

김 사관 님을 어제도 예배 현장에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임마누엘' 신앙이 일종의 종교적 덕담이 아니라 

실제 삶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저도 나이가 들면서 더 절감합니다.

예수께서 지옥에도 가신 적이 있다는 초기 그리스도교 고백을 안다면 

지옥에 떨어져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지요.


profile

[레벨:18]부스러기은혜

March 13, 2023
*.253.57.26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경질적인 태도가 오늘 우리의 삶의 태도와 오버랩된다고 하셨죠?

저는 에서의 태도가 오버랩 되더군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장자권이 무슨 무슨 소용이 있냐고 했던...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존재'라는 단어를 안중에 두고 살지 않았을것 같습니다.

나란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이 존재의 신비와 비밀, 그 아득한 깊이.

내가 존재하고 있음이 매 순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내가 접하는 모든 관계와 피조물 또한 그런 시선으로 대하게 되겠지요.

특강 메뉴에 올려주신 글(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에 이런 메세지가 기억이 나는군요

'우리의 일상, 삶이 절대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에 함몰되어 삶으로써 일상의 상투성(영혼의 빈곤)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일상의 심연을 직면하여야 한다......'

일상의 심연, 존재의 신비, 삶의 깊이...

손에 잡힐듯 말듯한 화두입니다.

선사의 고승에게나 어울릴법한 이 단어들이 장삼이사인 우리네에게

언제쯤 "유레카!!" 라고 외치며 격한 감격속에 

오늘이란 시공간이, 나란 존재의 살아 있음이 빛으로, 보석으로, 기적으로 다가올까요?

소천 전에 오기나 하는걸까요?


자기 집 뒷뜰에서 거룩한 낯섬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는 우주에 가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숨져진 보석 발굴작업을 계속 해보렵니다.

수만가지 유혹과 방해물이 여전하겠지만요

'부족한 것을 보기전에 주신 것이 많음을 알게 하소서'

이 기도 응답은 언제나 주실런지.......

profile

[레벨:100]정용섭

March 13, 2023
*.157.223.56

부스러기은혜 님, 오랜만입니다. 

우리 앞에, 위에, 깊이에, 가깝고도 먼 그 현묘하고 아득한 그 존재의 신비가,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시간이 '현재'라는 경구가 가리키는 그 궁극적인 세계가

귀에 들리기는 하지만 눈으로 보기는 힘들지요?

저도 비슷하답니다.

죽을 때까지 그걸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할 겁니다.

다만 조금 더 가까이, 조금 더 또렷하게 경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 이상의 것들은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뿐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공지 기타 설교 퍼가는 분들께! [30] [3] 2007-02-16 96936
1059 성령강림절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고후 4:13-5:1) [4] 2024-06-09 402
1058 성령강림절 안식일 문제 (막 2:23-3:6) [2] 2024-06-03 920
1057 성령강림절 이사야의 '충만' 경험 (사 6:1-8) [2] 2024-05-26 1515
1056 성령강림절 파라클레토스 (요 16:4-15) 2024-05-19 1791
1055 부활절 믿음과 영생 (요 3:1-15) 2024-05-13 1779
1054 부활절 믿음과 사랑 (요일 5:1-6) 2024-05-05 2071
1053 부활절 상호내주의 신비 (요 15:1-8) [4] 2024-04-28 4261
1052 부활절 부족함 없는 삶, 가능한가? (시 23:1-6) 2024-04-21 5145
1051 부활절 죽은 자 가운데서 (눅 24:36b-48) [2] 2024-04-14 5211
1050 부활절 생명의 로고스 (요일 1:1-10) [2] 2024-04-08 5299
1049 부활절 예수 부활의 첫 증인들 (막 16:1-8) [4] 2024-03-31 5308
1048 사순절 향유를 손에 든 여자 (막 14:1-11) [4] 2024-03-24 5536
1047 사순절 새 언약의 날 (렘 31:31-34) [2] 2024-03-17 5338
1046 사순절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 2:1-10) [6] 2024-03-10 5603
1045 사순절 십자가의 길과 하나님의 능력 (고전 1:18-25) [2] 2024-03-04 5747
1044 사순절 예수 승천과 하나님 우편 (벧전 3:18-22) [9] 2024-02-18 5980
1043 주현절 예수의 변모 사건 (막 9:2-9) [5] 2024-02-11 5705
1042 주현절 여호와를 믿고 기다리는 사람 (사 40:21-31) [6] 2024-02-05 5894
1041 주현절 예수의 배타적 권위 (막 1:21-28) [4] 2024-01-28 5842
1040 주현절 부름-버림-따름 (막 1:14-20) [2] 2024-01-21 5788
1039 주현절 사무엘의 하나님 경험 (삼상 3:1-10) [2] 2024-01-14 5804
1038 주현절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행 19:1-7) [5] 2024-01-07 5883
1037 성탄절 만물의 찬양 (시 148:1-14) [2] 2023-12-31 6027
1036 대림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눅 1:26-38) [2] 2023-12-24 7069
1035 대림절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 (사 61:1-4, 8-11) [2] 2023-12-17 7490
1034 대림절 하나님의 날: 새 하늘과 새 땅 (벧후 3:8-13) [2] 2023-12-10 7452
1033 대림절 깨어있음이란? (막 13:24-37) [2] 2023-12-04 7587
1032 창조절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엡 1:15-23) [2] 2023-11-26 5907
1031 창조절 은혜를 갈망하는 시인 (시 123:1-4) [2] 2023-11-19 5966
1030 창조절 외면당한 사람들 (마 25:1-13) [5] 2023-11-12 6192
1029 창조절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의 역설 (마 23:1-12) 2023-11-07 5943
1028 창조절 그리스도 논쟁 (마 22:41-46) [7] 2023-10-29 6186
1027 창조절 재림신앙 (살전 1:1-10) [4] 2023-10-22 6189
1026 창조절 금송아지 이야기 (출 32:1-14) 2023-10-15 5893
1025 창조절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 (마 21:33-46) 2023-10-09 5918
1024 창조절 과정으로서의 구원 (빌 2:1-13) 2023-10-01 5933
1023 창조절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마 20:1-16) [2] 2023-09-24 6141
1022 창조절 홍해 이야기 (출 14:21-31) 2023-09-17 6089
1021 창조절 도반 공동체 (마 18:15-20) [4] 2023-09-10 6044
1020 창조절 '악' 앞에서 (롬 12:14-21) [4] 2023-09-04 6319
1019 성령강림절 모세의 출생 이야기 (출 2:1-10) 2023-08-27 5923
1018 성령강림절 가나안 여자의 큰 믿음 (마 15:21-28) [6] 2023-08-20 6353
1017 성령강림절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롬 9:1-5) [2] 2023-08-08 6537
1016 성령강림절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 (마 13:31-33, 44-50) [2] 2023-07-30 6581
1015 성령강림절 여기 계신 하나님 (창 28:10-19a) [4] 2023-07-23 6679
1014 성령강림절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롬 8:1-11) 2023-07-16 6187
1013 성령강림절 영혼의 안식 (마 11:16-19, 25-30) [4] 2023-07-09 6437
1012 성령강림절 인신 제사의 유혹 (창 22:1~14) 2023-07-03 6117
1011 성령강림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4] 2023-06-25 6598
1010 성령강림절 성령과 하나님 사랑 (롬 5:1~8) 2023-06-18 6324
1009 성령강림절 아브라함의 소명 경험 (창 12:1~9) [2] 2023-06-11 6486
1008 성령강림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마 28:16~20) [6] 2023-06-05 6584
1007 성령강림절 평화-파송-성령-사죄 (요 20:19~23) [2] 2023-05-28 6417
1006 부활절 가난한 자의 하나님 (시 68:1~10) [4] 2023-05-21 6698
1005 부활절 "살아있음" (요 14:15~21) [2] 2023-05-14 6384
1004 부활절 어둠에서 빛으로! (벧전 2:2~10) [5] 2023-05-08 6690
1003 부활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벧전 2:18~25) 2023-04-30 6137
1002 부활절 눈이 밝아진 두 제자 (눅 24:28~35) [7] 2023-04-23 6618
1001 부활절 믿음의 깊이 (요 20:24~31) 2023-04-16 6942
1000 부활절 감추어짐과 나타남 (골 3:1~4) [7] 2023-04-09 7211
999 사순절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 50:4~9a) 2023-04-02 6695
998 사순절 하나님의 영 (롬 8:6~11) [4] 2023-03-26 6755
997 사순절 바리새인의 '죄' 문제 (요 9:35~41) 2023-03-19 6676
» 사순절 '르비딤' 광야에서 (출 17:1~7) [6] 2023-03-12 7621
995 사순절 믿음과 영생 (요 3:1~7) [2] 2023-03-05 7039
994 사순절 생명 왕권 (롬 5:12~19) 2023-02-26 6919
993 주현절 예수는 빛이다 (마 17:1~8) [4] 2023-02-19 7371
992 주현절 양자택일 (신 30:15~20) [3] 2023-02-12 7313
991 주현절 천국 윤리 (마 5:13~20) [4] 2023-02-06 7244
990 주현절 삶의 무게 (미 6:1~8) [4] 2023-01-29 8223
989 주현절 가버나움 사람 (마 4:12~23) [4] 2023-01-22 7409
988 주현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고전 1:1~9) [4] 2023-01-15 7304
987 주현절 여호와께 예배하라! (시 29:1~11) [2] 2023-01-09 7258
986 성탄절 나사렛 사람 (마 2:13~23) [4] 2023-01-01 8073
985 성탄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눅 2:1~14) [7] 2022-12-25 8174
984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마 11:2~11) [3] 2022-12-22 8392
983 대림절 구원의 징표 (마 11:2~11) [1] 2022-12-11 9666
982 대림절 여호와를 아는 지식 (사 11:1~10) [3] 2022-12-05 9258
981 대림절 잠듦과 깨어 있음 (마 24:36~44) [2] 2022-11-27 9708
980 창조절 기쁨 충만, 가능한가? (빌 4:4~9) [2] 2022-11-21 7687
979 창조절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 (눅 21:10~19) 2022-11-14 7422
978 창조절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시 145:1~5, 17~21) 2022-11-07 7350
977 창조절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 (살후 1:1~4, 11~12) [2] 2022-10-31 8041
976 창조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 2:23~32) [4] 2022-10-24 7376
975 창조절 기도의 신비와 능력 (눅 18:1~8) 2022-10-17 8834
974 창조절 하나님께 영광=예수께 영광! (눅17:11~19) [8] 2022-10-11 8067
973 창조절 은혜의 시원적 깊이 (딤후 2:1~11) 2022-10-03 7402
972 창조절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눅 16:19~31) 2022-09-26 8188
971 창조절 하나님과 사람 '사이' (딤전 2:1~7) 2022-09-19 7946
970 창조절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 (렘 4:11~12, 22~28) [1] 2022-09-12 8176
969 창조절 왜 예수 제자인가? (눅 14:25~35) 2022-09-05 7948
968 성령강림절 복된 삶의 역설 (눅 7:1, 7~14) [6] 2022-08-29 8545
967 성령강림절 흔들리지 않는 나라 (히 12:18~29) [4] 2022-08-22 8421
966 성령강림절 포도원 노래꾼 (사 5:1~7) [4] 2022-08-15 7208
965 성령강림절 준비된 삶이란? (눅 12:32~40) [5] 2022-08-08 8324
964 성령강림절 하나님의 긍휼과 거룩하심 (호 11:1~11) [6] 2022-08-01 8314
963 성령강림절 성령을 주시리 (눅 11:1~13) [6] 2022-07-25 9374
962 성령강림절 ‘말씀’이 없는 시대 (암 8:1~12) 2022-07-17 9005
961 성령강림절 아들의 나라 (골 1:1~14) 2022-07-11 7362
960 성령강림절 하늘에 기록된 이름 (눅 10:1~11, 16~20) [2] 2022-07-03 8044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